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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홍수 원인은?
이번에 네팔 홍수를 일으킨 물이 2천만톤이라고 한다. 평소 유량에 추가된 유량이 2천만톤이다. 빙하에서 직접 나온 물이 200만톤이라고 하는데 나머지 1800만톤은 어디서 나왔을까? 자연호, 언색호, 빙하호 이야기를 하는데 많아봤자 100만톤이다. 빙하호가 만들어졌다면 잠시 물 흐름을 막아 속도를 늦추었을 것이다. 빙하호는 터져봤자 이 정도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시속 180킬로의 속도로 7분만에 20킬로를 갔다고 하는데 빙하호가 만들어질 시간이 없다. 보도가 약간식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당일 위성사진에는 빙하호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떨어져나간 빙하의 크기 200만톤이 틀린 것이다. 가로 500 세로 800에 50에이커의 빙하가 떨어져 나갔다. 넓이는 62만제곱미터라고 한다. 두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진을 참고하여 빙하의 두께를 평균 20미터로 가정하면 1200만톤이다. 끌고 내려온 경사면의 쇄설류 600만톤에 하류를 휩쓸어 추가된 쇄설류 600만톤을 더하면 2천만톤이 된다. 즉 빙하호는 없었거나 있었어도 크기가 작았다. 2천만톤이나 되는 물의 대부분은 빙하에서 왔거나 빙하가 떨어지면서 끌고온 쇄설류 속에 포함되어 있던 물이다. 소양호 저수량 29억톤이다.
팔당호 2억 4천만톤이다. 이에 비해 이번 홍수 2천만톤은 많은게 아니다. 문제는 위력이다. 그 위력은 어디서 왔을까? 여기에 필요한 것이 유체역학이다. 우리는 유체의 힘을 오해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물 속으로 도망친 주인공을 향해 총을 쏘아대지만 물 속의 총알은 위력이 없다. 물 속에 포탄을 쏘면 어떻게 될까? 전혀 효과가 없다. 활도 효과가 없으므로 작살을 쏴야 한다.
포탄과 어뢰의 추진 방식은 다르다. 물의 밀도가 공기의 천배이므로 그만큼 위력이 1/1000로 약해진다. 공기 중에 1킬로를 가는 총알의 관성력으로 물속에서 1미터 밖에 못 간다.
위 실험에서 불에 가열된 총알은 피식 소리를 낼뿐 총성도 울리지 않는다. 나무토막에 구멍을 내지 못한다. 총신이 없는 경우 총알은 전혀 위력이 없다. 조총을 쏘려고 해도 종이로 막고 진흙으로 막는다. 이중삼중으로 틀어막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가스가 새면 피식하고 만다. 반대로 엄청난 힘을 내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대전차고폭탄, 곧 날탄에 쓰이는 메탈제트다.
구리가 녹은 액체가 많게는 1미터 이상 구멍을 뚫는다. 문제는 한국인 중에 그 원리를 아는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먼로 노이만 효과는 140년 전에 밝혀졌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육군에서 탄약병은 잘못 배우고 있었다. 3천도의 고열이 전차에 바늘구멍만한 구멍을 내면 전차병이 가열되어 죽는다는 말인데 틀렸다. 내부가 끓어 고압이 발생한다는 말도 있는데 틀렸다.
메탈제트가 높은 RPM이 걸려서 회전하면서 쇠를 갉아먹는다. 워터제트로 금속을 절단하는 것과 같다. 고압의 물이 쇠톱처럼 쇠를 갉아먹는다. 고온고압의 액체 구리가 금속을 파먹어서 구멍을 내고 전차 내부에 직접 타격하여 전차병을 죽이고 탄약을 유폭시킨다. 전차가 로켓포를 제대로 맞으면 내부에서 한번 더 폭발하여 포탑이 통째로 날아가는 유튜브 영상이 있었다.
우리가 강력한 유체의 원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번에 네팔에서 홍수가 난 원인은 빙하가 낙하하며 각운동량이 쇄설류 속에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액체와 달리 한 덩어리로 내려왔다는 말이다. 거대한 도마뱀이 기어내려온 것이다. 이기는 힘과 같다. 나의 힘과 상대의 힘이 합쳐진 전체의 힘이 움직인다. 댐이 터져도 이 정도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소설에서 읽은 내용인데 제주도 바닷가에 표류해온 이양선의 화물을 쌓아놓고 불태우자 총알이 발사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거다. 말도 안 된다. 포탄이 터져서 파편에 맞는 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화승총이나 머스킷 총은 절차가 복잡해서 장전되어 있을 수 없고 후장식 볼트액션은 탄창이 있어서 발사되지 않는다. 총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쓴 소설이다.
눈덩이는 굴러내려오면서 힘을 키운다. 빙하가 경사면의 쇄설류와 강바닥의 자갈층을 훑고 내려오면서 힘을 키웠다. 태풍이 힘을 키우듯이 가속적으로 힘이 커졌다. 빙하호는 흐름을 막아 힘을 키우는데 방해된다. 보존된 각운동량이 쇄설류와 빙하를 반죽하여 유체의 점성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지진에서 관측되는 진흙의 액상화 현상과 같은 원리로 볼 수 있다.
우주의 엔진
빛은 있고 어둠은 없다. 엔진은 있고 바퀴는 없다. 활은 있고 과녁은 없다. 없는 것은 자체 동력이다. 영화는 스크린에 없고 필름에 있다. 극장의 영화는 관객이 떠난 순간 사라지고 없지만 필름은 다른 극장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일회용은 가짜다. 재현되어야 진짜다.
자연의 대칭되어 있는 둘 중에 하나는 진짜이고 하나는 가짜다. 과녁을 지워야 활이 찾아진다. 바퀴를 지워야 엔진이 찾아지고 파워트레인이 발견된다. 인간은 낮은 차원에서 손에 쥔 것을 놓지 못하므로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한다. 대칭 이원론도 나름 용도가 있다.
축 일원론으로 도약하지 못한다. 눈앞의 사금을 줍다가 멀리있는 금맥을 놓친다. 우리가 남과 비교하는 대칭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버리지 못한다. 나름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가 남들이 실패하면 그 반대쪽으로 돌아가고 쉽게 성공한다.
이런 약은 수법으로 2등은 해도 1등은 못한다. 일등이 되려면 대칭 2를 버리고 축 1로 도약해야 한다. 축은 동력이 연결되어 있는게 다르다. 동력의 전달경로 중심으로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원론은 자연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법이지 변화 자체의 엔진이 아니다.
바퀴는 엔진을 찾아가는 중간 단서에 불과하다. 바퀴를 붙잡고 만족하여 그것을 엔진으로 착각하면 피곤하다. 라디오를 얻어봤자 방송국이 없으면 소용없다. 라디오는 여럿이 있지만 방송국은 하나가 있다. 우리가 하나의 근원을 찾는 노력을 끝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변화의 엔진은 일원론이다. 단서는 대칭에서 얻지만 그 단서를 버려야 한다. 손에 쥔 빵을 버려야 빵 굽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야 또 낚을 수 있다. 남탓하면 되는 이원론의 편리함을 버리고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는 일원론의 근원을 찾아 나서야 한다.
대칭된 둘에서 하나씩 지우면 된다. 이 논리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시간과 공간은 둘이다. 이상하다. 둘은 대칭이다. 대칭이면 틀렸다. 시간과 공간은 부정되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공간 3차원과 시간 1차원을 통합해서 시공간 4차원 개념을 만들었다. 놓은 것이다.
시공간과 물질이 별도로 있는 것도 이상하다. 둘을 통합하면 양자역학이다. 시공간은 부정되어도 에너지는 남는다. 물질과 에너지를 통합하면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다. 시뮬레이션은 엔진이 있다. 시뮬레이션의 엔진이 신이다. 우주에 오직 모순과 모순의 제거만 있다.
시공간의 변화
물질의 밸런스 불변
양자(집합)의 파동 변화
에너지(집합)의 방향성 불변(수렴과 확산)
시뮬레이션 엔진의 모순과 무모순 변화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시뮬레이션 엔진이 있었다. 모순 제거 프로그램이다. 엔진이 터져서 모순을 다른 모순으로 물타기를 거듭하면 빅뱅이다. 활이 발사되고 총이 격발되었다. 공간은 모순이 감추어질만큼 팽창한다. 팽창우주의 모순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의 입장
시간과 공간은 인간이 물질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시간과 공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의 약속이다. 빛이 없는데 별도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림자는 빛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존재가 없는데 무가 별도로 있을 수는 없다. 무는 인간이 존재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런 식으로 가짜들을 하나씩 지우면 최후에 무엇이 남는가?
무는 없다. 태초에 무가 있었다는 생각은 불성립이다. 무가 없으므로 무한도 없다. 무한대나 무한소는 인간이 곤란한 문제를 얼버무리는 방식이다. 인간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다. 수학적 규칙으로는 유효하다. 윤회는 없다. 윤회는 시간이 과거와 미래로 무한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빅뱅우주론이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문제는 빅뱅에 드는 비용이다. 우주 두 개가 충돌하는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빅뱅 이전에 시공간이 없었지만 인과법칙은 작동한다. 영사기가 돌아가기 전에 영화는 없지만 필름이 있다. 북극의 북쪽은 없지만 북극은 영화의 첫 장면이다. 북극의 북쪽에는 북극의 탄생이 있다. 아기의 탄생 전에 자궁이 있고 그 이전에는 DNA가 있다. 그 차원에 없을 뿐 다른 차원에 있다. 빅뱅에는 비용이 든다. 우주 두 개가 충돌하는 정도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빅뱅의 비용을 제로로 만들면 시뮬레이션이다.
비용 개념을 모순 개념으로 바꾸면 된다. 우주의 본질은 무모순이다. 빅뱅 이전은 밸런스의 어긋남이 0인 상태였다. 우리우주는 모순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부분의 합과 전체가 같으려면 대칭되어야 하는데 회전체의 축은 회전하지 않으므로 비대칭이다. 그러나 심을 비우면 어떨까? 타원궤도를 가지고 세차운동을 하면 중심이 없으므로 대칭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우주는 밸런스의 보정까지 팽창되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게 아니라 태양이 진동하는 것이다. 흘라후프가 도는게 아니라 허리가 도는 것이다. 빅뱅이전은 무모순 우주였다. 빅뱅에의해 모순이 발생하므로 모순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팽창한 것이다. 중심이 있으면 밸런스가 맞지 않으므로 중심을 비워서 밸런스를 맞춘 결과 우주는 팽창되었다. 우주의 기본 힘이 척력인 이유는 중심을 비워야 밸런스가 맞아지며 중심을 비우면 그게 척력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면 그 시뮬레이션의 엔진이 있다. 우주는 시공간과 에너지의 장벽을 넘어 통합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완전성이 신이다. 대본이 있고 엔진이 있다, 시공간과 물질은 비용의 모순이 발생한다. 시간은 미래로 흐르는게 아니라 희미한 것이 세부적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신의 단위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튜닝되고 있다. 즉 우주는 모순을 제거하여 완전해지고 있다. 수미일관을 추구하고 있다.
생각하라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인간 하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생각할줄 모른다. 생각의 도구가 없다. 자세가 안되어 있다. 생각할 마음을 먹어야 한다. 액션을 멈추어야 하는데 멈추지 못한다.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기승전결로 이어가는 기세의 힘 때문이다. 흥분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보며 조합을 바꿔보는 것이다. 시도하지 않는다. 루틴을 바꾸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에 의한 각인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상태는 에너지가 걸린 상태다. 기어의 톱니가 물려서 돌아가고 있다. 결박되어 있다.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롭지 않다.
생각은 대칭의 연결고리를 따라야 한다. 인류는 구조론의 다섯가지 대칭을 모른다. 안과 밖의 대칭, 중심과 주변의 대칭, 위와 아래의 대칭, 앞과 뒤의 대칭, 연결과 단절의 대칭을 모른다. 우선순위를 모른다. 하나의 대칭을 발견하면 거기에 매몰되어 대칭을 갈아타지 못한다. 기어변환에 실패한다.
낮은 대칭에서 높은 대칭으로 올라서며 차원을 갈아타는 것이 생각이다. 인간은 차원을 모른다. 차원이 동력의 전달경로라는 사실을 모른다. 차원은 대칭과 축이 있다. 1차원은 그냥 선이 아니고 시작점과 끝점이 중심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대칭이 축을 공유하는데 따른 효율성이 동력을 전달한다.
인간의 생각은 자신을 흥분시키는 동력원에 붙잡히므로 기어변환이 안 된다. 더 높은 흥분으로 갈아타지 못한다. 욕심이나 시기심과 같은 저급한 흥분에 매몰된다. 대칭이 축을 공유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존재의 엔진과 파워트레인을 깨달아야 한다.
여야가 대립하는 이유는 국민이 축을 장악하고 동력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여야를 대칭시켜 지렛대로 이용한다. 국민이 내시균형의 경찰 역할을 맡아 여야를 죄수의 딜레마에 가둔다. 여당이 말을 안들으면 야당을 지렛대 삼아 통제하고 야당이 말을 안들으면 여당을 지렛대 삼아 압박한다.
상부구조를 차지한 국민에게 주도권이 있다. 국민이 더 차원을 차지한다. 집단 속에서 개인은 권력구조의 먹이사슬에 갇혀 사유가 제한되고 선택지를 빼앗긴다. 권력의 먹이사슬에 따른 기세의 힘에 갇힌다. 동력을 얻으려는 행동이 불리한 선택을 강요하므로 계속 나빠진다. 수렁으로 미끄러진다.
자연은 엔진과 파워트레인이 있고, 인간은 권력과 서열이 있고, 수학은 효율성과 함수가 있다. 나의 욕심에서 흥분하는 1차원의 자기소개 관점과, 남과의 대칭에 따른 시기심에서 흥분하는 2차원의 이겨먹기 관점이 있다. 3차원으로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재적 관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선을 얻어야 한다. 1차원적 사고와 2차원적 사고에 매몰된 저급한 루틴을 버려야 한다. 외부 관측자인 인간의 개입에 따른 오염을 차단하고 객체 내부 자체 메커니즘을 보는 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패턴의 규칙성에서 자궁을 인지했을 때 비로소 생각할 자격을 얻는다.
흥분하라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부분의 합에는 없고 전체에는 있는 것은 동력전달 경로다. 내부에 자체 에너지를 생산하는 엔진과 전달하는 변속기가 있다. 객체 내부의 자체 질서다. 구조가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다. 축과 대칭의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동력전달구조는 복제되므로 인간을 흥분시킨다.
1차원이든, 2차원이든, 3차원이든 관점이 인간을 흥분시키고 집중시키는 것은 같다. 1차원이 음식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라면, 2차원은 다른 사람을 질투하여 흥분하는 것이다. 인간을 격동시키는 점은 같다. 1차원과 나와 직접 연결되고, 2차원은 나와 간접 연결되고, 3차원은 나를 배제한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데 우리는 왜 메시의 드리블에 환호하고 이강인의 어시스트에 감동하는가? 영화든 소설이든 남의 이야기다. 이야기 속에 인간을 격동시키는 엔진이 있다. 배웠다가 다른 곳에 써먹어야 한다.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복제하는 능력이 있다. 자연의 패턴에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
패턴은 도장이 반복적으로 찍히는 것이다. 찍힌 자국이 있으면 찍는 엔진도 있다. 인간은 패턴을 발견하면 흥분한다. 원시인이라도 동물의 발자국을 보면 흥분한다. 발자국을 추적하여 사냥에 성공한다. 흥분이 인간을 살아남게 한 것이다. 흥분할 일에 흥분하지 않는 인간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생각은 흥분에서 시작된다. 나는 인간들이 도무지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을 기폭시키는 흥분장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모순을 봐도 흥분하지 않는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 김민석의 반칙을 봐도 소 닭보듯 시큰둥하다. 흥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 생각을 강요할 수 없다.
지구가 둥근 것은 백 미터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보인다. 눈으로 보고도 못봤다는데 어쩌겠는가? 보이는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다섯살 때 경주남산에 올라 처음 시내를 내려다봤을 때의 감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어!' 하고 공감해야 대화가 된다.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다.
공룡만 해도 그렇다. 티라노사우루스의 복원도는 무게중심이 안 맞아서 앞으로 고꾸라지도록 그려져 있다. 어색하지 않은가? 불편하지 않나? 공룡의 복원도는 사후의 근육경직을 고려하지 않았다. 재래시장에서 파는 생닭처럼 다리가 곧게 뻗어져 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흥분되지 않는가?
나는 이발소 그림을 싫어한다. 짜증난다. 사계절이 공존하는가 하면 밤과 낮이 공존하기도 한다. 잘못된 것을 보면 화가 나야 한다. 왜 동양화의 소실점에 맞지 않는 비뚤어진 선을 보고 화를 내지 않는가? 인심 좋게 대충 넘어가서야 어찌 과학이 발전하겠나? 동양이 서구에 먹힌 데는 이유가 있다.
찌그러진 것을 가까이 두면 마음도 찌그러진다. 괴목 따위 귀신 나오는 물건을 두면 인생도 괴목처럼 꼬인다. 분재를 한다며 나무의 목을 조른다. 동물을 사랑한다며 TNR을 한다. 물고기를 한뼘 어항에 가두고 새를 비좁은 새장에 가두어 둔다. 답답하지 않은가? 물고기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나?
가두어라
세상에 잘못된게 많다. 굽은 것은 곧게 펴는게 맞다. 인간이 무지한 이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루틴의 문제다. 전두환이 나라를 통째로 털어먹고 있는데도 다들 그런가보다 하고 눈만 꿈벅거리고 있으니 비참하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박정희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글자 배운 사람이 군인한테 모욕을 당하고도 창피한줄 모른다. 슬픈 일이다. 내면에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모순을 보면 흥분해서 달려들어야 한다. 흥분한 사람이 흥분한 상태 속에 머무르려는 것이 명상이다.
머리에 힘 주고 앉아서 명상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반응해야 한다. 인간은 패턴에 반응한다. 패턴을 보면 흥분하고, 흥분하면 집중하고, 집중하면 벗어나지 못하는게 명상이다. 흥분한 사람은 가만 앉아 있을 수 없다. 흥분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계속 걷는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려 멈추지 못한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막혔을 때 인간은 비로소 생각을 시도한다. 촉이 있는 사람은 흥분이 자동으로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냥 우두커니 존재하는게 아니다. 동력전달구조 안에서 맡은 포지션을 장악한다. 존재의 파워트레인 안에서 기어가 물려서 돌아가고 있다.
남산의 바위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지구와 중력으로 연결되어 자기 위치를 지켜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생물은 생태계의 먹이사슬 구조 안에서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인간은 집단의 권력구조 안에서 호흡한다. 수학은 효율과 함수로 기능한다. 존재의 엔진과 파워트레인 안에서 기능한다.
구조의 물림을 잃으면 위치를 잃고 튕겨나가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대칭이 축을 공유하는 구조가 깨져서 더 낮은 단계로 차원이 하락한 것이다. 우리가 엔트로피 감소의 법칙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대칭이 축을 공유하며 외부 에너지를 끌어들여 내부화 시키면 차원이 상승한다.
엔트로피 증가가 외부화라면 엔트로피 감소는 내부화다. 밖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안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바꾸면 차원이 상승한다. 밖에서 데이트를 하고 밥을 얻어먹으면 우연이다. 안에서 매일 데이트를 하고 매일 밥을 얻으먹으면 결혼이다. 외부 우연에서 내부 필연으로 바뀐 것이다.
외부 관계를 내부 구조로, 외부 우연을 내부 필연으로, 외부 아날로그를 내부 디지털로, 외부 수동을 내부 자동으로 바꾼다. 노 두개로 가는 쪽배를 돛 하나로 가는 범선으로 바꾸면 대칭 2의 교착에서 축 1의 타개로 올라선다. 바퀴 두개의 대결을 버리고 엔진 하나의 자유를 얻는다. 생각할 일이다.
묵조선
구조론이 제기하는 관점의 문제는 선종불교에서도 일부 논의되고 있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조동종의 지관타좌 개념이 재미지다. 그냥 앉아 있는게 선이라고 주장한다. 임제종을 따르는 한국불교는 고목선이라 해서 조동종의 묵조선을 반대한다. 파자소암의 화두로 잘 알려져 있다. 노파가 젊은 스님의 깨달음을 시험하다가 실망하여 중을 내쫓고 암자를 불 지른 이야기다. "마른 고목이 차가운 바위에 기대어 있으니, 한겨울에도 따스한 기운이 없구나.
일본 조동종은 지관타좌只管打坐라고 해서 그냥 앉아있는게 수행이라고 주장한다. 깨닫기 ‘위하여’라고 ‘위하여’가 들어가면 현재의 수행하는 나와 미래의 깨달은 나로 쪼개지므로 대칭을 위주로 사고하는 갈라치기 분별지에 해당하는 것이며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조론과 유사한 데가 있다. 물론 일본 사람이 ‘위하여’라는 구조론 용어를 쓰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실천하면 깨달을 수도 있다.
유명 작가의 글을 그대로 베껴쓰기를 하면 문장력이 늘어난다는 신경숙. 미시마 유키오 표절.
좋게 해석해 주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들은 대칭을 부정할 뿐 코어를 보지 못했다. 축의 공유로 올라서지 못했다. 2차원에서 2차원을 부정한다고 3차원 입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은 잘라도 선이고 이어도 선이다. 선은 결코 면으로 도약하지 못한다. 대칭적 사고가 틀렸다는 것은 아는데 그것을 버리고 얻어야 할 차원 개념을 얻지 못했다. 동력의 전달경로를 찾지 못한다.
창발성은 거짓말이다. 무인도에 두 사람을 가두어 놓았는데 10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다. 이번에는 열 명을 가두었더니 어라? 1년 만에 11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것이 창발성이다. 1명은 어디서 발생했지? 자연발생인가? 사실은 10명 중에 여자가 하나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양이 많으면 질로 도약하는 것은 닫힌계에 갇힌 상태에 압박이 걸린 것이며 그게 차원이다.
메뚜기가 평방미터당 25마리가 되면 갑자기 몸이 날씬해지고 날개가 커져서 거대한 메뚜기떼를 이루고 이동을 시작한다. 그냥 메뚜기를 많이 가둬놓는다고 메뚜기가 황충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질의 격발은 더 높은 단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창고에 총을 많이 쌓아놓으면 우연히 총 하나가 격발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총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쩌다 방아쇠가 당겨져서다.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수행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임제선이든 묵조선이든 수행으로 깨달을 수는 없다. 반면 깨달은 사람이 수행한다. 내 손에 총이 쥐어져 있다면 그 총을 쏴볼 것이다. 총이 없는 사람이 용맹정진하여 총을 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수행은 원래 깨달은 사람이 그 총을 쏘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수행은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내재적 관점의 획득이다. 객체 내부의 자체 질서를 찾아야 한다. 간화선은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올라서려는 부질 없는 노력이다. 내가 깨달아야 한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게 나에 대한 집착이다. 그게 자기소개식 사고다. 묵조선은 임제선이 틀렸다는건 아는데 맞는 것은 모른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애초에 깨달아서 태어나야 한다.
어렵지는 않다. 10만 년 전 크로마뇽인으로 태어났다면 깨달을 확률은 전혀 없다. 1만 년 전이라도 마찬가지다. 2500년 전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석가는 2500년 전에 무언가를 봤다. 현대인은 깨달아서 태어날 확률이 높다. 환경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뭔가 있는게 깨달을 확률을 높인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조기교육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인생의 정답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물은 자연히 흐르고, 바람은 자연히 불어가고, 나무는 자연스럽게 자란다. 인간은 '답게 병'에 걸려 있는게 보통이다. 북은 소리가 나야 한다. 그래야 북답다. 개는 집을 지켜야 개답고, 소는 밭을 갈아야 소답다. 남자는 돈을 벌어와야 남자답고 여자는 아기를 낳아야 여자답다. 본래 모습을 찾아서 내가 나다워지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내 안의 잠복한 가능성을 실현하는게 존재의 목적이다. 그럼 게이는? 곤란하다. 게이는 게이다워야 하는가? 피아노는 피아노 파트만 잘하면 되고 바이린은 바이올린 파트만 잘하면 된다? 아니다.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지휘자는 부분의 합 이상을 끌어내야 한다. 내가 맡은 역할을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의 합에 머무르는 생각이다.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합을 중시해야 한다. 패스만 잘하면 되는게 아니고, 골만 넣으면 되는게 아니고, 시합에 이겨야 한다.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시합에 졌다면? 그건 확률 속에 녹아 있다. 게임의 주인은 신이기 때문이다. 결과를 보고 행동해야 하지만,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진짜 결과는 확률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종적인 성공은 문명을 문명답게 완성하는 것이며, 무모순에 도달하는 것이며, 우주를 우주답게 완성하는 것이며, 신을 신답게 완성하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확률로 기여할 뿐이다. 인생에 목적도 없고, 경쟁도 없으며,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고, 잘사는 것도 없고, 못 사는 것도 없으며, 오로지 나다운 삶이 있을 뿐이며 나다움은 천하다움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1. 나는 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2. 나다운 삶은 내 안의 잠복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3. 내 안에는 내가 없고 세상 안에 내가 있다.
4. 세상이 세상다워야 내가 나다울 수 있다.
5. 신이 신다워야 세상이 세상답다.
세상이 세상답지 않으면 내가 나다울 수 없다. 신이 신다워졌을 때 우주는 완성된다. 개인구원은 없다. 집단의 성공에 묻어가는 것이다. 임제선이든 묵조선이든 개인구원에 불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