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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17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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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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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성불하는 도리를 혹은 ‘한 생각’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삼아승기[三祇]’라고 한다면, 결정코 어느 글을 취하여서 후학(後學)에게 밝혀야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
[답] 성불의 뜻은 겁도 아니며, 느리거나 빠름의 가르침은 방편에 속해 있다. |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 밝히기를 “용맹스런 중생에게는 성불이 한 생각에 있다 하고, 게으른 이에게는 과위를 얻음이 삼아승기를 채워야 한다”고 하였으니, 다만 형식으로 가르치는 자취의 말이요 모두가 방편이 될 뿐이다. |
『능엄경초(楞嚴經鈔)』에서 이르기를 “겁(劫)이란 바로 시분(時分)의 뜻이어서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이 있으며, 모두가 중생의 허망한 소견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바다. 이는 또한 허망한 소견이 움직이면 바깥으로 풍륜(風輪)을 느끼고, 욕망이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수륜(水輪)을 느끼며, 굳게 집착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지륜(地輪)을 느끼고, 연구함이 초조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화륜(火輪)을 느끼며, 4대(大)로 말미암아 여섯 감관이 일어나고 여섯 감관이 일어나기 때문에 여섯 경계를 보며 여섯 경계를 보기 때문에 시분이 있다. 만약 무명의 근본이 한 생각의 망심임을 깨달으면 마음으로부터 나는 바의 3계가 마침내 없는 줄을 안다. 또 때는 경계로부터 성립되는데 경계는 오히려 본래 공(空)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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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스스로 체성이 없거니 어떻게 다시 겁의 수가 많고 적음을 논할 필요가 있겠으며, 한 생각으로 무명을 끊기만 하면 무엇 때문에 다시 아승기를 지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
그러므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이르기를 “여환삼마제(如幻三摩提)로 손가락 튀기는 동안에 무학(無學)을 초월한다”고 하셨고, 또 이르기를 “생각 모양[想相]이 티끌이 되고 식정(識情)이 때[垢]가 되나니, 두 가지를 다 함께 멀리 여의면 너의 법눈은 바로 그 때에 청정하여질 터인데 어떻게 위없는 지각(知覺)을 이루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으며,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눈어림인 줄 알아 이내 여의면 방편조차 짓지 아니하며, 눈어림을 여읜 줄 바로 깨달으면 역시 점차(漸次)조차도 없다”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길거나 짧은 겁은 한 생각으로 말미암아서 오고 삼승의 과위에 나아감도 다 같이 꿈속이며, 깨치는 때의 일이 모두 여러 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
그런 까닭에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반나절이 50소겁(小劫)임을 연설하였고, 『유마경(維摩經)』에서는 7일이 1겁임을 연설했다. |
또 『열반경(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백장 광액(廣額)이 날마다 천 마리씩의 양을 죽이다가 나중에 발심하자, 부처님께서 ‘현겁(賢劫) 동안에 부처가 되리라’고 하시자, 여러 큰 보살들과 아라한들이 의심하기를 ‘우리들이 성불하는데도 오랜 겁이 될 터인데 광액이 무슨 까닭에 우리보다 먼저 성불할까’ 하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일찍 이루고자 한 이면 이내 일찍이 이뤄지고 오랜 뒤에 이루고자 한 이면 오랜 뒤에야 이뤄지나니, 만약 참 성품을 단박에 보면 바로 한 생각 동안에 성불하느니라”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영리함과 둔함은 같지 아니하고 더딤과 빠름은 나에게 있나니, 마음이 나면 법이 나고 마음이 소멸하면 법도 소멸함을 증험하여야 한다. |
3계에는 따로의 법이 없고 이 한 마음으로 지을 뿐이니, 온갖 경계는 모두가 동요되는 생각으로 인해서요, 생각이 만약 나지 않으면 경계도 본래 체성이 없다. 도리어 동요된 생각을 궁구하면 생각 또한 비고 고요하며, 이내 미혹될 때에도 잃음이 없고 깨칠 때에도 얻음이 없음을 알 것이니, 머무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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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참 마음은 더하거나 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부루나(富樓那)야, 그대 어찌 듣지 않았느냐. 실라벌성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새벽에 갑자기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 있는 미목(眉目)은 얌전한데 자기의 머리에는 얼굴도 눈도 볼 수 없자 도깨비가 되었다고 성을 내며 미쳐서 달아났다 하니,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무슨 일로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
부루나가 말하였다. |
‘그 사람은 마음이 미친 탓이오며 다른 까닭은 없나이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묘각(妙覺)이 밝고 뚜렷하여 본래 원만하고 명묘하거늘 이미 허망이라 일컫는데 무슨 원인이 있겠느냐. 만약 원인이 있다면 어찌 허망이라 하겠느냐. 스스로의 모든 망상이 차츰차츰 서로 원인이 되고 미혹으로부터 미혹을 쌓아 티끌 수만큼의 많은 겁을 지냈으므로, 비록 부처가 밝힌다 하더라도 오히려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
이렇게 미혹된 원인은 미혹으로 인하여 스스로 있는 것이니, 미혹이 원인 없음을 알면 허망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오히려 나는 것도 없거늘 무엇을 없애려 하겠느냐. 보리를 얻은 이는 꿈깬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는 분명하지만 무슨 인연으로 꿈 속 물건을 취할 수 있겠느냐. 하물며 원인이 없어서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니, 마치 성중의 연야달다가 어찌 인연이 있어서 제 머리가 무섭다고 달아났겠느냐. 광증이 홀연히 없어지면 머리가 딴 데서 온 것이 아니며, 비록 광증이 쉬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잃어버렸겠느냐. |
부루나야, 허망의 성품은 이런 것이니, 원인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다만 세간과 업과(業果)와 중생의 세 가지가 계속됨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으면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이 생기지 아니하여 너의 마음 속에 있는 연야달다의 미친 성질이 스스로 쉬게 될 것이며, 쉬기만 하면 이내 보리의 훌륭하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한지라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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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얻을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그렇게 애써서 닦아 증득하려 하겠느냐.’” |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머리를 얻었거나 잃음이 없다 함에서의 머리는 참 성품에 비유하여 무명으로 미혹되었을 때에도 성품을 잃지 아니하고 무명이 쉬었을 적에도 따로 얻는 것이 아니다. 쉬기만 하면 이내 보리라 함은 본 체성을 깨치기만 하면 다섯 가지 현량식(現量識)과 온갖 만행(萬行)이 모두 다 완전히 갖추어져서 바로 그것이 보리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
『열반경』에서 이르기를 “온갖 중생들은 본래 성불하였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였다”고 함과 같다. |
또 단박[頓]에 쫓고 점차[漸]로 얻은 것을 다 같이 알맞는 방편이라고 한다. |
옛 해석에서 이르기를 “갑자기 단박을 말하여도 역시 이는 방편이요 점차와 단박이 다 옳다 하여도 부처를 헐뜯는 것이고 다 옳지 않다 하여도 역시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본각의 체성 위에서는 단박이거나 점차를 떠났고 언설조차 여의었거늘, 어디에 단박과 점차라는 이름이 있겠는가. 제6식이 움직이면 분별이 있고 움직이지 않으면 곧 평등하여 법계에 두루하다. 다섯 가지 현량식 등의 낱낱 감관도 모두가 법계에 두루한지라 눈으로 빛깔을 보는 때에 빛깔도 얻을 수 없어서 원래가 법계와 평등하다. |
『법화경』에서 이르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양이 언제나 머무른다”고 했다. 바로 세간의 온갖 모양이 본래부터 항상 머무르고 있는 줄 알 것이다. |
어느 행의 지위에서 알 수 있느냐 하면, 부처님만이 도량에서 아신 뒤에 길잡이로서 방편으로 말씀하셨고 중생이 미혹하여 모르기 때문에 말씀하게 되시나, 만약 안다면 다시 설명을 기다릴 것이 없다. 설명이 있으면 모두가 방편에 속한 줄 알 것이다. |
[문] 곧 제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 이도 도리어 다른 부처를 세우는 것인가. 만약 결정코 세우지 않는다면 모든 부처님의 위신으로 이룩한 바와 가피로 보호하여 생각하시는 것 등이 없으리니, 이내 단견(斷見)을 이루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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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제 마음 성품이 온갖 처소에 두루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만약 딴 부처님을 뵈어도 그대로가 자기의 부처여서 자기와 남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이 한 마음뿐이므로 중생은 마치 형상 위의 모형과 같아서 만약 모형이 제거되면 벌써 자기의 부처를 볼 것이요 딴 부처님도 보게 되리라. 왜냐 하면 딴 부처님을 본다 하더라도 그대로가 자기의 부처이기 때문이다. |
자신이 부어 만들어 냈기 때문에 역시 딴 부처님도 무너뜨리지 아니하며, 그 본바탕 위에서는 딴 부처의 형상을 화하여 일으켰다 하더라도 바로 저 모양의 부분이다. 변하고 변하지 않음은 모두가 이 한 마음이다. |
그런 까닭에 중생의 미혹과 깨침인 두 마음으로 인하여 보거나 보지 않음과 자기와 남의 도리가 있다. 만약 참 성품에서 보면 미혹과 깨침이 어찌 따르겠는가. 자기와 남이 다 함께 없어지고 법신은 형상도 없고 자기와 남이 서로 보는 모양조차 없다. |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미혹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마음 밖의 경계를 취하여 생각을 내어 도리를 어기기 때문에 모양이 없는 부처를 볼 수 없으며, 둘째는 안의 쌓임[蘊]의 모양을 취하여 성품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부처를 보지 못한다. 깨침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온갖 법이 바로 마음 제 성품이요 성품 또한 성품이 아니며 망정이 부셔져서 진리가 나타남을 분명히 알면, 노사나의 몸을 보고 법 성품에 일치하여 안팎에 없다. 둘째는 쌓임의 성품과 모양을 분명히 알면, 제 마음의 부처와 노사나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음을 본다. 마치 하늘 제석이 하늘의 업을 닦지 않았다면 궁전이 어찌하여 몸을 따르겠으며, 전륜왕이 왕의 원인을 짓지 않았다면 칠보가 모일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자신의 선행에 의거하여서만 밖으로 훌륭한 인연을 느낀다”고 하였다. |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불자여, 온갖 여래는 동일한 체성이요 큰 지혜 바퀴 속에서 갖가지 지혜 광명을 내느니라. 불자여, 그대들은 여래가 한 해탈의 맛에서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갖가지 공덕을 내는 줄 알지니라. 중생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바로 여래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바다’ 하면, 불자여, 이것은 여래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바가 아니니라. |
불자여, 내지 한 보살이 부처님 처소에서 일찍이 선근을 심지 않았다면 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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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의 조그마한 지혜라도 얻는다는 이치는 있을 수 없느니라. 다만 모든 부처님의 거룩한 덕의 힘 때문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공덕만을 보게 하나, 부처님 여래는 분별도 없고 이름도 없고 무너뜨림도 업고 짓는 이도 없으며 짓는 법도 없느니라. 불자여, 이것이 여래ㆍ응정등각의 출현의 모양이니라”고 했다. |
『보장론(寶藏論)』에서 이르기를 “참된 하나[眞一]는 하나조차 없으면서 같지 않음이 나타나며, 혹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나타나고 승가를 생각하면 승가가 나타나기도 하나 그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니고 부처님이 아님도 아니면서 부처님이 나타나며, 내지 승가가 아니고 승가가 아님도 아니면서 승가가 나타난다. 왜냐 하면 그의 망상으로 희망하여 나타났기 때문이니, 제 마음에서 나타난 성스런 일의 연기를 깨닫지 못하고 한결같이 바깥의 경계로 삼으면서 차별이 있으나 실은 불ㆍ법ㆍ승이 다름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큰 대장간에서 스스로가 모형을 모나고 둥근 것이 저절로 일치하게 만들어놓고 그 녹인 금이 자기의 모형에 흘러들기를 원하여 형상이 되게 한다. 그러면 녹인 금으로 형상이 이루어졌기는 하나 그 실제의 녹은 금은 형상이 아니고 형상 아님도 아니면서 형상을 나타낸 것처럼 그 사람이 부처를 생각하는 것 또한 그와 같다. |
큰 대장간의 금은 여래의 법신에 비유하고, 모형은 중생의 희망에 비유한다. 생각이 녹아서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생각과 부처가 화합한 연(緣)으로 갖가지 몸 모양이 생기게 한다. 그러나 그 법신은 모양도 아니고 모양 아님도 아니다. 왜 모양이 아니냐 하면 본래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왜 모양이 아님도 아니냐 하면 연기의 모든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법신은 나타난 것도 아니고 나타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성품도 아니고 성품 아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고 뜻도 아니어서 온갖 것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 |
다만 그 범부는 마음만을 따르면서 있으므로 곧 부처의 생각을 내나 한결같이 그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 하면서 자기 마음이 화합하여 있음을 모르는 것이요, 혹은 한결같이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다고 하여 바로 정법을 비방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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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 했다. |
해석하여 보자. 왜 모양이 아니라 하는가. 본래 일정한 모양이 없어서라 함은, 마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바라 바깥 모양은 체성이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느껴나는 바라 인연이 다하면 이내 소멸되거늘 무슨 모양이 있겠는가. 때문에 ‘본래 일정한 모양이 없다’고 한다. |
왜 모양이 아님도 아닌가. 연기의 모든 모양이기 때문이라 함은, 이미 일정함이 없다 하면 인연을 따라서만 나타나는 것이어서 인연이 화합하면 허환한 모양이나마 없지 아니하다. 때문에 ‘연기의 모든 모양’이라 한다. |
만약 분별을 내지 아니하고 자기와 남을 고집하지 아니하며 안으로는 있음에 집착하면서 모든 쌓임[蘊]을 취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없음에 집착하면서 정법을 비방하지 아니하면, 눈을 뜨고 눈을 감거나 발을 들고 발을 내리거나 간에 보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이 아님도 아니로되 참으로 부처를 보는 것이다. |
『보성론(寶性論)』에서 이르기를 “부처라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란 볼 수 있는 법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안식(眼識)으로서는 볼 수가 없다. 법이라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법이란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식(耳識)으로서는 들을 바가 아니다. 승가라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승가란 ‘무위(無爲)를 이름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으로 공양하고 예배하고 찬탄할 수가 없다”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3보(寶)는 마치 허공의 모양과 같아서 듣고 보는 것으로 미칠 바가 아니며, 곧 중생의 마음 부처가 부처 마음의 중생을 헤아린다. |
만약 하나의 법이라도 다스릴 것이 있으면 모두가 삿된 소견을 이룬다. 그러므로 육조(六祖)가 이르기를 “삿됨이 오면 바름으로 제도하고 미혹이 오면 깨침으로 제도하며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제도하고 나쁨이 오면 착함으로 제도한다. 이렇게 제도하면 바로 참되게 제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
[문] 이미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고 부처는 바로 마음이라 본다면, 어떻게 교(敎) 중에서 변화한 부처님이 와서 영접하고 모든 깨끗한 국토에 난다고 설명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