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압류에 동원된 ‘로봇 집달리’에 들끓는 미국 채무자들
ⓒReuter=Newsis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는 미국 채무자.
2000년대 부동산 호황기에 대출로 집을 샀던 미국인들이 최근 무더기로 주택을 압류당하고 있다. 부동산 대출금 상환이 3개월 정도 밀리기는 했으나, 아직 법원에서 주택 압류가 결정된 바 없고, 채무 상환 조정을 하려 했지만 채권자가 누구인지 파악이 안 되는 희한한 일을 겪기도 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많다.
그래서 분노한 시민들이 금융기관에 집단소송을 내는 과정에서 지난 9월 미국 최대 금융기관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GMAC (GM의 금융 자회사) 등이 채권서류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주택 압류를 강압적으로 자행하고 있다는 엄청난 불법행위가 드러났다.
플로리다 주에서 3000여 피압류자의 소송을 대행하고 있는 티크틴 변호사가 확보한 증언들에 따르면, 이들 금융기관의 압류 담당 직원들은 주택 소유자를 만나보거나 자산에 대한 실사도 하지 않았다. 증빙서류를 검토하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서명'만 하다 보니 한 주 동안 6000장에 서명했다는 직원도 나타났다. 더욱 가관이었던 사실은 이들 금융기관이 고용한 압류담당 직원들은 금융관련 지식이나 법률지식이 전무한 전직 헤어스타일리스트, 대형마트 판매직원 등이었으며, 회사는 이들에게 기본적인 교육·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압류 현장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금융기관들은 증빙서류도 검토하지 않고 남의 사유재산을 불법 침탈해온 것이다. 압류 증빙서류에 기계적으로 서명만 한다는 의미에서 '로봇 서명자(Robo-signer)'로 불리고 있는 이들은 피도 눈물도 없을 수밖에 없는 로봇 집달리였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로보캅인 셈이다. 티크틴 변호사는 미국의 유력 인터넷 뉴스 사이트 < 허핑턴 포스트 >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주택 소유자들을 속이기 위한 금융산업 차원의 음모다"라고 말했다.
사태가 이렇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BoA 등 대형 금융기관들은 지난 9월 말 잠정적으로 압류 중단을 선언했지만, 이후에도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10월8일, 브라이언 모너헌 사장이 '서류 재검토'를 선언했던 BoA는 불과 10일 만에(10월18일) '(수십만 건을) 검토해본 결과 크게 잘못된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주택 압류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Reuter=Newsis 10월18일 '아무 문제 없다'며 주택 압류를 재개한 oA CEO 브라이언 모이니헌.
이에 대해 여론은 '그 짧은 시일 내에 검토를 다 끝냈단 말이냐'며 비웃고 있지만,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이 사태를 '서류 작성의 하자에 따른 해프닝' 정도로 몰고 가려는 분위기며, 대형 언론들 역시 이에 공조를 취하고 있다. 당사자인 금융기관이야 그렇다 쳐도 대형 언론들이 그에 동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BoA 등 대형금융기관이 이런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대형 언론들이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채무자들이 소수의 피해자로서 대를 위해 희생해달라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번 사태를 만들어낸 원인이기도 한 미국 금융업계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금융공학의 마술이기도 하다.
채무불이행은 이제 채권자와 채무자간의 문제가 아니라 채권자에게 '정상화'를 압박하고 있는 투자자들이 채권자를 대리해 치르는 대리전이 돼버렸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이번 사태가 미국의 금융산업을 송두리째 파괴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염려가 나오고 있는 이유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른바 '금융 혁신' 이후 '누가 채권-채무 관계의 당사자인지'가 모호해져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주택 대출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행위다.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은 해당 주택에 대한 법적 권리(부동산대출 채권 혹은 모기지)를 만기까지 가지고, 주택 소유자가 상환에 실패하면 그 주택을 압류하면 되는 간단한 구조다.
그런데 금융 혁신을 거치며 미국의 대출기관들은 대출채권(주택에 대한 법적 권리)을 만기까지 가지고 있기보다는 다른 대형 금융기관에 파는 편을 택했고, 이 때문에 앞서 간단한 관계가 매우 복잡해져버렸다. 이는 '채무자로부터 돈(원금과 이자) 받을 권리'를 넘긴다는 것, 일종의 구상권을 매각한 것과 같은 말이다.
그것도 1회에 그치지 않고 수차에 걸쳐 매각에 매각을 거듭해갔다. 대형 금융기관은 매입한 부동산 대출 채권(모기지)을 수천 개씩 묶고 자르고 섞은 뒤, 이를 담보로 다시 증권을 발행해서 투자자에게 팔았다. 이른바 주택담보부증권(MBS)이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MBS를 묶어 부채담보부증권(CDO)을 만들기도 하고, CDO끼리 묶어 다른 이상한 담보부증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대출채권이 거래되고 묶이고 쪼개지고 하다 보니, '채무자로부터 돈 받을 권리'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모호해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채무자에게 직접 돈을 빌려준 대출기관인가, 아니면 '돈 받을 권리'(대출채권)를 산 대형 금융기관인가? 혹은 이 대출채권들을 담보로 발행한 MBS나 CDO를 매입한 투자자들인가? 채무자는 하나인데, 그에게 의지해야 하는 채권자는 피드미드처럼 늘어나 버린 것이다.
물론 금융기관들에게는 나름의 대책이 있었다. 주택대출 채권을 자신들끼리 간편하게 사고팔기 위해 MERS(주택대출 전자등록 시스템)라는 회사를 공동 설립했고, BoA·JP모건체이스·AIG 등 미국 최대 금융기관들이 참여했다. 이 MERS의 구실은 단적으로 말하면 회원 금융사들의 '대리인'이다. 회원사들이 부동산 대출채권을 거래하는 경우, 판매자와 구매자의 법적 역할을 대리한다. 어떻게 보면 채권 거래 때마다 일시적으로 소유권자 노릇을 하는, '가상 소유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주택 압류 사태의 경우 채권 소유권자만이 압류 권리를 가지는 미국 법체계에 반한다는 것이다. MERS의 소유권이 '가상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애덤 레비틴 조지타운 대학 교수는 "MERS는 (대출채권의) 소유권자도, 대리인도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주택 피압류자들을 대행하는 변호사들은 '전자등록업체'인 MERS가 어떻게 소유권자를 자처하며 채무자들을 집에서 거리로 내몰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다. 이들은 MERS에 압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할 계획이다. 지난 10월 초 오리건 주 지방법원은 MERS가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BoA의 압류에 금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가상 소유자가 너무 많고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힘이 법리를 재해석 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부동산 대출채권의 60%가 MERS에 등록되어 있다. 피압류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 미국 대형 금융기관의 파산과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파생금융상품 부문의 대혼란, 이에 따른 금융위기 재발 따위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먼저 그동안 주택을 압류당한 사람들이 은행에 소송을 걸 수 있다. 금융기관들이 압류를 못하게 되면, 주택 대출채권에서 파생된 수많은 MBS와 CDO 등이 쓰레기가 되는 셈이니 이를 매입한 투자자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동안 금융기관들이 MERS를 통해 주택 대출채권의 소유권을 옮기면서 이와 관련된 수수료나 세금을 주 정부에 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법적 책임을 묻게 되면 수수료와 벌금이 모두 수백억 달러에 달해 대형 금융기관들을 모두 파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미국 경제 회복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뭉개버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파장이 예상될 뿐 아니라 이를 초래한 금융기관들의 행태가 너무 몰상식한 탓에 미국의 일부 여론은 이번 사태를 워터게이트 사건에 빗대면서 '모기지 게이트(mortgage gate)'로 명명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고 있는 미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논리와 다수의 논리가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논리의 다툼이 어떤 결론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이번 모기지 게이트를 초래한 금융공학의 원죄는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좀 어렵긴 하지만 老子의 道德經 제79장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화대원 필유여원 안가이위선)
큰 원한은 풀려고 해도 원망이 남게 마련이니, 편안하려면 위선만이 가능하다.
是以 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시이성인집좌계 이불책어인)
그러하므로 성인은 빚 문서만 쥐고 있을 뿐 이로써 사람(빚쟁이)을 독촉하지 않는다.
故有德司契 無德司徹(고유덕사계 무덕사철)
그러므로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받게 되고, 덕이 없는 사람은 억지로 받아낸다.(徹 뚫을 철)
天道無親 常與善人(천도무친 상여선인)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고, 언제나 선한 사람과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