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블롬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1. 미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블롬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을 십여 년 전 서점에서 고른 것은 제목이 주는 묘한 끌림때문이었다. ‘지혜’에 대한 탐색은 오래전부터 내가 추구하던 하나의 과제였다. ‘지혜’는 유대교를 비롯한 일신교에서 주로 다루던 주제 중 하나였다. 결국 ‘신’으로 집결되는 종교적 ‘지혜’와는 달리 문학에서는 어떤 지혜를 제시할 수 있는가 궁금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쉽지 않았다. 문장이 대단히 현학적이었고 각각의 문학작품이나 철학작품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될 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오늘 완독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 속에 있다. ‘지혜’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모호했고 그가 말하는 언어의 현란함을 따라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 중에서도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구절 몇 군데를 인용하면서 정리한다.
2. 블롬은 그리스의 호메로스와 플라톤을 비교하면서 시와 철학의 경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될 수는 없지만 철학과의 고대의 논쟁에서 시인들을 따를 수 있다. 철학은 삶의 방식이지만 그것에 대한 연구는 죽음이다. 시가 삶의 방식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그러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너무 호메로스적이다. 죽음의 문 앞에서 나는 홀로 시를 암송했었지 변증법을 논할 대화자를 찾지는 않았다.” 저자가 세르반데스의 <돈키호데>에서 찾은 지혜는 다음과 같다. “기사와 산초는 자신들의 모험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언쟁을 했건 아니면 영감을 교환했던 간에, 그들 사이의 훌륭한 대화를 통해 자신이 누군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3. 저자의 가장 큰 존경의 대상은 누구보다도 세익스피어이다. 블롬은 세익스피어는 선과 악의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왜 우리들 자신의 자유를 유지할 수 없는가’에 대해 더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며 “호메로스와 세익스피어 둘 모두의 작품에서 폭력의 근원을 꿰뚫어 봄으로써 폭력을 치유할 수는 없으나 투쟁을 개인적으로 거부하도록 하거나 그로부터 물러서게 만들 수는 있다.”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멕베스>와 <리어왕>에 대한 평가는 세익스피어의 또 다른 지혜이다. “멕베스가 자신의 독백을 들으면서 자신의 살의가 증가하는 것을 확신하지만, 리어왕은 당황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이것이 세익스피어 지혜의 중요한 점이다. 멕베스는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으나 정신적인 권위는 없는 반면에, 리어왕은 잃어버린긴 했지만 당당한 권위의 표상으로서 격노하는 무력한 신으로 변신한 인자하고 위엄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4. 새뮤얼 존슨과 괴테를 비교하는 저자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괴테는 본능적 이교도로서 자신의 신들린 재능을 믿고 니체가 그처럼 절실히 추구했던 ‘즐거운 지혜’를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표명했다. 존슨식 지혜는 구약성서의 <전도서>처럼 침울하고 신랄하다.” 저자는 존슨의 작품을 많이 인용한다. 그중에서 ‘상상력의 위험한 지배’를 다룬 내용을 옮겨본다. “환상의 지배가 점점 도를 더해가면 마음은 처음에는 오만해지고 시간이 지나면 횡포해집니다. 그러다가 가상이 현실이 되고 거짓의견이 마음을 묶어 황혼과 고뇌의 꿈 속에 인생이 지나갑니다. 전하, 이것이 고독이 위험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괴테에 대한 중요한 키어드는 ‘단념’이다. 명확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진의를 이해해본다. “예술을 기독교로부터 해방시키고 싶었던 괴테에게는 성서보다는 호메로스와 그리스인들의 표본이 더 큰 의미를 가졌다. 욕망의 시는 괴테에 있어서 자연을 예술의 행복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다. (.....) 낭만주의와 이에 대한 기독교적 반응은 괴테의 대안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단념의 시였다.”
5. 에머슨과 니체를 비교하는 장에서는 냉소적이면서 날카로운 에머슨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미국인의 정서를 지배하는 에머슨의 영향력을 강조하면서도 에머슨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인간은 폐허 속의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산을 축소한 모습이다.’ 이런 에머슨주의의 공식들은 정신적으로 햄릿을 닮았고 햄릿만큼 자기파괴적일 수도 있다.” 니체에게서 발견한 지혜는 ‘예술’에 대한 중요성이다. “‘우리는 진실로 인해 멸망하지 않기 위해 예술을 소유한다.’, 단 하나의 경구로 니체의 심미적 견해를 정리할 수 있다면 이 말일 것이다. 시는 거짓을 말하지만 진실은 현실 원칙이 되어 죽음으로, 바로 우리의 죽음으로 이끈다. 진실을 사랑하는 것은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다.”
6. 프로이트와 프루스트를 비교하는 장에서 이해의 혼란은 가중된다. 엄청나게 많은 프루스트 작품의 인용은 작품의 난해함 속에서 이해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궁극적으로 죽음의 공포인 프로이트의 거세 콤플렉스는 프루스트가 질투의 복잡한 은유로 묘사하는 것과 같은 그늘진 욕망의 은유다. 질투하는 연인은 자신이 거세된 것, 인생의 자리를 빼앗긴 것, 자신을 위한 시간이 끝난 것을 두려워한다. 그가 오직 의지하는 것은 환상과 그 비슷한 경험의 심미적 회복이 과거에 이미 그랬던 것처럼 높은 차원의 방식으로 다시 자신을 현혹할 것이라는 가망없는 희망을 가지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다.”
7. 해럴드 블롬이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시도한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서 지혜는 무엇인가? 저자는 글을 읽는 목적을 ‘미학적 훌륭함, 지적 능력, 지혜’를 얻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의 글은 오랫동안 인문학과 문학을 관통하는 전통적인 학자들의 견해가 담겨있다. 묵직하고 신중하면서도 현란한 그의 글은 일종의 경이로 다가오기도 한다. 난해한 철학책이 주었던 개념적 어려움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의 글은 읽기 쉽지 않다. 그것은 각각의 작품을 오랫동안 보고 이해하면서 축적된 자신과 학계의 일종의 해독코드가 작동하고 있다. 하나의 개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작품의 인용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깊이는 작품들의 상호이해와 깊은 숙독과 사색의 결과를 통해 생성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지혜의 초보자에게는 적당치 않다는 점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작품을 충분히 읽고 자신만의 잠정적 결론을 내려본 사람들만이 저자와 대화할 수 있고 저자의 견해에 대해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전제가 배제된 독서는 다만 문학의 위대함만을 강요받는 시간일 뿐이다.
첫댓글 - 지식을 뛰어넘는 지혜야 말로 성찰 그 자체일 듯하다.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낸다는 말이니, 안목이 있는 사람만이 찾아낼 것이다. 예로부터 현자는 있어왔으니 현자를 찾는 것이 가장 현명할지도....... 어쩌면 공동체의 집합지성이 오늘날의 지혜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