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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령선인(不逞鮮人)의 책원지였던 장암동
올해는 간도대학살 (간도참변, 경신참변, 경신토벌)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전 오늘 훈춘, 연길, 화룡, 왕청의 연변에서는 일본군에 의해서 1단계의 불령선인¹ 대학살과 불령선인과 관련된 가옥, 학교, 교회에 대한 방화가 11월 20일로 끝나고 제2단계의 경신대학살이 진행되었다. 2단계는 ‘잔당숙청’이라는 명목으로 마을과 인근 산림에 대한 반복적인 수색과 비행대 및 국경수비대를 동원한 무력시위가 있었다.
당시 연변 4개현에 살고 있는 조선인의 수는 279,150명²이었고 당시 불령선인 명목으로 살해당한 수는 4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는 연변 조선인 69명 중에 1명꼴로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요, 연변 4개현 전체가 초상집이 되었으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는 말이다.
심극추는 ❰나의 회고❱에서 그 때의 정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을에 독립군이 돌연적으로 자취를 감추고 겨울부터 일본군기병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늘 말하는 ❰경신년토 벌❱ 이다. 공포의 소식이 도처에서 마을에 날 아 들었다. 외놈들이 어느 고장에서 많은 청년들을 생매장했고 어느 촌은 불을 질러 평지 가 되고 어디에서 짧은 머리 청년을 모두 독립군으로 인정하고 머리를 짤랐다는 등 소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름끼치게 하였다. ~ 중략 ~ 그해 겨울에 온 마을사람들은 한 번도 제대 로 푹 자본 적이 없다. 모두 옷을 입고 신을 신고 누워있다가도 밤중에라도 왜놈들이 불을 지른다면 문을 차고 밖으로 나와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이다.³
그러나 세월은 이런 뼈아픈 사건도 시간의 무덤 속에 묻어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 과거의 역사로 치부하며 망각하게 만든다.
특별히 올해는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불안과 파산의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져서 역사를 반추하며 기념하는 것이 진부하고 생경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역사의 희생양이 되신 4,000여 영령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가족들을 생각하며 추모의 시간을 가져본다.
간도대학살은 일본군이 1920년 10월 초부터 1921년 5월 9일까지 만 7개월 동안 연변의 조선인들에게 저지른 악마적인 만행이다.
1단계는 10월 14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진행되었으며 항일무장독립단체들과 배후기지로 지목되는 부락과 학교, 교회들을 초토화시켰다.
2단계는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 19사단 주력부대의 철거까지로 초토화 된 부락들을 반복적으로 수색하며 부락들이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재기할 수 없도록 완전 파괴를 시도하였다.
3단계는 12월 17일에서 1921년 5월 9일 일본군의 완전 철수까지로 간도파견대를 기반으로 해서 경찰분서 증설과 총독부 경찰인력 증가, 친일세력 조직과 형성을 통하여 간도 조선인사회의 감시와 분열을 획책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경신대학살은 10월 중순부터 11월 하순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간도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는 무장독립운동단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북간도지역 조선인사회를 초토화시켜 독립운동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 위하여 10월 26일 청산리전투가 끝난 날에❰불령선인❱들의 배후가 되는❰배일조선인부락조사표❱와 ❰배일학교조사표❱를 작성하였다.
조사표에 의하면 연길현에는 이도구 어랑촌, 이도구시장 및 수남촌, 장인강 보이동, 세린하 회막동 부근, 유수하, 묘구일대, 차조구, 동불사 북구 등 21개 부락과 돈향학교, 영신학교, 흥동학교, 배영학교, 진동학교, 명신학교, 보진학교 등 17개 학교가 불령선인과 관련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화룡현에는 상하광포, 류동, 청산리, 청파호, 리수구, 장재촌 등 11개 부락과 명동예수학교, 사립명동녀학교, 창동학교, 정동학교, 화성학교 등 19개 학교가 조사되었다.
왕청현에서는 소황구, 유수하, 대감자, 흑웅동 등 11개 부락과 5개 학교가 조사되었다.
훈춘현의 조사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중화민국당안에 나오는 ❰보고서❱에 의하면 서대묘, 대육도구, 탑자구, 마적달, 황구, 채원자, 사도구, 분수령왕가유방, 사도구 간하자 등 27개 부락이 소탕을 당했으며⁴ 학교는 숭신학교, 진명학교, 북일학교, 남별리학교를 비롯하여 학교 19개가 방화되었고 교회당 7개가 불에 탔다.⁵
일반적으로 알려진 피해는 임시정부 파견원의 통계에 의한 것으로 1920년 10월과 11월에 훈춘, 화룡, 연길, 왕청 4개현에서 3,664명이 학살되었고 155명이 체포되었으며 가옥이 1,094동, 학교 59개, 교회당이 19개가 불에 탔고 곡물이 15,580섬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이는 확정된 수치가 아니다. 장차에 이념과 종교, 나라와 민족을 떠나서 공동으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되면 달라져야 하는 수치이다.
그러므로 간도대학살을 공부하다보면 일본 정규군인들이 중국 땅에 들어와서 조선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며 양식과 집을 불태우고 학교와 교회를 파괴를 자행한 악마적인 폭력에 분노하며 일본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00년 전에 일어난 대학살 속에서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천여 명에 이르는 여인들의 곡성을 들으면서 망국 백성의 설움에 하염없이 울지 않을 수 없다.
하루아침에 행복한 가정을 잃은 수많은 아이들의 공포와 정신적 충격, 배고픔과 추위의 고통을 느끼며 일본의 아이들에게 그런 재앙이 임하여 저주와 고통을 당하게 되길 빈다.
천여 채의 불탄 집터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노인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독립된 조국에서 혜택을 누리고 살며 단 한 번도 그분들에게 집중하지 못했던 사실이 죄송스러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희생당한 분들이 품었던 독립과 광복에의 꿈이 일본군의 총칼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울게 된다. 빼앗긴 나라를 찾아주시라고 하나님께 무시로 아뢰며 희망에 부풀었던 교우들의 눈물의 기도와 화산처럼 뜨거웠던 열망이 응답이 되지 않고 좌절당했을 때 그분들이 겪었을 아픔과 분노, 통한이 화살이 되어 나를 찌른다.
대학살이 일어난 모든 마을 주민들의 독립을 위한 희생이 영혼을 전율하게 만든다. 아들을 독립군으로 바치고, 독립의연금을 내고, 마을에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 지부를 설치하고, 밤낮으로 독립을 위해 기도한 그분들은 독립되지 않은 세상에서 독립을 앞서 살았다. 국민회 지회가 있었던 마을들 대부분이 독립에의 열망으로 화산처럼 불타올랐고 대학살, 대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마을의 선봉에 불령선인의 책원지인 장암동이 있었다.
장암동은 과거에는 연길현 용지사에 속하였지만 현재는 용정시 동성용진 동명촌으로 용정으로부터 동남쪽으로 6키로 미터 떨어져 있는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두만강변의 개산툰으로 부터는 서북쪽으로 8키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1909년부터 조선간민에 의하여 개간이 되었으며 골짜기에 노루가 많아서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렸으며⁷ ❰간장암❱이라고도 한다. 1911년 독립운동가 강백규의 전도로 김영섭, 김동희 등 10여명이 잇달아 입교함으로써 ❰간장암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김영순목사의 순회와 지도로 교회가 부흥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현기윤을 장로를 선임하여 교회 업무를 관리하였다.⁸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크리스천이었으며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국민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강백규의 영향으로 뚜렷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을에는 주민들이 간민교육회 활동기간에 세운 영신학교 (흥동학교⁹ 또는 장암학교¹⁰라고도 기록됨)가 있었다. 교사들은 모두 크리스천이었으며 투철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으로 무장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2월 중순에 국자가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위한 비밀회의에 참석하였고 ❰3.13 ❱용정 만세시위 때 학생들과 주민들을 선동하여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시위가 끝난 뒤 ❰독립운동 의사부❱지도자 한 사람이 장암촌에 밤길에 달려와서 독립선언 축하회 상황보고 및 이후 연락망과 행동방침에 대하여 회의를 열었으며 6월에 영신학교 교내에서 엄주철 외 여러 명이 일본영사관의 밀정으로 보이는 자 3명을 처단하였다.¹¹
1919년 6월에 주민들은 장암촌에 국민회 동부지방회 제4지부를 설치하여 지회장에 한국용, 경호구장 겸 서기에 엄주철, 경호원에 남동빈, 이병순, 외 5~6명, 통신부장에 김자용, 통신원에 남춘세 외 4인, 외교원에 박사문, 재무원에 한동헌, 서기에 이병욱을 세웠고 사무실을 지회장 집에 두었으며 촌민 대다수가 지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1920년 2월에 경호구장 엄주철은 동부지방회장 양도헌으로부터 다수의 권총을 지원받아서 경호대 부하들에게 보급하였다. 4월 화전사에서 국민회 경호대회가 열렸을 때 경호부장 엄주철 이하 회원들이 참여하였으며, 최명록 도독부의 독립군들이 온성을 습격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의군부와도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영신학교 내에 조직된 대한학생광복단은 촌민들로 하여금 독립의연금을 내도록 격려하였으며 6월에는 지회 경호원 이병순, 남동빈 두 사람이 지방회장의 명령을 수행하여 나자구에 가서 많은 무기를 운반해 동부지방회장인 양도헌에게 전달하고 귀환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장암촌을 ❰불령선인의 책원지❱하나로 간주하고 대학살을 시도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한밤중 0시 30분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15연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에게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으로 향하였다. 4시 경에 남양평 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 30분 즈음에 장암동을 포위하였으며 총소리와 고함으로 새벽의 고요를 깨고 주민들을 강제하여 교회마당에 집결시켰다. 그 중 청장년 36명¹² 을 독립군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포박하여 교회당 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순식간에 화염으로 충천하였으며 일본군은 비명을 지르며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가족들은 울부짖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젊은이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불에 타죽어 가는 고통스러운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다.
국민회 동부지방총회 회장이었던 양도헌, 국민회 간부 최설, 이동빈도 같은 날에 일본군에게 피살당하였다.
당시 용정 제창병원의 원장이었던 S. H. 마틴선교사는 31일에 장암동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
일본은 중국의 매우 강한 저항에 귀를 기울임이 없이, 가능하다면 모든 기독교 신도 특히 모든 청년들을 소멸하려는 기획으로 이 지방에 15,000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촌락은 연 이어서 매일 조직적으로 소각되었고 청년들은 사살되었다. ~ 중략 ~
우리들은 10월 31일(일요일) 날이 막 밝을 무렵, 함께 북경마차를 타고 용정촌을 출발하 여 용정촌에서 12리 떨어진 작은 계곡의 곡저(谷底)에 위치한 장암동으로 향했다. 그날은 천장절이었기 때문에 가는 도중 일본 병졸이나 경관 등에게 성가신 (수색을) 당하는 일 없 이 마치 사냥놀이를 보러 외출하러 가는듯한 심정이었다. ~ 중략 ~
10월 30일에 해당 마을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항들을 다수 목격자들의 견문대로 기술하고 자 한다.
날이 밝은 무렵 무장한 일본 보병의 일대가 기독교 마을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짜기 안 쪽 방향에 있는 볏단을 쌓아놓은 곳에 방화하고 촌민 일동에게 집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 였다. ~ 중략 ~ 어머니도, 아내도, 자녀들도 마을 내 성년 남자 모두가 강제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가옥은 전부 불타버리고 그 일대가 연기로 뒤덮여 당시(當市) 용정촌에서 도 그 불길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일본 병사는 이렇게 한 후 이 지역을 떠났다. (일본 병사들은) 곡지(谷地)와 본가도(本街道) 사이에 있는 촌락 중 기독교도가 있는 집을 전부 불태워 버린 후 천장절 축하연 길에 올랐다. ~ 중략 ~
(찬송)이 끝난 후 노인들은 기도를 올리고 여자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의 묘 앞에서 애 통해하며 앉아 있었다. 이교도인 중국인과 조선인 등의 대군집(大群集)은 머리를 숙여 눈 에 고인 눈물을 참으면서 계속 지켜보았다. 큰 나무 아래 있었던 교회당은 지금 한 줌의 재로 돌아갔고, 2동으로 구성되었던 학교의 큰 건물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해졌다.
~ 중략 ~
나는 전부 불탄 가옥 19채, 무덤 및 시체 36구를 목격했다.¹³나는 용정촌으로 돌아오자마 자 만취한 일본 병사와 마주쳤고, 시가지에 일본국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 장로회 수석선교사 W.R.푸트는 1920년 10월 30일자에 일본 동경에 있는 신학박사 올만에게 경신대학살 소식을 전하였다.
군대는 이 지역에서 약 1주일간 체재한 후 행동을 개시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본)군대 가 침입해 왔을 때 그들이 기독교 촌락으로 들어가 교회당과 학교를 계속 소각한다는 보고 를 전했을 때, 대부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었습니 다.
다음에 기술하는 부분은 지난 2주간에 걸쳐 발생한 사건에 관해 귀하에게 그 개요를 말 씀 드리는 것입니다.
~ 중략 ~
*노 페이(獐巖 : NoPei)¹⁴
교회당(300명분의 좌석 보유) 및 학교 소각
*칸 장 암 (KanChangAm) 10월 30일
교회당, 학교 및 주택 9채 소각, 인민은 총살되고 사체는 불태워짐.
이상의 기술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5명(선교사 4명, 세관 관리 1명)이
요일을 달리하여 후술할 현장으로 나가 토착민들과 수 시간에 걸쳐 조사한 것입니다.
이하 기술하는 내용에 관해서는 조선인의 증인이 있을 뿐이지만, 신뢰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해당 지방을 순시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총산(ChongSan)
교회 겸 학교( 한 건물을 두 개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및 가옥 수채가 소각되고 30명 살해됨. 그 중 23명은 사살되고 나머지 7명은 각자 집에서 타죽음.
*운 통 쟈(WuTongJa)
교회 겸 학교가 불타고 80명이 사살됨.
~ 중략 ~
예를 들면 장암촌에서 병졸들은 이 지역을 계속 행진하다가 교회당의 반대편에 이르러 승 마를 하거나 장교는 방화하기 편리한 거리에 부대를 멈춰 세우고 교회와 학교에 방화하고 사라졌습니다.
~ 중략 ~
칸창암지역에서는 엄동설한의 겨울이 오려는 이 때에 본인과 자녀를 부양할 자산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가엾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즉, 가족 중에 남자는 (모두) 사살 되었고, 가옥과 가재는 소각되고 그 집 한쪽에 쌓아두었던 수확물조차 잿더미로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 소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촌락으로부터 병졸들이 6명을 데리고 와 서 위의 6명과 칸창암 마을의 젊은이들을 ~중략~ 심문하는 형식도 취하지 않고 사살했다 고 합니다. ~ 처형된 자는 모두 25명이었고, 사살 후 사체는 2곳에 포개어져 잡초를 덮고 소각했다고 합니다.¹⁵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36명을 학살하고 영신학교와 간장암교회를 소각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그들의 만행은 10월 30일의 살인과 소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며칠 후에 다시 돌아와서 유족들을 몰아세워 각자의 무덤을 파헤쳐 타지 않은 사체를 한데 모아서 다시 불태워 시체를 분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두 번 소각을 자행한 군인들이 천장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떠나자 유족들은 재를 한 데 모아서 묻고 커다란 봉분을 만들었다.
일본군들은 주민들의 귀순을 강요하여 장암동 주민 한국호 (국민회 지부장 한국용의 친 동생)를 비롯하여 십 수 명이 귀순에 서명하도록 만들었으며 제국신민으로 살도록 회유하였다.
장암동대학살에서 살해당한 33명과 부상자 2명의 이름이 중화민국당안자료, ❰연길도윤공서❱❰보고서❱에 실려 있다.
사망자는 김병진, 전일남, 전기영, 현학순, 전희세, 현도순, 현일룡, 오화삼, 박사문, 김문석, 엄기영, 최광팔, 엄기철, 최광석, 엄정갑, 이흥수, 김경삼, 박경율, 엄함여, 김세익, 이병권, 김덕수, 김영세, 한여홍(박여홍), 김자용, 한세약(박세약), 맹공보, 이용세, 채을권, 박관섭, 안은경(안번형), 김덕현, 이태봉 이고 부상자는 황순오, 김운세 이다.¹⁸
중국지방관원인 장순사와 포대사 등이 1920년 11월 5일 외교총장에게 올린 ❰보고❱는 일본군의 민간 살해 만행을 고발하며 규탄하고 있다.
“간민들이¹⁶모여 사는 부락을 한당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 버렸으며 한민들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마을을 골라서 몇 집 또는 몇 십 집씩 불살랐고 몇 명 또는 몇 십 명씩 죽여 버렸는데 가는 곳 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있었다. 이들은 태반은 밭가는 농민들이었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었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 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일이다.”¹⁷
일본은 훈춘사건을 조작하며 용의주도하게 토벌의 구실을 만들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간도에 침략하였지만 토벌을 시작하자마자 중국인과 외국인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영미인들의 여론을 일본을 주권 침략범, 인도파괴범으로 몰아서 중국에서 일본의 세력을 거세시키려는 정치적 음모와 교세를 유지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과장된 악선전으로 파악하였다. 그들은 배일(排日)주의로 일관하는 간도의 캐나다선교사 스코트, 바커, 푸트, 카스, 페르소프, 마틴 선교사를 악선전의 원천으로 보았으며 그들이 토벌로 인하여 “신도들과 교회당 (곳곳에 있는 모옥(茅屋)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칭함)과 학교가 살육과 소각 등을 당하게 되면서 반감을 사게 되어”¹⁸ 배일 논리로 조선인들에게 영합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간도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이 당한 위험과 부당한 인권 침해에 대하여 북경 주재 영국대리공사가 질의하는 서신에 오바타 공사가 답하면서 “우리 토벌대는 그 대장이 과거, 현재에 불령선인과 관련 여하를 엄밀히 조사하여 장래의 화근을 남길 것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교회당, 학교, 기타 민가를 소각하는 것으로 함”이라고 변명하였다. 한 마디로 일본의 만주 거류민에게 화근이 되는 사회악, 사회폭력의 주축이 되는 불량한 조선인 폭력배를 토벌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장암동 도살사건❱¹⁹이라는 제목으로 장암동대학살을 세계에 알린 마틴 선교사의 글에 대하여 일본은 장암동은 “불령선인의 소굴”이라고 냉소적으로 반응하였다. 장암동의 교회와 학교가 종교와 교육의 본 목적에서 벗어나 불량배,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으므로 토벌당한 것임을 영미세계를 향하여 강조하였다.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은 원래부터 화전사 허문동과 더불어 이 방면에서 불령선인의 소굴 로 불렸고 동(同) 지역의 영신학교, 화전사 배영학교 등을 불령행동의 획책장으로 삼아왔 다. 그리고 이 방면에 거주하는 선인들의 태반은 기독교 신자로, 게다가 불령행동의 핵심 브레인은 많은 경우가 이 신도들이다. 그리고 불령행동의 음모는 이러한 불령자 등으로부 터 훨씬 이전부터 획책되어왔으나, 1919년 3월 독립소요 (사건) 발발을 계기로 그 시기가 도래하여 떨쳐 일어나 간도 일원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용정촌에서 한족독립선언식 폭거를 이루는데 힘을 모았고 비대해졌다. 이후 불령단은 ~ 중략 ~ 여러 차례 간도에 있는 우리 제국 총영사관 남양평 파출소를 위협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의 시장이 열리지도 못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이 지역 주민이 입은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 중략 ~ 이러한 정황이 되게 된 일면에는 기독교를 회원으로 하는 불령단체인 국민회가 장암동에서 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지회를 설치하고, 부락민 거의 전부를 회원으로 삼음으로써 불령 행동을 마음대로 해온 것이다.²⁰
이상으로 불령선인의 책원지였던 장암동과 장암동대학살을 살펴보았다.
장암동은 조선 이주민들에 의해 1909년에 개간되었다. 주민들은 1911년 적안평교회의 설립자이자 간민교육회 지도자이며 정동서숙의 설립자인 강백규의 전도로 간장암교회를 세웠으며 늦어도 1918년 이전에 강백규의 영향으로 영신학교(흥동학교, 장암학교)를 설립하였을 것이다.
마을이 개척되고 12년 되는 해, 교회가 설립되고 10년 되는 해에 용정의 일본 영사관이 학교와 마을²¹을 불령선인의 소굴로 지목할 정도로 장암동은 항일교육과 독립운동에 두각을 나타내는 마을로 성장을 하였다. 장암평에서 1리 반 정도 떨어진 남양평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낸 탄원서에 장암촌 주민들을 “모두 철저하게 배일사상을 품고 있고 불령단과 협동 동작을 하고 있다.” 고 기술한 것을 보면 장암동은 이미 독립운동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온전히 자신을 쏟아 붓는 불가사의한 열정과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장암동 주민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구국신앙을 가졌다.
김동춘의 논문❰만주교회의 주도성과 만세운동 전후의 과정 속에 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에 의하면 북간도의 교회들이 조선독립 운동방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1918년 9월 말부터 11월까지 함북노회 특별회로 4차례 모였는데 장암동교회도 특별회에 참여하여 북간도 전교회가 항일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것을 함께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암교회는 2월 20일❰3.13❱시위 준비모임에 대표를 보냈고 결의사항 대로 만세시위를 위한 준비와 연합운동을 펼쳤으며 ❰3.13❱만세시위 당일에 대부분의 교인들과 영신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그 후에 교회를 기초로 하여 국민회 지회를 만들었으며 교인 대부분이 국민회 회원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장암동 주민들의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교회를 완전 소각해서 장암동이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장암동 주민들은 학교를 구국교육 실천의 장으로 만들었다.
영신학교는 처음부터 기독교 미션스쿨로 세워졌으며 항일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3.13❱용정 만세시위에 모든 학생들과 교사가 참여를 하였다. 교사들 대부분이 독립투사들이었으며 대한학생광복단을 조직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으며 마을 경호대를 지원하였다. 일본군은 마을의 국민회 회원들이 학교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으므로 음모의 장이 된 학교 건물을 소각하였다고 사유를 밝혔다.
결론적으로 장암동 주민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무력투쟁의 길을 택하였다.
❰3.13❱평화 시위가 무력으로 피를 흘리고 끝나게 되었을 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허상에 불과하며 파리강화회의가 강자들의 잔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독립을 위하여 총칼을 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해야 되고 피 흘려야 한다는 사실을 때문에 신앙적으로 갈등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기반으로 해서 국민회 동부지방총회 제4지부를 설치하고 거의 전원이 그대로 국민회 회원이 되었다. 마을을 밀정으로 부터 지키기 위해서 경호원을 세웠으며 동부지방총회장으로부터 권총을 받아 무장하였다. 의군부와 도독부의 군사행동을 원조하였으며 지회 경호원들이 장거리 무기운반 작전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군자금 모금과 군수품 제공에 늘 앞장섰다.
이러한 연유로 장암동은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책원지로 꼽혔으며 1920년 10월 30일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 수십 명이 학살당하고 가옥, 학교와 교회당이 소각되었으며 식량 또한 소실되어서 독립에의 꿈과 믿음으로 희망과 활기에 찼던 예수촌이 마사다처럼 지상에서 장렬하게 사라졌다. 하나님이 실로 원망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창졸간이기는 하지만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생명을 구걸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였다.
간도대학살 100년을 맞이해서 조국의 독립에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위대한 무명의 장암동 사람들 앞에서 옷자락을 여민다. 그들이 죽임당하면서 꿈도, 마을도 사라지고 일본제국주의의 무력과 폭력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1931년 만주에 만주국을 세웠다. 짧은 순간 일본의 폭력이 잔인하게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들의 꿈을 영원히 빼앗지 못하였다. 그들의 꿈이 민들레 꽃씨처럼 간도지역으로 퍼졌고 1930년 대 중반, 연변의 항일독립투사는 무려 3만5천여 명이 되기에 이르렀다.
100주년이 되는 해에 간도대학살에 나라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희생양이 된 4,000여 영령과 죽음보다 가혹한 고통을 당해야 했던 유족들과 조선인사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당시 교회의 신앙고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고난에의 길을 기억하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교회와 국민회가 하나가 되어 일제의 폭력과 압제에 저항하다 억울하게 떼죽음 당한 독립운동사의 대 비극을 기념하며 죽음으로 유언을 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념과 살아남은 자들과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해서 잊히어진 간도대학살 희생양들의 꿈을 기억하며 기념하며 계승하기 위하여 장암동 학살 이야기를 눈물로 가슴에 썼다.
장암동교회의 희생양, 순교자들이 부활하는 환상을 보며 장암동 언덕에서 하늘을 본다.
2020.11.27.금
우담초라하니
미주
1. 불령선인 - 조선독립군, 항일투사들을 뜻한다.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는 우리 독립군들을 일본이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으로 얕잡아서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모욕하며 매장하기 위해서 사용한 경멸적인 호칭이다.
2. 심여추, 심극추저, ❰20세기 중국 조선족 역사자료집❱,19쪽
3. 같은 책, 83쪽
4.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507,508쪽
5.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75쪽
6. 조선군사령부 - 당시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사령부.
7.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524쪽
8. 북경대학조선문화연구소,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종교사❱,148쪽
9. 김철수저,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411쪽,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 교육사료집 1❱, 468쪽
10. 같은 책, 470쪽
11. 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324쪽
12. 장암동 학살 희생자 수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장암동 학살사건 다음날에 장암동 마을을 방문한 당시 제창병원 원장이었던 S.H. 마틴 캐나다 선교사는 36명, 일제의 조사 표는 24명, ❰독립신문❱간도통신원 조사자료는 7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3. 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311~314쪽
14. 노 페이(獐巖), 칸장암 (KanChangAm), 장암촌, 장암동은 같은 지역임.
15. 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299~302쪽
16. 간민은 북간도와 서간도에 사는 조선인에 대한 호칭.
17.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502,503쪽
18. 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105쪽
19. 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311쪽
20. 같은 책, 323쪽
21. 김철수저,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410쪽에 나오는 화령촌은 남양평 동쪽 약 2리에 위 치한 마을이고 장암촌은 남양평에서 북쪽으로 1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화령촌은 한 마을이 아니라 그 일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이 된다.
참고서적
1. 조선군사령부, 김연옥 옮김, ❰간도출병사❱, 경인문화사, 2019
2. 심여추, 심극추저, ❰20세기 중국 조선족 역사자료집❱, 연변인민출판사, 2002
3. 김춘선 저,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2016
4. 김철수저,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연변인민출판사, 2002
5. 양봉송 편저, ❰훈춘조선족발전사❱, 연변대학출판사, 2018
6. 김철호 지음, ❰중국 조선족, 그 력사를 말하다 상❱, 연변교육출판사, 2018
7. 양소전 외 4인 저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
8.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민족출판사, 1999
9. 호이전 외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1997
10.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 편집위원회, ❰중국조선족문화사대계 6, 종교사❱,
민족출판사, 2006
11. 룡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파사, 1999
12. 허청선, 강영덕 주편, ❰중국조선민족 교육사료집 1❱,연변교육출판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