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모를 선생님께
이번 주 필독서는 여행 에세이다.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말하자면 알맹이 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랄까? 썩 내키지 않아 후에 차차 읽기로 했다. 자고로 여행 에세이는 열심히 읽기 보다는 휴가철이나 휴가지의 저녁 밤, 비 내리는 카페에서나 밀린 일이 폭풍처럼 지나간 후 연한 아메리카노 한잔과 함께 읽을 때 분위 속 여유로움과 감성으로 그 운치가 더해진 채 읽어야 제 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약용씨와 이번 주 글 쓰는 그리스도인 챕터로 옮겨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쓴 편지’는 읽기가 지난하기는 하지만 나름의 운치와 매력이 있어 독서에 끊임이 없다. 그렇지만 꼭꼭 씹어 먹고 싶은 욕심에 다른 책보다는 진도가 빨리 나가지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서평보다는 다른 글을 쓰기로 생각하고 글쓰는 그리스도인의 챕터를 펼치니 이번 순서는 ‘메모’이다.
저자는 지난주 ‘독서’편에 이어 책을 ‘더럽게’ 읽기를 권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맞다. 나도 사실 책을 빌려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이란 것은 읽을 때마다 알게 되는 것이 달라져 한 번 읽고 마는 것은 수박겉핥기식 같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이 들고, 언제든 찾아 꺼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어 책을 사서 가지고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게다가 눈으로만 읽고 나면 도통 내용이 정리가 되지 않아 인상적인 곳, 중요한 곳에 줄을 긋고 여기저기 메모하며 보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무언가 더러워진 듯한 그 느낌이 싫어 예쁘게 줄을 긋고 메모하며 다이어리 꾸미듯 책을 읽어야만 안심이 되는 이 몹쓸 버릇.
나의 이런 독서 습관은 생각 해 보면 중학교 국어시간,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과 그래도 공부시키겠다는 약간은 쫌스러워 보이는 국어 선생님의 유별날 것 없는 수업시간. 그때는 내가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선생님이 매 시간 내 주시는 숙제에 골머리를 앓았더랬다. 선생님은 매주 국어시간 교과서 문학 본문의 각 단락에 제목을 붙이고 단락 요점을 찾아서 발표하는 숙제를 내 주셨다. 시험을 위한 공부도 아닌데 매 시간 과제가 있어서 아이들의 싫어하는 기색에도 불구하고 내내 꾸준히 숙제를 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선생님의 숙제에 맞서서 아이들이 택했던 치트키 ‘전과’.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 우리의 구세주 같았던 ‘전과’가 있었기에 친구들과 같이 국어시간 전 쉬는 시간에 급하게 숙제를 베껴쓰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아뿔싸 선생님의 숙제 중에는 전과에도 없는 내용이 많아서 매번 난감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4, 14, 24 이렇게 뒷자리 숫자가 같은 출석번호대로 발표가 돌아왔었기에 제발 내 번호 뒷자리 불리지 말라고 내내 가슴 졸였던 그 때 그 국어 시간 덕에 나는 지금도 책을 읽으며 ‘그래서 이말이 무슨 말이지?’ 생각하며 중요한 내용을 찾고 정리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성적이 그리 좋진 않았지만 수능 언어영역 시험을 칠 때도 가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 감동적인 역사는 없지만 내게는 이제 감사한 그 선생님. 선생님의 얼굴과 말투는 아직도 생생한데 성함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그 선생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리라.
나의 이름모를 선생님과 나의 기억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밍숭맹숭한 날들의 연속들 중에서도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눈에 보이는 반응들의 연속이라면 좀 더 쉽게 일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아쉬움의 영역 속에 은밀한 비밀과 은혜가 숨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지난하고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이미 나에게 무언가 주고 있을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내가 무언가 주고 있을 사람들을 항상 기억하고 싶다. 사부님, 그리고 대구 글쓰기 학교 오후반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저의 이름모를 선생님이십니다. 저를 용납해 주시고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