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날에 나는 파주에 있는 검단사를 방문하기 위하여 파주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하였다, 서울에서 파주에까지 가려고 하면 10세 30분에 출발하면 11시 40분에 도착 한다고 한다,
서울을 떠나서 파주로 갔다, 파주로 가는 강에는 한강이 얼어 어린 시절에는 시골 논뚝에 물을 막아 스케트를 타기도 했는데 지금은 스케트를 타는 이들이 없다, 한강이 주는 미가 상실되었다, 그리고 행주산성을 지나가는데 행주산성에는 권률 장군의 동상이 있는데 승군 대장 처영 동상이 없다, 분명히 선조가 명을 내렸는데 승군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승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總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 유정은 담력과 지혜가 있어 여러 번 왜진(倭陣)에 사자로 갔는데 왜인들이 신복(信服)하였다. 승군(僧軍)은 제대로 접전(接戰)은 하지 못했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를 부지런히 하며 먼저 무너져 흩어지지 않았으므로 여러 도에서 그들을 의지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참조
승통 휴정
총섭 의염
관동대장 사명
호남대장 처영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당시 경성에는 적들이 연합하여 둔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권율은 명나라 군사와 연대하여 경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머물려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柵)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대는 징소리·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
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한 데다가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화살을 비오듯 퍼부을 때마다 적의 기세가 문득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柵)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 쪽의 책 한 간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僧軍)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수사(水使) 이빈(李蘋)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주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백 30급이나 되었다.
다음날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하였다. 송 경략(宋經略)이 우리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推奬)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다. 황제가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 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해국(該國)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하였다. 권율이 파주의 대흥 산성(大興山城)으로 옮겨 진을 치자 적병이 또 침입해 왔으나 모두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는 갑작스레 회군(回軍)한 것을 자못 후회하면서 장세작(張世爵)으로 하여금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도로 개성에 가서 군량을 비축해 놓고 기다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