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말
우리 미술관이 위치하고 있는 강서(조선시대 양천현)는 문화와 예술 정신이 깃든 곳으로 겸재 정선(1676-1759)이 현령으로 재직(1740-1745)하면서《경교명승첩⟫,《양천팔경첩⟫등 다수 불멸의 걸작을 남긴 곳이기도 합니다.
겸재의 혼이 살아있는 이러한 뜻 깊은 공간인 강서구에서 평생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하며, 그의 화혼과 지성을 오늘에 되살려 새로운 창조적 미술세계를 열어갔던 故 김 한 작가의 1주기 유작전시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
겸재는 80의 나이에도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붓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가 쓴 몽당붓이 무덤을 이룰 만큼이었다 하니, 이는 평생에 걸쳐 불타는 예술 열정과 그림에 대한 탐구 실험을 계속 추구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故 김 한 작가 역시 이러한 겸재의 정신과 모습이 닮아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림과 더불어 살겠다고 한 것처럼 본인을 천부적인 그림쟁이라 여기며 평생을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이번 "겸재 맥 찾기 초청기획전"의 일환으로 <김 한 _ 1주기 유작展>을 개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故 김 한 작가는 함경북도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의 그림 속에는 어린 시절 아름다운 추억이 함께 묻어나 있습니다.
또한, 故 김 한 작가의 작품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그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작가임을 거듭 감지하게 됩니다. 이 시대를 이끄는 이런 정신의 작가가 출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는 1995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가 출간한 『엉겅퀴꽃』 책 중에 “... 역시 그림쟁이고 내 그림은 그런 대로 내가 하는 일중에 제일로 멋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 그 천분을 어찌 감추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하나님이 천분으로 주신 그림이 좋아 이젠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그림쟁이로소이다....” 이렇듯 주변 뿐 아니라 본인도 그림쟁이로 사는 것이 천분이라 여기며, 그가 이야기했듯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리며, 그가 생전 꾸준히 작업한 작품들을 모아, 겸재의 숨결과 화혼이 살아있는 우리 미술관에서 <김 한 _ 1주기 유작展>을 갖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바쁘신 중에도 왕림하시어 전시를 함께 감상하시고 격려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4. 6.
서울강서문화원장 김 병 희
겸재정선미술관장 이 석 우
그림쟁이로소이다
몇 해 전 『나의 세월은…』이라고 이름 붙인 책 한 권을 꾸며냈다. 수많은 소묘(素描) 작품 중에서 추린 것들과 나의 어릴 적… 그것도 초등학교에도 갈 나이도 — 말하자면 유년 시절의 이야기들과 가장 애틋하게 잊혀지지 않는 일들, 그리고 시(詩)랍시고 한두 편씩 적어 두었던 것들 가운데서 그나마도 내 마음에 조금은 흡족하다 싶은 것들을 모아서 내 딴엔 평생 처음으로 활자화(活字化)된 내 이름으로 된 책자를 얻은 셈이 된다.
차마 낯 뜨겁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기는 하나 나의 어릴 적 고향에서 자라던 때의 아롱진 기억들이 너무나도 소중히 여겨지고 날이 갈수록 생생하고 눈물겹도록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접어두기엔 그 추억이 더없이 아깝기도 하고 차마 떨쳐버릴 수 없는 내 마음을 저미고 들어오는 단상들을 무엇으로든지 더 남기도 싶다는 생각에서 서둘러 책을 엮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애타는 일은 북(北)에서 내려와 어언 반세기를 흘러 보낸 이른바 실향민이란 아픈 굴레를 쓴 채 향수에 사무쳐 산 처지일 것 같다.
누구나 어릴 적 기억은 소중할 테지만 남달리 따뜻하고 사랑 속에서 커갔었던 나로서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보다 더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사람은 없을 거라는 애착심 속에 추억을 반추해가며 더불어 지냈다. 그림쟁이랍시고 늘 물감하고 씨름하면서도 생각은 늘 옛 고향의 언저리를 맴돌고 방황하는 심상을 화폭 속에 그려 놓고 있었지만 그 아기자기한 유년의 추억이라든가 — 그 밖의 추억의 물감들을 그림으로 시원히 다 표현할 수 있질 못한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리다가도 한두 장씩 적어 내려간 것이 그럭저럭 한권의 책으로 태어난 셈이고 그것과 곁들여 수많은 연필 데생 중에서 간추린 그림들을 마아 엮으니 부끄럽지만 그런 대로 책 모양을 어설피 갖춘 것이었다. 퍽 오래된 일이기는 하나 공군 군악 대대장이었던 C중령과 어떤 일로 해서 가깝게 지내곤 하였는데 그는 나의 노래 부르는 솜씨가 제법이라고 칭찬하고 늘 음악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서로 그것을 성악에 대한 얘기도 퍽 많이 나누었다. 그러다 마침내 어는 해 여름날 “8․15 경축 시민 위안의 밤”이란 공군군악대 주최의 야외 음악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광을 얻고 내심 내가 마치 성악가라도 된 듯 한 기분에 우쭐해했던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당돌했던 내 모습이 아찔하다. 대체 무슨 용기로 그런 엄청난? 마당에까지 뛰어들었는지 스스로도 놀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그럭저럭 하다 보니 이젠 노래 부르기를 거쳐 글까지 겁 없이 챙겨서 불쑥 책까지 펴 내놓았으니 또 대체 나란 위인의 위상이란 것이 스스로도 예사롭지는 않게 되돌아보게 된다. 사실 명색이 그림쟁이 주제에 걸핏하면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림보다 목소리가 더 나으니 무엇하러 힘들 그림과 되지도 않은 책 한 권에 넋두리 아닌 넋두리인 냥 철없는 어릴 적의 애틋한 이야기부터 인생의 아쉬운 얘기를 주섬주섬 엮어 섬기고 또는 시랍시고 시가 뭔지도 잘 모르는 주제에 그저 순진한 마음으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저 어쭙잖은 삶의 기쁨과 슬픔들이며 속 들여다보이는 추억 따위를 토해 내버리니 말이다.
그것도 재주 아닌 세월이 좋은 탓에 책이란 이름으로 나오게 되니 이 또한 기이(奇異)한 칭송이 더하나 붙은 셈이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글이나 쓸 일이지, 무엇 하러 되지도 못한 그림을 그리느냐”는 친구들의 짓궂은 충고를 듣게 되니 말이다. 그런 말을 듣게 되니 내심 겸연쩍고 당황하기도 하여 때로는 마음도 상하고 다시금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때가 많다.
그나마도 내 나름대로 남보다는 더 열심히 그림 그린답시고 안간힘을 써가며 흘러버린 긴긴 세월인데 어찌하랴 앞으로도 그 얼마나 긴 시간을 내 광기로 그림과 더불어 삶을 마감 할 지는 저 높은 곳의 하나님아버지께서나 알 터인데 그 욕심부터 그림으로는 못 다한 삶의 구석구석 마음저리고 애틋함을 삶의 지난 얘기들을 그대로 흘러버리기 못내 아쉬워 남기고 싶은 것들을 추리고 책까지 만들었으니 그건 정말 부끄럽지만 작은 보람으로 여겨진다. 노래를 부르면 목청이 딴 사람보다 조금 좋게 들릴 뿐인데 그림보다 훌륭한 칭찬도 싫진 않지만 직업이 그림쟁이인 내 입장으로선 야간 겸연쩍고 속상하게 들리기도 한다. 잘하지 못하나 그림쟁이로 행세하고 끝까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인데 사람이란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옛 교훈을 제쳐놓더라도 내가 무슨 딴 생각으로 글을 끄적거리거나 노래 부르는 일 따위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아니나 신통치도 못한 그림쟁이로 들리니 졸장부인 탓이랄까? 때로는 종종 부끄러운 생각에 빠져본다.
잡기에 능하다는 말도 있다. 그럼 내가 잡기에 능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축에 드는 셈이 분명할 터인데 말이다. 때로는 주변의 그러한 칭찬 아닌 칭찬의 말에 어리둥절해지며 역시 나란 위인은 졸부~졸장부임에 틀림없다 반성한다. 2년 전 그런 대로 열심히 그림과 더불어 열심히 살았다는 칭찬이랄까? 과분하게 내게 대상인 이중섭미술상이 주어졌을 적엔 도대체 거만 같기도 하고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하며 기쁨과 놀라움에 내 평생 작업에 대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은 적이 있다. 이중섭 미술상을 계기로 나는 새삼스레 보람을 느끼며 더욱 그림에 대한 애정과 체면을 주변과 선배님 그리고 여러모로 나를 아끼는 이들로부터 인정받은 셈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그러니 나는 역시 그림쟁이고 내 그림은 그런 대로 내가 하는 일중에 제일로 멋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생명과도 같은 것이니 그 천분을 어찌 감추겠는가. 어쨌거나 나는 하나님이 천분으로 주신 그림이 좋아 이젠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그림쟁이로소이다.
김한 화문집 “엉겅퀴꽃(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