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매로 알리라
말씀/마태복음 7:1-29
요절/마태복음 7:20, 찬송가/332장, 369장
혹시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란 책을 아십니까? 아마도 카네기는 자기 계발서를 최초로 쓴 사람일 것입니다. 예전 30대 초반 목자 시절, 대학 새내기 여학생이 이 책을 읽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유튜브를 보니,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에 관한 영상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제라도 이 책을 사서 읽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론의 핵심이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만 잘 듣고 실천하면 굳이 인간관계로 사서 읽지 않아도 됩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주로 개인적인 문제를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변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 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십니다.
1장, 비판하지 말라(1-12)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여기서의 비판은 옳고 그름에 대해서, 또 잘잘못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되었으면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무조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신앙공동체라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모두에게는 위대한 장점이 있는 것처럼, 위대한 약점도 있습니다. 오히려 신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복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금방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각자 개인의 성향이 다르고 오랫동안 형성된 잘못된 습관들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딪치게 되고 문제가 드러납니다. 함께 있다 보니 그 문제를 너무나 잘 알게 됩니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 이렇게 자꾸 문제가 드러나면 나도 조금씩 피해를 보게 되고, 피해 정도는 아닐지라도 피곤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판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비판은 마치 검사나 판사가 죄인을 다루듯이 문제를 제기하고 그 형량까지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에는 비판을 아예 ‘심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부드럽게 하는 충고도 듣기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나를 비판합니다. 심지어 “너도 사람이냐, 너는 신자도 아니야?” 등의 형량까지 선고하면 결코 좋게 받아 들일리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어제의 친구요, 형제, 자매가 이제는 아예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데일 카네기가 쓴 ‘인간관계론’에서 ‘인간관계는 친구를 만들고 적을 만들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적을 만들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구나 나는 문제가 없습니까? 사실 나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부족한 사람이고, 나도 조금만 털면 먼지가 풀풀 나는 사람입니다. 내가 비판하게 되면 나도 똑같이 비판을 받습니다(2). 흔히들, 우리가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 라고 했다면, 사실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나를 비판하면, 나도 기분 나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나도 어제의 친구가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티는 정말 작습니다. 작으니 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지금 들보가 있습니다. 들보는 대들보입니다. 건물의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기 위해 놓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이런 대들보가 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은 티와 같다면, 나의 잘못과 부족함은 대들보와 같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크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즉 내 잘못은 ‘티’에 불과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대들보처럼 여깁니다. ‘내로남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이해가 넘칩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아주 은혜가 넘칩니다. 나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감싸주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은혜 받은 사람이 저럴 수 있는가? 저게 신자인가? 하면서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 대해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이요, 자기에 대한 것과 남에 대한 것이 다른 잣대를 사용하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라고 하십니다. 그 들보는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 들보를 빼고 내가 먼저 용서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밝히 본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하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다는 것, 그래서 선배가 되고 목자가 된다는 것은 그냥 신앙연수가 늘고, 또 단지 많은 일을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 때론 그의 잘못과 허물을 알지만, 봤지만, 모른 척 하기도 하고, 못 본 척 하기도 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나를 도우신 것처럼 나도 그 사람을 위해 섬기며, 그를 도우실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성질을 죽이고만 살아야 할까요? 6a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좀 연결이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개는 반려견이 아니라, 죽은 시체나 먹는 부정한 들개를 말합니다. 유대인은 이런 개를 가장 더럽게 여기고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돼지도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고 아예 먹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거룩한 것, 진주는 무엇을 말할까요? 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허물과 부족함 때문에 내가 피곤하고 힘들어도, 내가 상처를 받아도, 내가 먼저 회개하고, 상대의 죄를 티로 여기고 내 허물을 들보로 여기며 돕고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것이고, 진주를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상대방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면 참 좋은데, 그러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상대는 내가 그에게 베푸는 은혜와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의 사랑과 섬김을 무시하고 짓밟고 함부로 대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준다고 해서 개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준다고 돼지가 감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즉 내 사랑과 섬김과 은혜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누군가를 감당하고자 하다 오히려 상처받고, 고통당할 우리를 염려하십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포기할까요? 7절을 읽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예수님은 구하라고 하십니다. 찾으라고 하십니다.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고,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점점 더 열정적으로 끝까지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매달리며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가 안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엄마’하고 부릅니다.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여기 저기 찾아다닙니다. 방문도 두드려 보고, 화장실 문도 두드려보며 계속 찾습니다. 이렇게 하는 자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7절의 반복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를 원하시고, 반드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도에 대한 강조와 약속의 말씀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기도에 대한 이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상대를 감당하고 돕고자 합니다. 내 문제를 들보처럼 여기고 상대의 티를 빼고자 하는데, 그런데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돕는 것도 쉽지 않고 돕지 않을 수도 없고, 하는 이런 난감한 상황이 사실 우리에게 있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학교나 연구실에서 또 직장에서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집에서 무엇보다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이런 상황을 많이 만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예 상대를 안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개나 돼지 한 마리 키우는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 당장 속은 편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개나 돼지로 여기고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 상대에게 무작정 사랑만 베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해결의 문을 열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인간관계론’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친구를 만들라고 했는데, 누가 적을 만들고 싶겠습니까? 적같이 구니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적을 적으로만 두지 말고 친구로 만드는 것은 커피를 가끔 사주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녹여 주시고, 삶이 바뀌도록, 뭔가 좀 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의 구하는 것을 응답해 주시고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드십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없습니다.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일지라도 자기 자식에게 만큼은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내가 구하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면 바로 그것을 주실 수 있고,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때와 시기, 방법이나 응답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내게 가장 좋을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구해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두드려야 합니다. 당장에 해결이 안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가장 좋은 것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관계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인간관계의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인간관계론’의 대헌장과 같은 핵심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비판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용서받고 더 나아가서 인정받고 대접받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원한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싶으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당연한 사람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먼저’입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섬기면 나도 하겠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왜 내가 먼저 머리를 숙여, 왜 내가 먼저 커피를 사? 왜 내가 먼저 용서해? 상대가 먼저 잘못했고, 나에게 용서를 구해야지? 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문제가 더 커지고, 곪아집니다. 더 꼿꼿해지고, 나중에는 사소하게 시작된 일이, 별것 아닌 일이 이상한 데로 커져 버립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낮추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대는 전혀 몰라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용서하고 이해하고 감당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알게 되고 꼬였던 문제들도 풀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고 서로 비판하며 살지라도 여기서만큼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이해의 원리로 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 할 때, 천국과 지옥 모두 숟가락과 젓가락이 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옥은 이 긴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으려니, 아무도 못 먹습니다. 반면 천국은 긴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서로 먹여주니, 다 먹습니다. 길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이런 것처럼 세상에서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서로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면서 서로 남을 인정해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너무 너무 피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인 이곳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적용되고 흘러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공동체인 항공교회가 사는 길은 내가 먼저 사랑하고 품고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머리를 숙이는 사람, 먼저 마음을 낮추고 섬기는 그 사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가 인간관계론을 제대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함께 머물고 싶은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장, 열매로 알리라(13-29)
여기서부터는 산상수훈 전체에 대한 결론입니다. 산상수훈이 무엇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일종의 신앙생활의 가이드북이요, 네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따른다면 복 있는 자로 천국백성답게 천국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예를 들어 이를 강조하여 설명하십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14절을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은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문도 좁을 뿐만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에도 그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별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고, 찾는 이도 적습니다. 반면에 넓은 문은 일단 문부터 폼이 나고 들어가기도 쉽고, 들어가는 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잘 찾지도 않고 고생스러운 길이 있는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론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기서 좁은 문은 산상수훈이 가르쳐주신 삶의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용서하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대접받고자 하기보다 먼저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원하는 욕심과 감정을 따라 살고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장은 좋아 보이고 편해 보입니다.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당장에 힘들어 보이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기도 힘든데,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 이것은 투자를 분산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어 보입니다. 찾는 이가 적어서 때론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내게 생명을 줍니다. 지금 좋아 보인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힘들다고 해서 계속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좋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 마지막 결론이 중요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삶은 그 마지막이 생명입니다. 이 길을 가는 우리들이 되어서 생명을 얻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열매로 알리라(15-23). 이제 예수님은 더 분명하게 이를 말씀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입니다. 그것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못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그럼 그 열매가 무엇일까요?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하는 것은 나름 예수를 알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니라, 말로만 또 겉으로만 주를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예수님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겉으로만 ‘주여 주여’라는 고백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계속해서 좁은 길로 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혀지지 않습니다. 지금 꽃이 핀 것들은 늦 여름이나 가을이 되어서야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니까 한번이 아닙니다. ‘주여 주여’부르는 것은 한방입니다. 가끔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계속해서 꾸준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면서 삶을 형성하여 맺어지는 것입니다. 즉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이 와서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정말 이들을 모르실까요? 주님이 이들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이들이 불법을 행한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주님이 누구신지를 모릅니다. 능력을 행했지만 일은 많이 했지만,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뭔가 폼을 잡고, 능력을 행하고, 뭔가 어마 어마한 것을 자랑하며 신앙생활 한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것이 없습니다. 좁은 길로 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무엇이고,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저 주의 이름으로 자기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많은 일을 했지만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일을 했는데, 하나도 합법적인 것,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실력과 업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성적순으로 줄을 세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내 능력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자랑할 만 일이 있는가? 이력서에 쫙 쓴다고 와! 괜찮은데, 하며 천국에서 그를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우며 사는 삶을 통해서 맺어진 그 열매를 통해 평가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고민하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주님이 인정하십니다.
셋째,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 2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예수님은 집을 짓는 것을 통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한 사람은 반석위에 짓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반석이 평평하게 똑바로 되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평평하게 하기 위해 먼저 바위를 깨고 파내야 합니다. 시작부터 고생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그냥 대충 평평하게 바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바위를 깨면서 기초공사를 할 때에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벌써 집을 거의 다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집을 다 짓고 나면 겉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반석위에 짓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쓴 것에 비해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남은 시간과 돈으로 집의 외관도 멋지게 꾸미고 좋은 가구까지 들여놓습니다. 건축은 인건비 싸움이고 시간 싸움인데, 이렇게 모래 위에 재빨리 집을 지은 사람이 훨씬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납니다. 창수는 홍수와 다릅니다. 창수는 중동과 같은 건조한 지방에서 수로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아, 비가 일시에 조금 많이 오기만 하면 그 물이 모든 것을 쓸어버릴 정도로 큰 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하라 사막에서 일년에 100-200명 정도 죽는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많이 죽는가? 보니, 우리는 여행을 하다가 물이 없어 죽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비가 와서 창수를 만나서 많이 죽는다고 합니다. 사막을 여행하다가 그늘진 곳, 움푹한 곳에 텐트를 치는데, 한번 비가 오면 그것으로 확 물이 들이쳐 그냥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창수가 인생에도 닥칠 수 있습니다. 이 집에도 닥친 것입니다. 물이 사정없이 밀려 올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반석 위에 지었기에 어떤 창수에도 끄덕 없이 잘 버팁니다. 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기초가 모래이기에, 물결이 모래를 마구 파헤쳐, 집이 기울고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26,27절을 보십시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인생의 창수가 닥칠 때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힘들고 어렵지만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이요,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지만 인생의 창수를 만났을 때,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결국 나를 구원하는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당장은 힘들지라도 예수님이 가르쳐 준 산상수훈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집을 반석위에 지을 수 있고, 주님이 인정하시는 구원의 열매도 맺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