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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閑山島 大捷)
개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또는 견내량 대첩(見乃梁大捷)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승전 중 하나로,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내해에서 발발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의 전투이다.
임진왜란의 전황이 바뀌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 중 하나로 일본 수군의 수륙병진을 완전히 박살낸 대첩이며, 이 한산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평양까지 승승장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이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을 받지 못하여 평양성에 눌러앉게 되었다.
수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전라도를 공격하는 왜군의 움직임도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배경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난중일기, 7월 초8일 기사
선조 25년(1592),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 함대를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해안에서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주둔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군대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했다.
참고로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원균이 자침시킨 경상우수영 판옥선만 해도 편제기준 70여 척, 기록상 56척 이상이다
전개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4번째 기사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 전투에서의 경험을 통해 조선군의 전략을 과소평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했다.
일본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일본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르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 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군 함대를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매복을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와키자카는 조선군을 업신여기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전선을 추격해 넓은 바다로 진입했다.
와키자카의 함대가 들어서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대기하던 조선 측 전선들은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하였고,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7월 7일 가라시마[6] 앞쪽으로 배를 밀어 나아가니 마침 해협 안에 판옥선 4~5척이 있는 것을 보고 조총을 쏘며 반각 정도 싸움을 걸었다.
판옥선이 슬금슬금 뒤로 빼는 것을 빈틈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서 3리 정도 쫓아갔을 무렵이었다.
판옥선이 막 해협을 지나 넓은 곳으로 나아갔다.
한번에 키를 돌려 잡고는 큰 배를 양쪽으로 벌려 세워 아군의 배를 둘러쌌다.
이는 유인하여 무찌르는 계책임이 분명했다.
아군의 배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적은 큰 배, 아군은 작은 배이므로 당해내기 힘들어서 원래 온 해협으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적의 판옥선이 밀어붙여 와서는 아군 배에 호로쿠비야를 던져넣어 곧 배가 불타올랐다.
야스하루의 가신인 와키자카 사효에, 와타나베 시치에몬을 시작으로 이름 있는 자 여럿이 전사했다.
와키자카기(脇坂記) 중
때마침 역방향으로 해류가 바뀌었고, 조선 수군은 이에 총통과 화전(火箭)을 쏘며 전진했다.
전 방향에서 날아드는 탄망에 주력선인 세키부네(관선)는 물론이고 일본군 내 주요 가신들이 탄 아타케부네(안택선)까지 줄줄이 격침되고,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40척이 넘는 전선을 잃었다.
심지어 지휘관인 와키자카 본인도 지휘선을 관통한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후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200-400여 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내버려둔 채 도망쳤으며, 다른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전선이 모두 격침당하자 퇴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야스하루는 노 수가 많은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기동이 자유로우며 선체가 무사하다고는 하나 갑옷에 화살을 맞는 등 구사일생의 위기에 빠졌다.
적선이 쫓아오며 계속 불화살을 쏘아대니 야스하루의 고속선은 마침내 김해로 철수했다.
적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 200여 명은 육지에서 50정 떨어진 작은 섬에 잠시 배를 대고 상륙했는데, 판옥선이 쫓아와 아군 배를 불살라버렸다.
마나베 사마노조라는 자는 당일 그 배의 선장이었는데, 그 배가 불타버린 이상 목숨을 건져봐야 별 수가 없고, 군중에서 다시 아군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여 할복해 죽고 말았다.
와키자카는 한산도에 상륙했는데 마지막 남은 배를 판옥선이 쫓아와 불태우고 가버렸고, 오고 갈 데가 없는 상황에 절망한 선장마저 자살했다.
죽음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뒤에 남아 있던 구키, 가토도 와키자카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쫓아오지만, 이들도 조선수군에 패배했다.
가라시마의 작은 섬에 올라와 있던 나카쓰카사와 그 가신들은 13일간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불탄 배의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올라가려 하였다.
판옥선이 물러나는 틈을 잘 보고 있었는데, 가라시마 밖에 일본의 병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듣고 판옥선이 갑자기 물러났다.
그 틈에 5~6명씩 뗏목에 타고 그 섬으로부터 육지로 오던 중 판옥선이 다시 키를 돌려 와서 바닷가에서 (아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남은 자는 200여 명 남짓이었다.
겨우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 목숨을 건져 김해로 돌아왔다.
와키자카는 그야말로 눈물나는 모험을 벌여 간신히 김해로 도주에 성공했다.
13일이나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살아남고, 먼바다에 뜬 적의 눈치를 보다가 뗏목을 만들어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5㎞를 건너간 뒤 다시 거제에서 육로와 수로를 병행해 김해로 탈출했다.
여담이지만 와키자카가 먹었던 미역은 보통 미역이 아니라, 견내량 돌미역이라 불리는 통영 거제 지역 특산물이다.
조정에 진상할 정도로 고급품이었으며, 이순신과 수군 장병들도 틈틈이 채취하여 군량으로 댔다.
와키자카를 살아 도망가게 만들어 준 것은 원균의 탓이다.
견내량파왜병장을 보면 전라 좌도와 우도 수군은 군량이 떨어지고 금산의 적이 전주에 도착했다는 기별이 잇따라 닥치자 본진으로 회군을 결정하였고, 한산도에 몰린 적은 경상우수사가 처리하고 급수를 통고할 것을 약속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원균은 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와키자카를 포함한 남은 왜군을 도주하게 만든 것이다.
참고로 경상우수영의 본진은 거제도 가배진으로 눈 뜨면 보이는 정면이 한산도이다.
부산포파왜병장에서는 원균이 왜적이 많이 온다고 잘못듣고 포위를 풀었기 때문에 한산의 왜적이 뗏목을 만들어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하는 바, 이를 들은 이순신이 통분해 하였다고 한다.
결과
이제까지 늘 수세적인 입지에서 정박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 주된 전투방식이었던 조선 수군에게 이 해전은 처음으로 벌인 방어전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라도를 지키는 방어전으로 그치지 않고, 해상에서 포위섬멸을 감행하는 놀라운 전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일본 수군의 공세를 완전히 분쇄시켰다.
일본군에게 있어서는,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 함대에 대하여 일본 수군이 처음으로 행한 공세적 작전이자, 이치, 웅치, 전주성, 진주성 등으로 이어질 전라도 공방전의 보급을 담당할 일본 수군에게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이 한 번의 공세에 너무 많은 변수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해전의 참패는 일본군에게 있어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전략 단계에서부터 조선 점령을 좌절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참패를 겪은 일본군은 이틀 뒤인 10일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총 100척 이상에 달하는 대함대가 고작 사흘 만에 수장당하는 치명타를 입었다.
조선 수군은 안골포 해전 이후 가덕도를 지나 김해에서 부산 몰운대까지 진출해 함대를 길게 늘어뜨려놓아 위엄을 보이도록 했는데, 일본군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견내량파왜병장은 탐망군 허수광의 보고에서 김해의 늙은 중이 말한 바 양산과 김해의 낙동강 일대에 왜선 백여척이 주둔해 있었는데 안골포의 접전 때 포 소리를 듣고는 간밤에 모두 도망쳐버렸다고 하였다.
이에 더 이상 해상 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완전히 되찾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해의 제해권은 매우 중요했다.
한반도의 강들은 대부분 서해로 흐르는데, 일본 수군이 남해에 있는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돌파하고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면, 한반도에 있는 일본 육군의 보급이 매우 용이해진다.
이는 일본군도 잘 아는 사실이었기에 서해를 장악한 이후의 육군 보급을 계획하고, 수군 주력의 대부분을 투입하면서 남해의 제해권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손에 쥐고 넘겨주지 않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 육군에게도 큰 타격을 가한 셈이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수륙병진이라는 목표가 좌절됨과 더불어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일본의 본진 부산까지 습격당했다.
이렇게 일본군이 해상 요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명나라군의 참전과 더불어 일본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되었다.
애초 계획이었던 육군과 수군이 같이 진격한다는 수륙병진전략이 깨진 것이다.
또한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의병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해안가에서 거주하던 백성들은 해상의병이 되어 이순신과 함께 싸우거나 지형과 바닷물의 흐름을 알려주어 전략을 짤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전투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당도했을 때 우리 진영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 수군 10만 명이 곧 서해로 도착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거제 싸움에서 패하면서 한 팔이 꺾였기 때문에 비록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성을 점령하였을지라도 군세가 외로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까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군량을 조달하고 명령을 전달하여 중흥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요동과 천진 등지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와서 구원하여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이 싸움의 공이다.
한편 전후 논공 행상을 위해 비변사가 선조에게 포상을 논의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 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1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8월 24일 2번째 기사
선조의 노답 원균 총애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얼핏 사소한 에피소드이지만, 와키자카는 분노와 회한으로 부들거리던 중 조선의 정찰선을 하나 발견하고 승조원을 깡그리 학살한 뒤 선장을 포로로 끌고 왔지만 그 선장이 탈주해 적진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자를 거제도에서 판옥선 대함대를 이끈 적장으로 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