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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
씬 63. 언덕 집 방안.
늦은 오후 어두운 방안, 사복차림의 권귀옥이 언덕 집 여자와 마주 앉아 있다.
방안의 낡은 물건들은 시골 부부의 가난한 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자: 나 임신 7개월째 예요. (울다 웃다) 늦게 생긴 애라 남편이 대개 좋아해요.
귀옥: …….
여자: (자신의 배에 손을 얹으며) 그런데 얘가 ……. 이 애기가 ……. 어쩌면…….
귀옥: ?
여자: 7개월 전에…….
귀옥: ?
여자: (울컥) 그 놈이 날 덮친 게……. 7개월 전이었……. (울음 터진다)
귀옥: 7개월 전……. 작년 9월이면……. 첫번째 사건 나기 얼마전이예요.
여자: 맞아요. 그 동안 죽은 동네 여자들……. 내가 신문에서 봤는데……. 신문에서 다 봤는데!
귀옥: !
여자: 그 여자들 살해된 방법이 내가 당한 거랑 똑같았어요! (덜덜 떤다)
귀옥: 정말이에요?
여자: 차라리 나도 그때 죽여버리지……. 왜 난…….
귀옥: 무슨 말을…….
여자: 흐흑……. 난 왜 안 죽었을까……. 난 왜!
귀옥: (손잡으며) 진정해요!
여자: 그날 밤에 ……. 비가 왔는데……. 부슬부슬 왔는데…….
씬 64-1. 플래쉬 백/그날 밤.
안송중학교 변소 뒤쪽. 언덕이 시작되는 부근……. 집을 향해 홀로 걸어가고 있는 언덕집 여자.
지금과는 달리 배가 불룩하지 않은 날씬한 모습이다.
뭔가 인기척을 느낀 듯, 뒤를 힐끔 돌아보는데……. 어둠속을 스르르-움직이는 검은 그림자.
여자: (V. O.) 학교 뒤 변소 쪽이었던 거 같아요…….
씬 64-2. 다시 방안.
여자: (창백한 얼굴로) 조그만 칼 같은걸 내 옆구리에 갖다 댔는데…….
순식간에……. 아주 순식간에…….
씬 64-3. 그날 밤 언덕 아래.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여지는 이미지……. 스타킹으로 여자의 손목을 꽁꽁 묶고 있는 범인의 손…….
여자의 벗긴 양말에 돌멩이 하나를 슥 집어넣는 범인의 손…….
씬 64-4. 현재/언덕길.
긴장된 얼굴로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 태윤과 귀옥……. 귀옥은 언덕 집 여자만큼이나 창백한 얼굴이다.
귀옥: 그리구는……. 그 양말로 입에 재갈을 물렸대요.
태윤: 확실해. 그 놈이야. (표정 굳어진다.)
귀옥: 그리곤 팬티를 머리 위로 씌우더니……. 그 다음에…….
태윤: 잠깐, 그 놈 얼굴은……. 얼굴은 못 봤나?
씬 64-5. 조금 전/언덕 집 방 안.
여자: 그놈 얼굴을 안보려구 억지루 억지루 고개를 숙였어요……. 얼굴 보면 날 죽일 거 같앴어요. 그래, 얼굴을 봤으면 날 죽였을 거야! 난 안 봤어!
귀옥: …….
여자: (떨리듯) 그 놈이 내 얼굴을 팬티루 덮어 씌우니까……. 그게 오히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흐느낀다) 아무 것도 안 보이니까.
씬 64-6. 그날 밤.
어둠 속의 거친 숨소리. 풀밭에 눕혀진 언덕 집 여자의 얼굴…….
얼굴 위로 덮어 씌워진 팬티 때문에 양말로 재갈이 물린 입부분만 보인다.
태윤(V. O.): 그럼……. 아무것도 못 봤단 얘기야?
씬 64-7. 언덕아래.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추는 귀옥. 같이 가던 서태윤도 발걸음을 멈춘다.
귀옥: 참……. 그 손! 그놈 손 이야기를 했었는데…….
태윤: 손?
언덕을 내려온 두 사람은 어느덧 안송중학교 변소 뒷편. ‘ 그날 밤’의 장소에 와있다.
귀옥, 변소와 잡초 밭, 언덕 쪽을 둘러보며…….
귀옥: 여기예요……. 처음에 여기부터 그 놈이 여자를 끌고 갔는데…….
자연스레 범인 역할이 되며 귀옥 뒤쪽에 서게 되는 태윤.
귀옥: 한 손은 칼을 들이 대고 있었구……. 다른 한손은 입을 막구…….
태윤: 이렇게? (귀옥의 입을 뒤에서 막아본다)
귀옥: (손으로 가리키며) 그런데 저쪽 편 길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가더래요…….
씬 64-8. 그날 밤.
밭 저쪽 편 길로 조그만 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다.
우비를 입은 40대 남자가 느긋하게 몰고 가는 자전거…….
범인의 손이 입을 꽉 막고 있는 가운데, 여자의 간절한 시선만 자전거 불빛을 쫓는다.
순간, 입을 막은 손을 스르르……. 떼어내는 범인! 여자의 입을 자유롭게 해준다.
범인: (나지막이) 소리 지르고 싶지?
여자: (덜덜 떤다)
범인: 그러나 못 지르지.
차분하고 싸늘한 범인의 목소리……. 입을 안 막았는데도 여자는 아무 소리 못 지르고 덜덜 떨기만 한다.
씬 64-9. 현재/언덕 아래.
마치 범인의 냉기를 생생히 느끼는 듯……. 소름 돋은 표정의 귀옥. 태윤 또한 굳어있는 얼굴이다.
귀옥: 그런데 입을 꽉 막고 있을 때, 범인 손이 말이죠…….
씬 64-10. 조금 전/언덕 집 방안.
여자: 딴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거 하나는 또렷하게 생각나요. 여자처럼 보드라운 손……. 내 입을 막은 손이 ……. 진짜 곱구……. 부드럽구…….
귀옥: …….
여자: (떨며) 어떻게 그런 고운 손으로 ……. 그런 짓을…….
씬 64-11. 그날 밤.
범인의 희고 보드라운 손이…….
언덕 집 여자의 맨살 어딘가를 스 -윽 훑어 올리는 소름끼치는 이미지.
씬 65. 달리는 차 속.
온몸에 소름이 돋은 듯, 창백하게 굳어있는 귀옥의 표정.
충혈된 눈빛으로 어둠속을 응시하며 엑셀레터를 밟는 태윤.
침묵 속의 밤길……. 태윤의 시점으로 국도 위 짙은 어둠속의 노란 중앙선이 보인다.
씬 66. 취조실 내부/복도.
화면 가득……. 밧줄에 거꾸로 매달린 조병순의 얼굴이 보인다.
잠을 못자 개기름이 흐르고, 피가 쏠려 시뻘겋게 된 괴이한 얼굴.
그 바로 옆으로 충혈된 눈빛의 박두만 얼굴……. 동그란 인주를 병순 눈앞에 들이 민다.
병순: 찍으면……. 진짜……. 자두 되나요?
두만: (끄덕) 빨리 찍고, 푹-자.
병순: 증말이죠?
병순, 거꾸로 매달린 채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빨간 인주에 꾹 누른다.
두만 반대편에 앉아 있는 조용구, 서류철로 받쳐 든 진술서를 내민다.
조병순의 빨간 엄지손가락이 조용히 진술서로 향하는데…….
순간, 벌컥 열리는 취조실의 문……. 서태윤이 들어온다.
진술서로 향하던 병순의 손을 덥석 움켜쥐는 태윤, 찬찬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어리둥절 쳐다보는 두만과 용구.
태윤의 시점으로 보이는…….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병순의 거친 손바닥…….
어둡게 굳어지는 태윤의 표정. 병순의 손을 놓고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태윤: (두만 보며) 손바닥이 완전히 거북이 등짝인데…….
두만: 뭔 헛소리야 또?
태윤: (용구를 향해) 이 아저씨 풀어줘…….
두만: 뭐라고?
태윤: (꺼꾸로 된 병순 얼굴 보며) 당신……. 범인이야?
병순: 네…….
태윤: 웃기지마. 당신은 범인이 아냐.
병순: 아……. 왜 이러세요……. 저 범인 맞아요…….
태윤: (용구 향해) 풀어주라니까!
두만: (폭발직전의 얼굴로) 잠깐 좀 나갈까?
조용히 태윤의 멱살을 잡는 두만……. 멱살을 거세게 뿌리치며 나가버리는 태윤.
씬 67. 강력반 사무실.
상기된 얼굴로 들어오는 태윤, 책상 앞에서 창백하게 앉아 있는 귀옥을 향해.
태윤: 거기……. 아까 그 진술 내용, 서류로 정리 해 줘. 하나도 빠뜨리지 말구!
귀옥: (정신 차리며) 네!
그 순간 따라 들어온 두만, 다짜고짜 태윤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거칠게 캐비넷에 패대기친다.
꺅-비명 지르는 귀옥……. 분노에 찬 두만이 폭풍처럼 태윤을 몰아친다.
따라온 용규, 조용히 밖을 살피더니 살며시 사무실 문을 닫는다.
두만: 재밌지? 막판에 또 재 뿌리는 게 그렇게도 재밌지, 이 개새끼야!
태윤: 이거 놔…….
두만: 씨발 놈! 니가 뭔데! (퍽) 다 잡은 범인을! (퍽) 니가 뭔데!
태윤: 나도 저 인간이 범인이면 좋겠어! 그런데 아냐, 아니란 말야. 저 인간은 아니라고! 알겠어?
둘의 거친 싸움에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귀옥.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꺼칠한 얼굴의 신동철 반장이 불쑥 들어온다.
문 앞을 막고 선 조용구와 코앞에서 마주서는 반장, 손에는 밧줄뭉치를 들고 있다.
반장: (밧줄 들어 보이며) 너지? 니가 조병순이 매달았지?
용구: 저 그게…….
반장: 이 개새끼! (조인트 까며) 너 요새 분위기 몰라? 이 미련한…….
순간, 반대편 구석에서 뒤엉켜있는 두만과 태윤을 보고 마는 신동철.
반장: 아니 이것들이…….
폭발과 동시에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신반장……. 말리려 달라붙는 용구…….
완전히 뒤엉키는 반장과 두만, 태윤……. 사무실이 돌연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하는데
귀옥: 저기 잠깐만!
그러나 흥분한 남자들은 점점 더 뒤엉켜 가기만 하고…….
귀옥: (찢어질 듯) 모두 조용!
유리가 깨질 듯이 소리치는 귀옥……. 그제서야 어리둥절 귀옥 쪽을 바라보는 남자들.
귀옥: 이거.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지지직- 라디오 소리. ‘화성군 태안읍에서 애청자가 신청해주신…….’ 등등의 DJ 멘트가 끝나며.
귀에 익은 멜로디<모짜르트 레퀴엠> 의 선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반장: 지금 나오는 거야? 생방송?
귀옥: (끄덕) !
순간 두만의 멱살을 풀고 후다닥- 창가 쪽으로 가는 태윤, 창문을 열어 젖힌다.
어느 새인가 내리고 있는 비 모두들 망연자실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는데…….
태윤: 반장님! 오늘 밤에 터집니다!
(장면 바뀌면) 반장과 권귀옥, 둘 다 다급한 표정으로 전화 수화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
반장: 전경 2개 중대만 풀어주십쇼! 다 정보가 있어서 그럽니다! 뭐라고요?
귀옥: 여보세요? 저녁의 클래식이죠? 급한 껀인데 임희철PD 좀 바꿔줘요……. 뭐요? 그만 둬?
태윤: (수화기 뺏어 들며) 거기 AD좀 바꿔줘 봐! 왜 그 키 작고 안경 쓴 애! 뭐? 같이 관뒀다구? 좋아 그럼, 어쨌건 지금 방송나간 곡 신청자 엽서, 그거 절대루 건들지 말고……. 여기 경찰서야! 뭐? 장난? 야 이 개새끼야! 야! 여보세요!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수화기를 던져버리는 태윤. 전화기가 부서질 듯…….
귀옥: 서 형사님, 방송국은 제가…….
외투를 걸치며 다급히 뛰쳐나가는 귀옥 너머로, 심드렁하게 앉아 있는 두만, 용구의 모습이 보인다.
태윤: 반장님, 병력지원은요?
반장: (전화 끊으며) 젠장! 남는 병력이 없대……. 죄다들 수원시내 시위진압 출동했어…….
씬 68. 어딘가.
조용히 빗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누군가의 손이 조그만 칼로 복숭아 껍질을 깎고 있다.
어둠 속에서 차분하게 껍질을 벗겨내는 하얗고 섬세한 손…….
씬 69. 농수로 주변/아침.
농수로 옆 둑방 길을 걸어가던 남자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다.
길옆 갈대 위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여자 팬티.
농수로 아래쪽으론, 상의는 벗겨진 채 두 손이 뒤로 묶인 여자시체가 보인다.
기겁을 해서 달려가는 남자아이, 등에 맨 책가방이 세차게 출렁거린다.
씬 70. 부검소.
또다시 여자의 시체 앞에 우두커니 모여선 반장과 형사들.
예고된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암울하고 절망적인 표정들이다.
두만: 안미선 28세. 수원시내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다가……. 당했습니다.
반장: …….
부검의: 잠깐……. 이게 뭐지?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한 듯, 조심스레 시체의 음부로 핀셋을 가져가는 부검의…….
조심스럽게 뭔가를 끄집어내는데……. 누런 반달 모양의 것이 나온다.
반장: 뭐야 그게?
부검의: 이거……. 복숭아 조각 아냐?
아연실색하는 형사들, 얼굴마저 창백해지는데…….
부검의: 더 있는데…….
가늘고 이상한 숨소리를 내뿜으며, 음부에서 계속 복숭아 조각을 끄집어내는 부검의.
복숭아 조각이 하나, 둘, 나올 때마다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가는 형사들의 얼굴.
금속 그릇 위에 다섯……. 여섯……. 일곱……. 복숭아 조각이 점점 쌓여 간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는 반장,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는다.
계속 움직이는 핀셋……. 마지막으로 복숭아 씨 부분이 나온다.
부검의: 전부……. 아홉 개.
완전히 창백해진 형사들…….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화면 가득 아홉 개의 복숭아 조각이 보인다.
씬 71. 부검실 앞 복도.
두만: 서울에서 이런 거 본 적 있어?
태윤: (도리도리) 처음인데…….
긴 의자에 걸터앉은 두만,<금연>표시 바로 아래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옆에 앉은 태윤은 고개를 무릎까지 푹 숙이고 찌그러져 있다.
두만: (한숨을 푹 쉬며)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애.
태윤: ?
두만: 이런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1거 같다.
옆에 있던 농협 다이어리를 펴더니, 그 속에 붙여진 사진들을 뜯어내기 시작하는 두만.
조병순, 백광호 그리고 동네 양아치들 사진이 차례차례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두만: 그 동안 헛짓만 했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윤, 조금씩 어깨가 들먹들먹 하기 시작한다.
두만, 의아한 듯 바라보는데…….
태윤: (고개 들며) 하하하…….
두만: ?
갑작스런 웃음에 어리둥절한 두만, 태윤은 손가락으로 두만의 운동화를 가리키며…….
태윤: 당신도 나이스였구만 나이스……. 엔 아이 씨 이.
두만: 뭐야 갑자기. (어이없는 듯, 피식) …….참 내……. 그러는 당신은? (태윤 신발 보며) 뭐야 이거? 아디다스? 체……. 아디다스 신었다고 재는 거야 지금?
태윤: (킥킥 대며) 하하하……. 자세히 좀 봐.
두만 얼굴 쪽으로 발꿈치를 슥 들어 보이는 태윤, 자세히 보면 adadis 라고 쓰여져 있다.
두만: 뭐야 이거? (푸훗) 아다디스?
태윤: 그래 아다디스……. 히히히! 형사 월급에 낸들 별수 있어?
두만: 우린 언제 나이키 한번 신어 보나……. 씨바…….
형사들이 시체실 앞에서 킥킥킥 웃고 있는 괴상한 풍경……. 순간 부검의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온다.
화들짝 웃음을 멈추는 두만과 태윤.
부검의: 전화 좀 받아봐! 서울이래!
씬 72. 서울 방송국 내부.
상기된 얼굴로 방송국 전화기를 들고 있는 귀옥.
화면 가득. 조그만 엽서 위로 또박또박 쓰여진 글씨가 보인다.
‘비 오는 날 꼭 틀어주세요. 신청곡은 모차르트 레퀴엠 1번. 태안에서 쓸쓸한 소년이…….’
귀옥: 서 형사님? 저예요. 엽서 확보됐어요! 이름은 박해일. 주소 불러 드릴게요. 화성군 태안읍…….
씬 73. 마을길.
귀옥의 목소리가 계속 깔리며……. 해일 집을 향해 달려가는 두만과 태윤.
집들 너머로 커다란 공장들이 보이는 마을길을 따라 빠르게 걸어간다.
두 사람의 낡은 운동화가 화면 앞뒤로 숨 가쁘게 교차 된다.
씬 74. 박해일의 방/내부.
비교적 큰 농가의 축사 한 귀퉁이에 별도로 붙어있는 쪽방. 텅 비어있다.
방에는 비키니 옷장과 간단한 가재도구들 뿐. 정리정돈이 깔끔하다.
집 바로 옆이 기찻길인 듯,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책상 위에 있는 소형 라디오를 보는 태윤, 라디오엔 커다란 네모 밧데리가 묶여있다.
두만: (앨범사진 내보이며) 이사람 지금 어디 갔어요?
주인: 공장 나갔지. 바루 요기 광신 제약…….
씬 75. 제약공장/내부.
복잡한 기계라인을 따라 움직이는 알약들…….수백 명의 공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반장쯤 되보이는 사람이 우렁차게 소리친다.
작업반장: 야! 해일아! 박해일이! 이리 좀 와봐라!
도주라도 예상한 듯, 반대쪽 출구에는 서태윤이 이미 막고 서있다.
공장 저쪽 편에서 얼굴이 하얀 청년하나가 따박 따박 두만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눈빛을 반짝이며 걸어오는 스무 살 남짓의 깔끔한 청년……. 박해일이다.
해일: 무슨 일이죠?
두만: …….
너무나 차분하고 반듯한 모습의 박해일……. 뚫어져라 바라보는 두만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본다.
씬 76. 취조실.
책상 앞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박해일.
그 맞은편으로 해일을 마주보고 앉은 태윤, 용구 그리고 반장까지…….
조용한 가운데 서로를 쳐다보는 해일과 형사들. 이상한 분위기다.
긴 정적을 깨고 갑자기 다가가는 태윤. 해일의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화면가득 박해일의 하얗고 가늘고 섬세한 손이 보여진다.
태윤: (만지며) 손이 아주 부드럽네……. 공장서 일한 진 오래 안 됐나봐?
해일: 작년 9월부터.
태윤: 9월? 작년 첫 사건 나기 직전이네…….
해일: (묘한 표정)…….
태윤: 그러니까 니가 군대 제대하구 이 동네공장으로 온 후부터……. 이 동네에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난 셈이란 말야. 그지?
해일: (빈정대듯) 말 되네요…….
해일의 시건방진 표정을 노려보는 용구, 무의식중에 얼굴이 꿈틀-한다.
두만: (해일 쪽으로 가며) 팔이 여자처럼 맨들맨들 하셔. 털도 없고…….
말 끝나기가 무섭게 확-해일의 바지를 움켜쥐는 두만.
해일: 뭐야? (뿌리치며) 이거 놔요!
그러나 완력으로 밀어붙여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내려버리는 두만.
순간……. 박해일의 그곳을 보고 놀라는 형사들.
두만: 이럴 줄 알았어……. 너 원래부터 털이 하나도 없어?
해일: (몹시 불쾌한 듯) 이 씨……. 군대 제대할 때 밀어버렸어요! (바지 올린다.)
두만: 왜?
해일: 말년 휴가 때 사창가에 갔다가 병이 옮아서……. 다 밀어버렸어요.
두만: 그래? 그럼 그때부터 여자들만 보면 다 더럽구, 보기싫구, 죽이구 싶구 그래?
해일: (피식) 체……. 말도 안 돼…….
해일의 빈정거림에 눈빛에 살기가 도는 태윤, 엽서를 꺼내 들이밀며.
태윤: 이 엽서 니가 보낸 거 맞지!
해일: 네.
태윤: 전에도 여러 번 보낸 적 있지?
해일: 네.
태윤: 비 오는 날 틀어 달라 그랬지?
해일: 네.
태윤: 그 노래 나올 때마다 여기서 여자 죽은 거 알지?
해일: 아뇨.
태윤: 몰라? 여기 방송기록 봐봐.
해일: 난 모릅니다.
두만: 그래? 좋아. 어제도 니가 신청한 음악 나왔지?
해일: 네.
두만: 라디오 들었지? 저녁의 클래식?
해일: 네.
두만: 그 프로 끝난 게 저녁 여덟시. 끝까지 들었어?
해일: 네.
두만: 계속 니 방에서 들었냐고?
해일: 네.
두만: 그럼 니가 신청한 노래 다음에 무슨 곡 나왔어?
해일: 몰라요.
두만: (버럭) 바로 어젠데 기억이 안나?
해일: (버럭) 기억 안 납니다!
태윤: (책상 꽝 치며) 기억 날 리가 없지! 넌 그때 집을 나갔으니까!
해일: (버럭) 집에 있었어요!
태윤: 어제 죽은 안 미선! 사망추정시간 저녁 일곱 시에서 일곱 시 반 사이! 넌 그 시간에 음악을 듣다 말고 뛰쳐 나간거야!
해일: 웃기지마!
참다못하고 책상을 꽝 걷어차는 조용구.
나뒹구는 책상, 그러나 박해일은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앉아 있다.
오히려 용구를 노려보는 해일……. 그러나 속으론 두려운지, 손끝을 파르르 떠는 것 같기도 하다.
해일: 때려, 때려봐…….
두만: 건방진 새끼! 너 조용히 안 해?
용구: 너 이 새끼 한번 죽어 볼래?
해일: 좋아 죽여! 당신네들 죄 없는 사람 잡아다 족치는 거, 동네 애들두 다 알아!
용구: (멱살 잡으며) 이 개새끼가…….
해일: 난 안 당해! 난 절대 안 당할 거라구!
반장: (용구 향해) 야 임마! 앉어!
반장의 불호령으로 잠시 찾아온 정적……. 모두들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다.
반장: 용구, 넌 좀 뒤로 빠져 있어.
용구: (폭발직전) …….
뒤로 물러나는 용구, 태윤은 쓰러진 책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태윤: 좋다. 박해일. 어제 그 프로를 끝까지 들었단 말이지……. 그럼 니가 신청한 레퀴엠이 끝났을 때, 디제이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봐. 디제이가 아주 인상적인 멘트를 했거든. 신청자인 니 얘기도 하면서 말야……. 끝까지 들었다면 그걸 기억 못할 리가 없지!
해일: …….
태윤: 들었으면 말해봐!
해일: (버럭) 기억 안 납니다.
태윤: 좋아……. 기억나게 해주지…….
갑자기 취조실의 형광등을 퍽 꺼버리는 태윤, 구석에 있던 카세트를 들고 와 스위치를 켠다.
책상위의 조그만 스탠드 불빛만이 태윤과 해일의 얼굴을 어슴푸레 비추는 가운데…….
모차르트 레퀴엠의 선율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태윤: 잘 들어봐. 바로 어제 ……. 넌 이곡을 들었다. 기억이 생생하지?
해일: …….
태윤: 밖에는 비가 주륵주륵 오고, 음악은 들려오고……. 서서히 흥분이 되살아났겠지. 이 음악만 들으면 니가 늘 하던 짓이 있잖아…….
해일: …….
태윤: 그 짓을 위해서라면……. 추운 날 비를 맞아두 좋구. 몇 시간씩 논두렁에 웅크리구 있어두 좋구……. 너한텐 그 모든 게 다 즐거운 거지? 그지?
해일: 집어 쳐요!
태윤: 니 손으루 쓰다듬을 여자들 살결만 생각하면……. 너무나 즐거운 거 아니냐고!
점차 고조되는 레퀴엠 선율처럼 태윤의 목소리도 점점 더 격앙되고.
태윤: 그러다 점점 더 재미가 나면……. 어제처럼 복숭아를 집어넣어 보는 거야……. 그지? 한 조각, 두 조각, 세 조각! 넷! 다섯! 여섯! 일…….
해일: (버럭) 그만해!
미칠 듯이 소리치며 카세트 내동댕이치는 박해일, 사라지는 레퀴엠 선율.
보고 있던 용구, 박해일 쪽으로 몸을 날린다.
용구: 이 개새끼 !
해일: 으악…….
반장: 불 켜!
스탠드가 부서져 완전한 암흑 속…….
조용구가 박해일을 짓밟는 듯, 해일의 비명소리와 책상, 집기들이 뒹구는 소리.
고함치는 반장과 두만의 목소리……. 암흑속의 아수라장.
태윤: 그만들 해!
씬 77. 화장실.
초췌하고 히스테릭한 표정의 반장, 벌서듯 서있는 조용구의 가슴께를 쿡쿡 찌르며…….
반장: 너 이 새끼야……. 내가 저번에두 한번 경고했지. 주먹 쓰지 말라구.
용구: …….
반장: 기자 새끼들 지금 사방에서 킁킁거리구 다녀, 너 옷 벗구 싶냐?
용구: …….
반장: 너 이거 관두면 뭐 할 건데? 이 무식한 놈아……. 너 뭐 딴 거 할 꺼 있어? 엉?
고개 숙인 용구, 울컥하는 기분을 억누르듯…….
반장: 앞으루 넌 취조실에 들어 가지두 마, 아무 도움이 안 돼.
냉정하게 말 끝내고, 휙 나가버리는 반장. 텅 빈 화장실에 홀로 남은 용구.
씬 78. 다방.
소형카세트의 스위치를 켜는 태윤. 취조 중에 녹음된 박해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부른 배를 안고 다방의자에 앉은 언덕 집 여자,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본다.
귀옥도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덩달아 불안하게 반응한다.
태윤: 잘 들어보세요.
언덕 녀: 이 목소리. (계속 귀 기울여 듣다가) 비슷한 거 같애요.
태윤: 확실하죠?
언덕 녀: 비슷한데……. (불안한 듯) 비슷하긴 한데……. 확실히 모르겠어요.
태윤: (다그치듯) 비슷하다 정도론 안돼요!
귀옥: 서 형사님!
태윤: 미안해요. 지금 힘드시죠. 하지만 계속 죽어나가는 여자들 생각두 해야지! 범인을 만나본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잖아…….
언덕 녀: (카세트 바라보며) 이런 소리루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씬 79. 취조실.
스탠드만 켜놓아 어두운 취조실. 수건으로 눈을 가린 박해일의 얼굴이 보인다.
해일 맞은 편의 서태윤, 옆으로 앉아 있는 언덕집 여자와 권귀옥의 모습도 보인다.
해일: (마지못해) 소리 지르고 싶지……. 그러나……. 못 지르지…….
태윤: 다시 해봐!
해일: 소리 지르고 싶지……. 그러나……. (화내듯) 뭐야 이게?
태윤: 너 했던대로 해보란 말야 이 자식아!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는 언덕집 여자, 그래도 판단하기가 어려운 듯, 어지러운 표정이다.
옆에 앉은 귀옥, 불안한 표정으로 언덕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더 이상 말을 안 하는 박해일, 수건을 묶은 채 고개를 슥 돌려 언덕집 여자 쪽을 바라본다.
해일: 임신 몇 개월째죠?
부른 배를 움켜쥐며 화들짝 소스라치는 여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태윤: 이 자식이! (박해일 눈앞을 막아서며)
해일: 지금 뭐 하는 거야 도대체? 웬 임산부까지 데려와서…….
태윤: 시끄러! 입 닥쳐! (느슨해진 수건을 다시 꽉 조인다)
공포에 질려 얼굴을 가리는 언덕집 여자를 취조실 밖으로 부축해 나가는 권귀옥.
귀옥: (중얼) 다들 미쳤어…….
씬 80. 강력반.
두만: 정말 미치겠네.
태윤: …….
두만: 니미……. 목격자 한 명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태윤의 얼굴이 (책상 밑 로우 앵글로) 보인다.
암담한 얼굴의 태윤, 문득 옆자리 두만이 신고 있는 ‘NICE' 운동화에 시선이 고정된다.
태윤: (중얼대듯) 광호…….
갑자기 벌떡 고개를 드는 태윤, 이마의 눌린 자국이 시뻘겋다.
태윤: 백광호…….
두만: 뭐?
태윤: 저기……. 이제 와서니까 내가 물어보는 건데……. 그때 왜 산에서 삽질하면서, 백광호가 이향숙 사건, 조목조목 얘기 하던 거 말야…….
두만: 근데?
태윤: 그때……. 정말 그거 광호한테 미리 교육시킨 거 아니었단 말야?
두만: 참내……. 정말 아니었다니까!
태윤: 그럼 어떻게 ……. 그녀석이…….
두만: 이상한 일이지…….
태윤: (벌떡 일어서며) 그 테잎……. 그 때 녹음했던 테잎 어딨지?
(장면 바뀌면) 소형카세트에서 재생되는 백광호의 목소리…….
야산에서 삽질을 하며 울먹이던 백광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다시 들려온다.
(광호): 스타킹……. 스타킹 벗긴걸루 또 ……. 꽉……. 조른다.
(두만): 그래 맞어! 스타킹. 두 번째 조른 게 스타킹이야……. (태윤 향해) 야-이 새끼 보기 보단 기억력이 좋네? 머리 좋아…….
문득 긴장감이 감도는 태윤의 얼굴, 카세트 속 백광호의 목소리는 계속되고…….
광호: 머리에 씌운다……. 히히.
두만: 뭘?
광호: 향숙이 빤스를……. 히히……. 빤스를 모자처럼 씌우더라구.
태윤: 말투를 잘 들어봐…….
광호: 맞어, 거들. 히히……. 그걸 향숙이 얼굴에다 쓱-덮어씌우던데…….
두만: 그리구선?
태윤: 지금 자기가 한 짓을 얘기하고 있는 게 아냐!
두만: 자기가 본 걸 얘기 하는 거잖아!
용구: 왜 그랬냐니까?
광호: 나야 모르지…….
두만: 백광호 이 자식…….
태윤: (일어서며) 광호가 목격자야!
씬 81. 광호네 고기집/초저녁.
고기집 문이 열리며 두만과 태윤이 황급하게 들이 닥친다.
두만: (둘러보며) 광호 어디 갔습니까?
광호아빠: ? (당황하며) 글쎄……. 좀 전까지 있었는데……. 오락실 갔나?
엉뚱하게도 가게 구석 쪽에는 조용구가 혼자 앉아 침울하게 깡소주를 먹고 있다.
두만: (용구 보며) 어디 갔나 했더니만……. 너 여기서 뭐 해 임마?
용구: ……. (침울한 얼굴)
태윤은 어느새 방 뽁으로 가서 이불장을 슬그머니 열어본다. 속엔 아무도 없다.
광호아빠: 광호한테 뭔 볼일 일라두? (몹시 불안한 얼굴)
두만: 아뇨, 아니에요! 그냥 잘 있나 궁금해서……. (태윤 귀에 대고) 일단 앉자구. 그냥 술 마시러 온 것처럼 하자. (용구 맞은편에 앉는다)
태윤: (조그맣게) 난 오락실하고, 동네 여기저기 좀 찾아볼게…….
두만: 오케이. (광호아빠 향해) 오늘 고기 좀 좋은 거 있어요?
광호아빠: 아 그럼요……. 제비추리도 있고……. 안창살도 좀 있고…….
어느새 깜깜한 밤. 식당에는 몇몇 손님들이 지글지글 고기 굽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은근히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는 두만, 잔뜩 취한 용구는 계속 소주잔을 들이킨다.
두만: 너 왜 그래? (나지막이) 적당히 마셔 새끼야…….
용구: …….
아까부터 식당 TV에서는 저녁 뉴스가 나오고 있는데……. 부천서 성고문 사건, 문귀동 형사 소식이 나온다.
수갑 찬 채 끌려가는 문귀동 모습, 재판정에서 성고문 사실을 부인한 사실 등등…….
다른 테이블의 술 취한 남녀, 뉴스를 보며 ‘저런 무식한 새끼……. 거시기를 짤라야 돼’ 어쩌구 중얼거린다.
시뻘건 눈으로 돌아보는 조용구. 남녀들은 옷차림으로 보아 한신대 학생쯤으로 보인다.
이쁘장한 얼굴의 여학생도 뻘건 얼굴로 담배를 물고 있다.
용구, 계속되는 문귀동 뉴스가 짜증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TV채널을 돌려버린다.
그러나 바뀐 채널 또한 저녁뉴스시간. 또 문귀동 뉴스가 시작된다.
짜증이 폭발한 용구, TV를 향해 난데없이 빈 소주병을 날린다.
정통으로 브라운관에 꽂히는 소주병. 펑-하고 터져버리는 브라운관…….
광호아빠의 당황스런 얼굴……. 두만은 짜증내며 용구의 뒤통수를 때리고…….
술 취한 남학생은 이들이 형사인줄은 꿈에도 모르고…….
남학생: 오우 아저씨! (엄지 내밀며) 화끈! 멋쩨이! 멋쩨이!
여학생: (담배 꼬나문 채 괜히 박수치는 시늉)
깝죽거리는 남학생 보고 슬그머니 일어서는 조용구, 그대로 워카발을 날려 테이블을 뒤엎어 버린다.
여학생의 비명이 터지고……. 오래된 테이블은 그 자리에서 박살나고 말리는 두만을 거칠게 뿌리치는 조용구. 뒹구는 남학생을 따라가며 짓밟기 시작한다.
여학생: 아- 악! 경찰 불러 ! 경찰!
조용구: (남학생 짓밟으며) 니네 둘이 했지……. 했어 안했어?
광호아빠,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하는데, 조용구는 미친 듯 날뛰며 식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용구를 제지하려 뒤쪽에서 달라붙던 두만, 문득 식당 출입구로 시선이 고정된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멍-한 표정의 백광호가 유리너머로 식당 안쪽의 아수라장을 지켜보고 있다!
두만: 광호야!
얼어붙은 듯 서있는 광호의 눈에는 정신없이 내려찍히는 용구의 워커발 만이 보인다.
악몽을 되새기듯 공포와 분노가 뒤범벅된 얼굴의 광호,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광호를 붙잡으러 달려드는 두만, 그러나 광호는 부러진 식탁 다리 하나를 집어 들고는…….
광호: 그- 만 - 해 ! (세차게 휘두른다)
남학생을 짓밟는 용구의 다리에 그대로 내리꽂히는 식탁다리.
식탁다리 끝에 길게 튀어나온 못이 용구의 발목 바깥쪽에 푹 -꽂힌다.
용구: 으악-
다리를 움켜쥐는 용구, 질겁하는 광호 아빠, 일순간 조용해지는 식당.
광호를 이글이글 노려보며, 두 손으로 테이블 다리를 잡아 박힌 못을 쑤-욱 빼내는 용구.
그제서야 겁이 덜컥 나는지, 조금씩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시작하는 광호…….
두만: 광호야 잠깐만!
광호, 겁에 질려 후다닥 뛰쳐나간다. ‘광호야’ 외치며 따라 나가는 두만.
씬 82. 마을길/참깨 밭.
밤안개가 낀 마을길을 따라 허겁지겁 달아나는 광호, 정신없이 따라가는 두만.
고깃집으로 돌아오던 태윤, 이 둘을 목격하고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어느덧 이향숙 사건이 났던 참깨 밭 근처에 이르러……. 두만의 손에 붙잡히는 광호.
계속 겁에 질려 허우적거리는 광호, 얼굴의 화상자국이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광호: (겁에 질려) 잘못했슴다! 잘못 햄다!
두만: 괜찮어! (헉헉) 괜찮다니까!
광호: 나 잡으러 온 거 아냐!
두만: 겁내지마 광호야……. 뭐 좀 물어보러 온 거다.
광호: (눈치 보며) 안녕……. 안녕하소! 히히…….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두만과 태윤을 살피는 광호……. 덜덜 떨고 있다.
두만: 좀 전에 그건 그냥, 없던 일로 하자! 쌈이 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
광호: (끄덕끄덕) ……. 나 죽일꺼야?
두만: (버럭) 뭔 소리야! 없던 일로 한다니까! 자, 지금부터 뭐 좀 물어볼게…….
광호: 으응……. (약간 진정된 듯)
두만: 너 말야……. 니가 좋아하던 향숙이 생각나지? 죽은 이향숙이 말야!
광호: (끄덕) 향숙이! 이쁘지!
두만: 그래 임마……. 너가 맨날 따라 다니던 향숙이. 너 그날 밤에……. 비 막 오던 날 밤에 말야. 여기서 이향숙이 죽는 거 봤지?
광호: (뭔가 생각하듯) …….
두만: 너 그날 밤에두 향숙이 졸졸 따라다니다가……. 범인이 이향숙이 죽이는 거 본거 아냐? 그렇지? 니가 다 본거지?
광호: 그거……. 그때 다 얘기 했잖아 (삽질하는 동작하며) 이거 하면서……. 헤헤.
두만: 그래 맞어. 근데 너……. 그때 향숙이 죽인 놈 얼굴을 봤어?
태윤: (다급하게) 범인 얼굴을 봤냐구!
뭔가 생각하듯 멍한 얼굴의 광호, 곧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두만: 정말 본거야?
광호: 번개 꽈광!
광호의 꽈광-소리와 함께 순간 그날 밤의 장면 인서트 된다.
비가 쏟아져 내리는 어둠속의 참깨 밭,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깻잎단 뒤에 숨어서 눈을 꿈뻑이고 있는 백광호……. 뭔가 보는 듯, 휘둥그런 눈동자.
태윤: 얼굴을 봤냐고! 얼굴!
광호: (끄덕) 세 번 봤어! 번개 꽈광! 꽈광! 꽈광! 그러면 얼굴도 번쩍! 번쩍!
다시 그날 밤 인서트. 향숙이의 목을 핸드백 끈으로 조르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
그 누군가는……. 박해일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또다시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관객에게 안보이지만)광호의 눈엔 ‘범인’의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태윤: 그 얼굴 정확히 생각나?
광호: 그래! 세 번! 얼굴 세 번 봤다!
두만: 정말이지?
광호: (끄덕) 잘 생겼다! 나보다 잘 생겼다!
덜덜 떠는 듯하면서도 또박또박 대꾸하는 백광호.
마침내, 두만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백광호의 눈앞에 들이민다……. 박해일의 선명한 얼굴사진이다.
두만: 니가 본 게……. 이 얼굴이야?
태윤: (떨리듯) 사진 잘 봐봐!
동그란 눈으로 박해일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광호……. 아무런 표정이 없다.
섬뜩함에 조금씩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슬그머니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버릴 듯 바라보는 형사들……. 이윽고 광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광호: (공포에 가득한 눈빛으로)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아?
태윤: ?
두만: 광호야……. 사진을 좀 똑바로 보…….
광호: (말 끊으며) 불이 얼마나 뜨거운데! (버럭 소리친다.)
더 이상 참지 못하는 태윤, 광호의 화상 입은 얼굴에 따귀를 날리며.
태윤: 정신 차려! (사진 들이밀며) 잘 좀 봐!
광호: 불이 뜨거워!
태윤: (악쓰듯) 사진을 보라니까!
잠시 표정이 흐릿하게 풀어지는 광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나…….
광호: 나 일곱 살 때, 누가 날 아궁이에 던졌는데…….
순간, 광호의 멍한 시선이 두만과 태윤 너머로 향한다. 광호아빠가 정신없이 달려오고 있다!
달려와 넘어지듯 다짜고짜 태윤과 두만을 붙잡고 늘어지는 광호아빠.
광호아빠: 아이구- 한번만 봐주십쇼. (울부짖듯) 우리 애가 워낙 정신이 …….
두만: 놔요 이거! 지금 그게 아니라니까!
순간 화들짝 달아나기 시작하는 백광호.
쫒아 가려는 두만과 태윤에게 완전히 엉겨 붙는 광호 아빠.
그러나 두 형사를 붙잡기엔 역부족……. 뿌리친 두만이 후다닥 광호를 쫒아가기 시작한다.
씬 83. 기찻길 주변.
두만: (주위 둘러보며) 백광호! 광호야!
점점 짙어진 밤안개 때문에 더더욱 보이지 않는 백광호의 모습.
이리저리 둘러보던 두만……. 문득 뚝방 위에 서 있는 광호를 발견한다. 그곳은 기찻길이다.
두만: 광호야! 거기서 뭐 해!
그와 동시에……. 안개 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불빛이 보인다.
철길 한복판에 서서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끄덕 거리는 백광호.
기찻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박두만…….
그러나 기차는 광호를 향해 더욱 빨리 돌진해 들어온다.
두만: 피해! 빨리 피해!
미친 듯이 달려가며 소리치는 두만, 그러나 광호는 가만히 두만 쪽을 보기만 할 뿐…….
기차의 앞머리는 광호를 향해 돌진하는데…….
광호는 두만을 향해 씨익 웃으며……. 자기 얼굴의 화상자국을 손으로 움켜쥐고 흔든다.
마치 일전에 두만이 광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또는 지겨운 화상덩어리를 뜯어내고 싶은 것처럼…….
순간…….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그대로 기차 앞머리와 충돌하는 광호의 몸뚱이!
코앞까지 달려온 두만의 얼굴에 핏덩이가 쫙- 끼얹혀진다.
처참한 순간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두만……. 동물 같은 신음소리가 몸속에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두만: 이……. 광호야……. 광호야…….
레일 옆에 덩그마니 나뒹굴고 있는 광호의 운동화……. 붉은 피가 묻어있다.
씬 84. 여관방.
여관방 욕실. 동그란 수채 구멍으로 피 섞인 수돗물이 졸졸졸 흘러내려간다.
쭈그려 앉아 두만의 피 묻은 옷을 박박 문질러 빨고 있는 설영, 근심스레 돌아보며…….
설영: 여기 이렇게 있어도 돼? 다들 찾을 텐데…….
두만: …….
설영: 요 옆 세탁소에 가서 옷 빌려다 줄까?
대답 없이 구석 쪽에 앉아 있는 두만, 고개를 푹 숙인 그늘진 얼굴……. 뭔가를 보고 있다.
마치 서로를 마주보듯, 박해일의 얼굴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두만.
미세하게 떨리는 두만의 충혈 된 두 눈……. 그리고 사진 속 박해일의 하얀 얼굴……. (디졸브 되면)
씬 85. 취조실.
화면 가득, 조용하고 싸늘한 박해일의 얼굴이 보인다.
맞은편에 앉은 서태윤이 조용히 해일을 노려보고 있다.
태윤: 우리들이 우습지?
해일: …….
태윤: 너 하날 어떻게 못해서 버둥대는……. 그런 우리가 웃기지?
해일: …….
태윤: 너 당장은 풀려날지 몰라도, 나한테서 도망갈 순 없어. 알겠어?
조용하게 서로를 마주보는 두 사람……. 폭발직전의 긴장감이 감돈다.
씬 86. 강력반.
조용히 경찰서를 떠나는 박해일의 모습이 강력반 창문을 통해 보인다.
창문가에 나란히 선 태윤, 두만, 용구……. 모두들 굳은 얼굴로 해일을 내려다보고 있다.
반장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신문에는 이런저런 비난조 기사들이 보인다.
유력 용의자 박군, 귀가 예정……. 확실한 물증 없고 목격자도 안 나타나.
갈팡질팡하는 경찰수사, 얼굴 없는 범인은 어디 있는가?
화성사건 과거 용의자, 달리는 기차에 투신자살.
경찰 조사 이후 정신 이상 증세, 고문수사 의혹 불거져.
반장: (수화기 들고) 예 예……. 그게 저 신문에 나온 거하곤 얘기가 많이 다릅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니구요……. 본부장님께두 지난번에 말씀 드렸는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런 개새끼가! ( 수화기 내려치며) 씹새끼! 좇도 윗대가리!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의 사무실, 다들 반장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데, 구석자리의 권귀옥은 자기자리의 전화 수화기를 품에 들고 난처하게 반장을 바라보고 있다.
귀옥: (수화기 들어 보이며) 반장님 저……. 국과수 전환데요…….
그러나 계속 광분상태인 반장, 미친 듯이 전화기를 내리찍는다.
귀옥: (조그만 목소리로) 저기……. 정액이 나왔대요!
반장: (힐끔) 뭐라고?
귀옥: 정액…….
씬 87. 국과수.
형광등 불빛아래 둥그렇게 둘러선 반장, 태윤, 두만, 용구의 얼굴.
최 박사: 그동안 피해자 질 내부에 정액이 소량 발견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말야, 늘 양이 적고, 피해자 질액이랑 뒤섞였기 때문에 제대로 판독을 할 수가 없었단 말야.
반장: 이번에는?
최 박사: 피해자 옷 한구석에 튄 정액방울을 찾아낸 거야.
정액 방울이 묻어있는 부분을 옷에서 오려낸 조각이 비닐봉지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형사들에게 보여주는 최 박사…….
최 박사: 이 미친놈이 시체에 복숭아 조각을 넣구나서, 마스터베이숀을 한 거라 이거지. 따라서 이건 백프로 확실한 정액이라구. 아무것두 안 섞였어. 유전자 분석 오케이야.
반장: 그럼 이 정액에서 나온 유전자 지문하고, 박해일이 유전자 지문하고 일치 하는 게 확인만 되면……. 게임 끝난다 이거지! 완벽하게!
최 박사: 그렇지.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물증이야. 근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 분석 장비가 도입이 안 되었거든. 유전자 지문 분석을 할 수가 없어요.
태윤: 어떡해요 그럼?
최 박사: 그래서 이 정액 샘플은 일본 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야 돼. 한 며칠 걸릴 거야. 일본서 유전자 분석이 끝나면 결과를 보내줄 꺼야. 며칠 푹 쉬면서, 일본서 편지 오기만 기둘리면 되는 거라구, 알겠나들?
두만: (한숨 쉬듯) 일본이라…….
씬 88. 국도변/차속.
국도변, 차가 고장 났는지 두만이 시동을 걸고 있고 반장, 태윤, 용구 등이 뒤에서 차를 밀고 있다.
조용구는 왠지 안색이 안 좋고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반장은 낑낑 차를 밀면서도 모처럼 기운에 찬 목소리다.
반장: 씨발 똥차……. (태윤 보며) 지금 박해일이 감시 철저하게 붙어있지?
태윤: 네. 교대로 24시간 감시 중입니다.
반장: 하여튼 이번엔 서두르다 망치면 안 돼. 박해일 그 놈 감시만 잘 하구 있다가……. 일본에서 유전자 결과만 날아오면, 물증 먼저 확보한 상태에서, 끝내버리자구.
부르르 시동이 걸리며 앞으로 나가는 차……. 후다닥 달려가 차에 올라타는 반장과 태윤.
그러나 조용구는 다리를 심하게 쩔뚝거리며 간신히 앞자리에 올라탄다.
두만: 너 다리 왜 그래? 병원 가봤어?
용구: 뭐 이런 걸루 병원엘 가, 남자가…….
두만: 어디 봐 (바지를 휙 들춰본다) 어!
못에 찔린 곳 뿐 아니라 종아리 거의 다가 초록빛으로 퉁퉁 부어있는 끔찍한 모습.
두만이 부은 곳을 툭 건드려보자 고통에 일그러지는 용구, 안색마저 잿빛이다.
용구: 광호한테 찔린 게 그게……. 녹슨 못이었나봐요…….
씬 89. 병원.
몹시 짜증이 난 노 의사의 얼굴……. 꼬장꼬장 대쪽 같은 성격이 얼굴에서도 느껴진다.
의사 뒷편으로, 침대에 누운 조용구와 그를 둘러싼 간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의사: (버럭 화내며) 미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게 뭐냐?
두만: 아니……. 정말 다리를 짤라야 되는 거예요?
의사: 안 그럼 쟤 죽어! 니네 파상풍 우습게 보지마!
두만: (황당하여) …….
의사: 녹슨 못에 찔렸으면 그 즉시 응급처리를 좀 하든가……. 이런 천하에 미련 쌍곰탱이 같은 새끼들 으이그…….
두만: 그래두 그렇지……. 다리를…….
의사: 그나마 다행이야! 무릎 밑에서 짜르니까!
너무나 어이가 없어 용구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는 박두만…….
간호사: 가족이세요?
두만: 저 친구가 가족이 없어서……. 제가 형은 형인데…….
간호사: 어쨌든 보호자시죠? 여기 수술동의서 읽어보고 서명하세요.
냉랭한 톤으로 말하며 서류를 내미는 간호사, 벌써 수술준비에 들어가는지 서두르는 노 의사.
고열과 식은땀에 휩쓸려 누워있는 조용구, 희미한 눈빛으로 두만의 얼굴만 계속보고 있다.
용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두만, 어이없는 눈빛에 조금씩 물기가 고인다.
씬 90. 강력반.
멍하고 초췌한 얼굴로 옆 자리 용구의 책상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두만.
텅 비어있는 용구의 자리가 도드라져 보인다.
물기가 그렁그렁한 두만의 눈에……. 용구 책상 밑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워커짝이 보인다.
태윤: 여보세요? 우체국이죠? 네, 경찰섭니다. 일본서 서류 아직 안 왔습니까? 그래요? 백프로 다 체크해 보신 거죠?
벽을 보고 앉아 다리를 떨며 초조하게 통화하는 서태윤.
순간 두만 책상의 전화벨이 울린다.
두만: 여보세요? (약간 당황한 듯) 어……. 그래……. 지금?
씬 91. 경찰서부근, 들판/해질녘.
저 멀리 경찰서 건물이 보이는 들판에 우두커니 서있는 두만과 설영.
여관방이 아닌 탁 트인 들판 위의 두 사람……. 왠지 생경한 느낌을 준다.
두만: 뭐야?(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웬일 인데?
설영: 왜? 난 좀 불러내면 안 돼? (얼굴 보며) 쯔쯔……. 꺼칠해 가지구……. 밥은 제때 먹어?
두만: (짜증스레) 밥 제때 먹는 형사가 어딨냐?
설영: 왜 자꾸 짜증이야?
두만: 요새 우리 박 터지는 거 몰라? 지금 이럴 시간이나 있는 줄 알어?
설영: 치, 잘났어……. (중얼) 범인은 잡지두 못하면서…….
두만: 뭐라고?
설영: (아차-하는 표정)
두만: 너 말조심해! 그러는 넌, 언제까지 그 야매주사나 찔르구 다닐 거야? (괜히 흥분) 그 짓해서 얼마나 떼돈 벌겠다구. 야밤까지 이집 저집 들락거리구. 니가 무슨 안마사야? 다방 레지야?
설영: (발끈) 말 다했어?
두만: …….
두만을 노려보는 설영,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 쇼핑백을 두만에게 휙 내민다.
설영: 자……. 이거나 챙겨.
두만: 뭐야 이게?
설영: 저번에 니 옷. 핏자국 없애느라구 죽는 줄 알았다.
대뜸 돌아서서 가버리는 설영. 두만이 종이백 속을 보며 핏자국이 사라진 깨끗한 남방이 보인다.
미안한 기분이 드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설영을 따라가기 시작하는 두만.
따라오는 두만의 발소리를 들으며 얼굴에 슬쩍 웃음기가 감도는 설영.
두만이 바로 옆으로 따라 붙자 화난 척 다시 얼굴을 굳히며 더 빨리 걸어간다.
두만,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지 앞서가는 설영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두만: 야, 잠깐……. 나 좀 봐…….
설영: ……. (계속 외면한다)
두만: 내 얼굴 좀 보라니까…….
뭔가 어색한 박두만의 대사에 웃음이 풋- 나와 버리는 설영. 손목을 잡힌 채 두만과 마주본다.
막상 마주서자 쑥스럽고 어색한 듯, 손을 놓으며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두만.
설영은 두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설영: 누워봐.
두만: 뭐? (당황)
설영: (두만의 팔 잡으며) 여기 좀 누워 보라니까…….
(장면 바뀌면) 붉은 저녁 햇살을 받은 채, 홀로 서있는 못생긴 나무.
나무에 링겔병 하나가 걸려있고, 나무 아래에 기대앉은 박두만의 팔에 주사바늘이 꽂혀있다.
늦겨울 썰렁한 들판에서 링겔을 맞는 황당한 풍경…….
설영과 어깨를 대고 나란히 앉아 있는 두만은 모처럼 편안한 모습이다. 그러나 붉은 저녁놀을 바라보는 두만의 복잡한 얼굴에는 떨칠 수 없는 불안감이 깔려있다.
씬 92. 병점 기차역 주변.
계속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태윤의 충혈 된 눈.
차 속에 앉아 엿보고 있는 태윤의 시선을 따라가면……. 저 멀리 술을 먹는 박해일의 모습이 보인다.
병점 기차역 주변……. 낡은 술집들과 치킨 집, 포장마차 등을 마다하고 구석진 구멍가게 평상에 홀로 앉아 술을 먹는 박해일의 모습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긴다.
가게에서 나오던 동네 여인 두 명, 박해일을 힐끗힐끗 쳐다본다.
그러다 해일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피하는 여인들……. 뭔가 쑥덕대며 멀어져 간다.
(시간이 경과된 듯) 밀려오는 졸음에 잠시 눈꺼풀이 내려온 태윤.
화들짝 눈을 뜨면, 어느새 술을 먹는 박해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당황하여 사방을 둘러보는 태윤…….
길 반대편 버스 정거장 앞에 비닐 봉지를 들고 반듯하게 서있는 해일을 발견한다.
안도하는 태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자 올라타는 박해일.
차에 시동을 거는 태윤. 그러나 그르렁- 그르렁- 소리만 날 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해일을 태운 버스는 멀어져 가는데, 차는 계속 시동이 걸리지 않고…….
태윤: 젠장! (무전기 켜며) 이봐……. 지금 박해일 집 쪽에 잠복한 인원이 누구지? 뭐라고? 연결되나 지금? 빨리!
씬 93. 강력반.
태윤: (전화 끊으며) 반장님, 지금 박행일이 두 시간째 집으로 안 들어오고 있답니다. 버스 탄데서 그 놈 집까지 다섯 정거장……. 이 놈이 중간 어디선가 내린 겁니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된 태윤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안절부절 곤두선 모습이다.
반장: 진정해. 조사 받다 풀려난 눔이 설마 뭔 일을 저지르겠어?
태윤: 그 놈은 우릴 엿 먹이고도 남을 놈이예요! 애초부터 미친 놈이라구!
반장: 조용히 좀 해! 니가 미친 놈 같애!
태윤: …….
반장: (진정하며) 자, 자……. 조금만 기다리자구. 쉽게 생각해. 어차피 일본서 유전자 결과만 나오면, 그 녀석은 그걸루 끝나는 거야.
태윤: (중얼대듯) 내가 그 녀석을 놓치다니……. 내가…….
애써 진정시키려는 반장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태윤은 계속 안절부절……. 폭발직전의 모습이다.
반장: (버럭) 그만 좀 해! 나까지 불안하잖아!
태윤: 예감이 안 좋아요 반장님…….
씬 94. 읍내 약국.
전형적인 시골 약국……. 약사가 건네주는 링겔병을 받아 가방에 챙겨 넣고 있는 설영.
약사: 오밤중에 어느 집엘 또 가? 완전 돈독 올랐나벼…….
설영: (한숨 쉬며) 그러지 마요……. 보경이네 엄마 일 갔다 와서 또 쓰러졌데.
약사: 으이그……. (웃으며) 보사부 표창은 언제 받을껴?
피곤한 얼굴이지만 약사에게 씩-한번 웃어주는 설영, 가방을 메고 나간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설영의 뒷모습이 약국 유리창을 통해 보인다.
씬 95. 원바리 고개 부근.
누군가의 시점 화면……. 어두운 솔밭 사이로 걸어가는 카메라…….
가는 숨소리와 함께 수풀을 조심스레 헤치는 검은 손의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이윽고 좁은 언덕길이 잘 내려다보이는 지점. 굵직한 나무 뒤에 멈춰서는 검은 그림자.
차분하게 아래쪽 언덕길을 응시하는 검은 그림자……. 박해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이윽고……. 좁은 언덕길로 지나가는 한 여자의 그림자……. 곽설영이 보인다.
살며시 설영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검은 그림자.
나무사이로 풀잎사이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침착한 발걸음.
검은 그림자와 설영의 거리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순간, 설영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교복 입은 여자아이. 김소현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곽설영과 김소현을 번갈아 바라보는 시점화면…….
마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듯…….
스치듯 교차하는 설영과 소현,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순간…….
어느덧 검은 그림자의 시선이 서서히 소현 쪽으로 향한다!
가뿐한 걸음걸이로 고갯길을 걸어가는 소현. 어둠에 휩싸인 주변은 조용하기만 한다.
별이라도 보는지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어가는 소현, 하양 입김을 뿜어낸다.
순간, 찰나 같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는 소현.
순식간에 다가온 검은손이 소현의 목을 감고 ……. 입을 막는다.
소스라치듯 놀라며 몸부림 쳐보는 소현, 기적같이 그림자의 손길을 뿌리치는데…….
어느새 따라온 그림자의 손이 소현 등에 맨 가방끈을 턱- 붙잡는다.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소현의 입을 틀어막는 검은 그림자.
그 순간 어이없게도 애-앵하는 싸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멀리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화관제 훈련 안내 방송이다.
소리: 지금부터 제 287차 민방위 훈련, 야간등화관제 훈련 생방송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현재 훈련 경계경보 발령과 동시에……. 각 가정과 상가, 관공서 등에서는…….
씬 96. 읍내 어딘가.
누군가 자기 집의 커튼을 닫는다. 깜깜해지는 화면.
그 위로 계속되는 등화관제 훈련 방송 소리……. 직직 찢어지는 스피커 소리처럼 터져 나오고.
씬 97. 숲속.
소현의 두 손목을 뒤에서 스타킹으로 꽁꽁 묶는 그림자의 손……. 능숙하고 침착한 손의 움직임.
소현의 버둥거리는 두 다리를 같은 스타킹으로 한데 연결하여 묶는다.
두 손목과 두 발목이 하나의 스타킹으로 묶여지며, 조그만 몸이 활처럼 뒤로 휘어진다.
씬 98. 읍내 어딘가.
싸이렌 소리 계속되고……. 누군가 방 안의 전등을 끄려는 모습이 창문 실루엣으로 보인다.
툭 꺼지는 불빛. 화면은 어둠 속에 잠긴다.
씬 99. 숲속.
손과 발을 한데 묶은 스타킹 부분을 잡고 마치 가방을 어깨에 메듯이, 소현을 둘러멘 검은 그림자.
몸이 활처럼 뒤로 휜 채 그림자의 어깨에 매달려 숲속으로……. 숲속으로……. 멀어져 가는 소현.
멀리 뒷모습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는 박해일 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씬 100. 읍내 어딘가.
읍내의 어느 건물, 몇 개의 창문들이 하나, 둘, 불이 꺼져간다.
어둠속에 잠기는 읍내. 암흑으로 변해간다.
씬 101. 숲속 언덕 위.
묶인 채 눕혀진 소현, 덜덜 떨면서도 크게 뜬 눈동자가 조금씩 그림자의 얼굴 쪽으로 향한다.
검은 그림자는 소현 옆에 가만히 앉아 조용히 소현을 바라보고 있다!
공포에 휩싸인 소현의 눈동자가……. 검은 그림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둘은 잠시나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검은 그림자, 이윽고 스타킹을 손에 쥐더니 차분하게 소현의 목으로 다가간다.
닥쳐온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도 느끼는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려보는 소현의 작은 몸.
양말로 재갈을 물린 입에서 간신히 토해져 나오는 실날 같은 목소리.
소현: (울먹이듯) 아빠…….
그러나 아무런 동요 없이……. 차분하게 소현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는, 악마 같은 손.
멀리 보여지는 읍내의 불빛들. 소현의 목숨이 사그라지듯, 불빛들이 하나씩 하나씩 꺼져간다.
어둠 속에 잠겨 가는 온 천지……. 지직대는 민방위 방송과 레퀴엠의 코러스가 뒤섞인다.
씬 102. 동/시간경과.
조용한 숲 속. 싸늘하게 식은 소현의 작은 몸 위로 교복상의가 덮여져 있고,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 문득 소현의 가방 속을 뒤지기 시작한다.
필통을 열어보더니 그 속에서 모나미 볼펜 하나를 꺼내는 손.
옆에 있던 연필깎이 면도칼도 살며시 끄집어낸다.
툭……. 투툭…….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는 가늘고 흰 손……. 그 속에서 숟가락 포크를 꺼낸다.
무겁게 암전되는 화면……. 빗소리만 세차게 들려온다.
씬 103. 같은 장소/다음날 아침.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 찢어지는 듯한 고함소리, 지옥 같은 웅성거림…….
온갖 소리들이 불규칙하게 뒤섞이는 가운데…….
망연자실 서있는 박두만의 얼굴 위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빗줄기 속에서 담뱃불을 붙이려 계속 성냥을 그어대는 두만.
불은 계속 붙지 않고 두만의 손끝은 계속 떨린다.
그런 두만의 앞뒤로 우루루 몰려가는 군청색 우비의 전경들……. 달려가는 감식반원들…….
마침내 담뱃불을 붙이는 두만, 떨리는 입술로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그 와중에도 시선을 계속 한군데에 고정되어 있는 두만…….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땅바닥에 누워있는 소현의 조그마한 몸뚱이를 보고 있다.
미세하게 떨리는 두만의 눈빛이 저쪽에서 다가오는 서태윤의 얼굴로 향한다.
잠시 마주보는 두만과 태윤. 서로 아무런 말이 없다.
감식 반들이 소현의 사체 주변을 빽빽이 둘러싸고 감식을 시작하고 있다.
본능처럼 터벅터벅 사체 쪽으로 다가가는 서태윤.
감식반1: (침착하게) 가슴에……. 면도칼로 그은 자상이……. 전부 십구회. 그리고…….
소현의 거들을 벗겨 내리는 듯, 손을 움직이는 감식반2.
거들을 벗겨 내린 순간, 사체 주변의 모든 사람들……. 일순간 고개를 외면한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같은 신음소리.
감식반 2: 음부에 모나미 볼펜하나……. 포크와 같이 꽂혀있음…….
소형 녹음기에 사체상태를 기록하며, 증거물을 비닐 팩에 집어넣는 감식반.
조그만 비닐 봉투에 피 묻은 숟가락 포크가 쑥 들어간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두만.
흔들리는 눈빛……. 그의 시점으로 보이는 사건 현장은 지상에 펼쳐진 생지옥과 같다.
우르르르…….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귓가에 윙윙거리는 가운데…….
한 초짜 순경은 소나무를 붙잡고 힘겹게 구토를 하고 있고, 소현의 엄마는 제지하는 순경과 실랑이를 벌이며 피울음을 토하고 있고.
내무부 장관과 경찰 고위간부, 지역구 국회의원쯤으로 보이는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수행원들이 받쳐주는 우산 아래 늘어서서 뒷짐을 진 채 뭔가 쑥덕대고 있고…….
소현의 조그만 몸뚱이 위로 빗방울을 계속 떨어지는데…….
태윤의 시선으로 , 소현의 뒷허리에 아직도 붙어있는. 자신이 붙여준 반창고가 보인다.
반창고를 슬며시 떼어보는 감식반의 손길…….소현의 연약한 살갗이 반창고를 따라 찌익-당겨 올라오고…….
충혈 된 태윤의 눈빛이 그 순간 걷잡을 수없이 허물어진다.
문득 감식반들 틈을 뚫고 들어가는 태윤, 자신의 점퍼를 벗어 소현의 몸 위에 덮어준다.
깜짝 놀라 바라보는 감식반들……. 황당하고 어이없는 표정이다.
감식반 1: 당신 뭐야?
감식반 2: 뭔데 현장을 훼손해?
대꾸도 않고 뒤로 돌아 터벅터벅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서태윤.
물기 어린 눈빛에 서서히 살기가 돌기 시작하며, 걸음도 점점 빨라진다.
인간의 눈빛이 아닌 박두만 또한 저벅저벅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원바리 고갯길 언저리, 한 의경이 다급히 박두만 쪽으로 다가간다.
두만을 잡아 세우며 뭔가 이야기하는 의경의 모습이 멀리서 잡은 화면으로 보인다.
씬 104. 박해일의 집.
다짜고짜 박해일의 방문을 열어젖히는 태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제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맨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박해일.
속이 쓰린 듯 얼굴을 찌푸리며 인기척에 부스스……. 고개를 든다.
해일: 뭐야?
해일의 얼굴을 향해 대뜸 발길질을 날리는 태윤, 짐승 같은 눈빛이다.
입에서 피 흘리는 해일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는 태윤.
씬 105. 박해일 집 뒤편/기찻길.
미친 듯이 해일을 몰아치는 태윤……. 비틀거리던 해일, 기차레일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비 내리는 기찻길에서 무자비하게 해일을 짓밟는 태윤.
태윤: 진작 널 죽였어야 됐어! 진작!
해일: 이 씨팔…….
쏟아지는 빗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박해일, 피와 빗물과 흙이 뒤범벅된 얼굴이다.
무릎 꿇은 자세로 태윤을 올려다보는 해일의 무서운 눈빛.
그런 해일의 얼굴에 총을 꺼내 들이대는 태윤,
장명길 (남 35세) <가든숯불갈비집>의 사장. 마마보이. 걸핏하면 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