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리굴비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한다. 기름지면서 고소하고, 짭조름하면서 바삭하고 딱딱한 식감이 일품이다. 얼음 띄운 차가운 녹찻물에 밥을 말아 결대로 찢어 놓은 보리굴비 한 점씩을 입안에 넣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분이 든다. 보리굴비는 조리 과정이 복잡하고 오랜 시간 공력을 들여야 완성되는 음식이라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 먹을 때마다 행복감을 주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이다.
나는 보리굴비를 먹을 때 굴비의 눈을 유심히 본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박제되어 굳은 듯 부릅뜨고 있는 굴비의 눈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 굴비의 눈은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그물에 잡혀 배로 끌어올려지던 시간의 고통과 억울함을 담고 있다. 또 한편으로 ‘내 살을 내어줄 테니 당신은 건강하고 행복하시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나라 가곡 중 ‘명태’라는 노래가 있다. 검푸른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던 명태가 어부에게 잡혀 가난한 시인의 늦은 밤 술안주가 되어 그의 시가 된다는 노래이다. 아마 ‘명태’를 작시한 양명문 선생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가사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신의 생을 내게 바친 굴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살점 하나까지 싹싹 발라 맛있게 먹는다.
모든 존재는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으로 살아간다.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 암탉 ‘잎싹’은 족제비 ‘애꾸눈’에게 “날 먹어, 니 아기들 배고프지 않게”라고 말하며 스스로 먹이가 된다. 대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다. 어떤 존재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를 취해야 한다. 비록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약자는 형체가 사라질지라도 또 다른 몸의 일부가 되어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에는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 있지만 조용히 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이나 조직의 발전을 이끄는 사람도 있다. 돋보이는 사람과 밑거름이 되는 사람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돋보이는 사람은 ‘영웅’이라 불리고, 밑거름이 되는 사람은 ‘그림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상은 ‘영웅’이 이끌어 가지만, 영웅은 ‘그림자’ 없이 탄생할 수 없다. 즉 세상은 영웅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할 때 굴러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어떤 존재이어야 할까?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처럼 교육자는 보다 높은 수준을 갖추고 배움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지식과 삶을 가르쳐야 한다. 더 많은 공부와 수양과 헌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키워내는 것이다. 훌륭한 교육자는 올바르고 참된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힘든 인내와 희생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가르침을 받고 누군가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스승은 있다. 영웅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영향을 받아 현재의 존재가 되었다. 교육자는 누군가의 정신과 혼이 되고 지식과 역량이 되는 밑거름을 주는 사람이다. 굳이 인간의 사회화 과정 이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교육자이다. 교육자는 권력을 쥔 정치인이나 돈을 가진 재벌이나 인기 있는 연예인처럼 돋보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키워 영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육자는 자신을 버리고 남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교육자가 올바로 설 때 이 땅에 더 많은 영웅들이 탄생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