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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10
11월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연중 제3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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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번 주간 내내 첫번째 독서로는 지혜서가 봉독됩니다. 이 책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서 9장 5~6절)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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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용서만이 죄를 없애는 힘이다>
박보영 목사는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다 키워준 훌륭한 분입니다. 목사님이 길거리 아이들을 거두어들일 때 그들이 입던 옷을 버리지 않고 비닐봉지에 잘 보관한다고 합니다. 이발하고 씻기고 새 옷을 입히면 아이들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규칙적인 기도와 공부, 그리고 단체생활은 다시 옛날의 자유로운 길거리 생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씩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할 때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예전 옷을 한 번만 입어보라고 건네집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냄새가 밴 그 옷을 집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입혀봅니다. 그리고 그들보고 가지고 나가서 태우라고 합니다. 그 옷을 태우고 온 아이들은 몇 번이고 샤워를 하면서 몸을 씻는다고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죄가 없어졌을 때의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계속 죄인의 냄새를 풍기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깨끗해졌을 때의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할까요? 죄 없을 때의 행복을 느끼면 다시는 죄로 돌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 오물 냄새로 가득 찬 옷을 다시 입을 수 있겠습니까. 질책과 용서 중, 죄를 용서하는 힘은 용서에서 나옵니다.
질책은 매서운 바람과 같아서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더욱 반발심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듯한 용서만이 무거운 코트를 벗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쓰시는 방법이 용서이고 사탄이 쓰는 방법이 질책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은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가죽의 주인은 당신 아들 예수님입니다. 아드님의 껍질을 벗겨 우리를 입혀주시며 우리가 더 이상 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고 당신 몸을 십자가에 기꺼이 우리 죄를 위해 봉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믿고 더 이상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렇게 죄에서 벗어납니다.
반면 사탄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목소리로 부르실 때 나무 뒤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죄를 감추기 위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는 수고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노력으로 죄가 없어진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나무에게 피해를 입히는 아무 쓸모없는 행위만 했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짓는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그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하셨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 없어집니다. 자신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남을 판단하는 일도 없어지고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다른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 앞에서 그녀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죄책감을 조장하는 바리사이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 때문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시며 오직 용서만이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자비만이 죄를 이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들이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꼬집으십니다. 그들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며 남을 죄짓게 하지 않으려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꾸짖으라는 말은 질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죄를 계속 지으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려주는 예언자직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질책은 상대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불편하여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게 해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용서를 통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이 되어야만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셨음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생명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성체성혈을 상징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을 때에만 그분의 힘으로 용서가 가능하고 그러면 세상의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만이 용서로써 이웃의 죄가 사해짐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웃을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용서만이 다시 옛 죄를 입지 못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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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7,1-6 :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죄라는 것은 무엇인가? 죄는 비열하고 불쾌한 행동,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화내고 모욕하고 모함하고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짓들이 죄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로 부터는 어떤 악한 것도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분은 모든 덕의 원천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신자들을 유혹에 빠지게 하고, 조심스러운 이들을 피곤하게 하며, 조심스럽지 못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모든 일을 어지럽히고,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다. 죄짓게 하는 일이 있어서 죄가 생겨나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일이 곧 죄이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야고 3,2) 실제로 우리는 많은 잘못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부자 이야기에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그때마다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어 나쁜 습관이 굳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동시에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 것 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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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부산교구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신학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스칸달론’, 영어로는 ‘스캔들’인데, 이 구절을 좀 더 분명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들을 통하여 스캔들이 오는 자(스캔들을 일으키는 자).’
여기서 스캔들이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일종의 ‘걸림돌’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걸림돌을 놓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믿음이 약한 이들은 스캔들에 쉽게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오늘 지혜서가 이야기하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죄를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회개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다정한 영”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식별과 “다정한 영”을 바탕으로 하는 용서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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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형제애>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3ㄱ)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고, 형제애 실천은 신앙인의 본분이고 의무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본분을 다하지 않은 죄와 남의 구원을 방해한 죄.
1) 유혹 - 남이 구원받는 것을 방해하는 일 가운데 첫 번째는 ‘유혹’입니다. 자기 혼자서 죄를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고, 자기는 뒤로 빠져 있으면서 죄가 되는 일을 하도록 다른 사람을 부추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죄를 짓도록 남을 유혹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2) 잘못 가르치는 일 - 성경이나 교리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것으로 남을 가르쳐서, 결국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도 큰 죄입니다.
3) 방관 -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을 방관하는 것도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됩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일을 구경하기만 했는데, 그들은 모두 살인죄의 공범이기도 하고,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지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거나 남의 일이라고 구경만 하는 것은 모두 죄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는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대단히 큰 죄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에는, 본의 아니게, 또는 무의식중에 그런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유혹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유혹이 되는 경우도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리를 잘못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말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를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만일에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서 그 형제가 또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그 죄에 대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심판을 받겠지만, 그를 용서하지 않은 나는 ‘남을 죄짓게 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나 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조건 참기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꾸짖어야 한다면 꾸짖고, 타일러야 한다면 타일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꾸짖는 일과 타이르는 일과 용서하는 일은 모두 형제가 다시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한 일이고, 그래서 그 형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은 ‘형제애 실천’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용서’는 나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형제의 구원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그럴 때에 해결책은 ‘기도’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어라.”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용서가 안 되는 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고, 도저히 회개시킬 수 없을 것 같은 그 형제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은 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생각되더라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믿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받는 것은 이제 틀렸다.”라고 자신의 구원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바로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가족이, 친구들과 친지들이, 교회 공동체가, 천국에 있는 이들이, 주보성인이, 수호천사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모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나 자신’뿐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혹시라도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지었더라도, 또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서 원한을 품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영영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권한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이미 끝났다.” 라고 선언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스스로 용서와 구원을 받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구원의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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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만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지금 당장 들어주시는 분인데 마치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저희 누나가 제 조카와의 대화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저희 누나가 조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무조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한다면, 하느님이 들어주시겠니? 그렇지 않아. 최선을 다 하고 하느님께 맡긴다면 기도를 들어주시겠지만 그렇지 않고 노력 없이 들어 달라고 떼만 쓴다면, 그 기도는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그러자 제 조카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노력 하지 않아도 의심 없이 진심을 다해 믿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데, 인간은 늘 의심이 많기에 기도를 진심을 다해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고생고생하면서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어요. 의심 없이 진심을 다해 기도하면 하늘에서 돈도 떨어질 거에요”.
이러한 질문은 아마 누구나 해봤음직한 질문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기도에 바로바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부재와 기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모두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을 정리하자면, 기도의 범주 안에 인간의 영역과 하느님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이란, 제 누나의 의견대로 인간이 어느 정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이를테면 시험, 취업 등등의 문제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반드시 인간의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되 하느님께서는 이 노력을 배로 불려주십니다. 시험 혹은 면접 때보다 안정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는 평안함,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등등의 은총은,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어우러질 때 큰 효과를 드러냅니다.
반면,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죽음 앞에서의 존재론적 고통, 인간의 감정에서 나오는 슬픔과 좌절, 자연재해로 발생하는 사건 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녀의 문제 등등이 이 영역에 위치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전적으로 기도와 신앙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 때에 확실하고 항구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리라는 비유는 인간의 ‘죄와 용서’에 대한 권고의 뒤에 위치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와 용서’가 인간의 영역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인이 죄짓게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엄하게 경고하시며 동시에 형제의 죄를 용서할 것을 권고 하십니다. 즉,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수를 미워하고 원망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자책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마음의 평화를 구하지만 정말로 그를 용서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결심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한편 여기에 확실한 노력과 신앙이 뒤따른다면, 무화과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기듯 마음의 평화와 원수와의 화해는 분명 주어질 것입니다.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나무가 언제 어떻게 바다로 옮겨질지에 대해 예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즉, 기도가 이뤄지는 시간과 방식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 순간에 나무가 바다로 옮겨질 수 있지만,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나무의 씨앗이 바다에 움트고, 그 씨앗을 제공한 본래의 나무는 사라지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의심이 피어나고 신앙은 희미해집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애쓰며 그 결실을 항구한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이뤄질 시간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 마음을 접어버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 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을 감내하느니 고민을 뒤로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손 쉬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성과 시간을 쏟은 어머니의 음식이 간단하고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보다 훨씬 맛있고 영양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정성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봐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영역이든 하느님의 영역이든 이 두 가지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방식대로 기도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그 와중에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안에 주님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의 신앙을 채찍질합니다.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욱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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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주로 자신의 죄를 부여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카 17, 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자신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사랑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형제들이 죄짓지 않도록 하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교정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 3)
이는 ‘형제’를 향한 시선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입니다.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사랑으로 꾸짖고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루에 일곱 번 잘못을 저지르고 변덕을 부린다 하더라도 언제나 용서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피해의식과 침해당한 아픔에 빠지면, 타인이 잘못하여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여기게 되고, 자신은 용서해야 할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사실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자신이 용서를 청했어야 할 일입니다.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에게 ‘먼저 용서를 청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는 그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 5)
사실,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 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의 물량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진정한 믿음, 곧 순수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으라고 말입니다.
형제를 꾸짖더라도 사랑으로 꾸짖고,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입고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믿음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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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루카17,1-2)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와 “남을 죄짓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두 문장의 차이를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오늘 말씀의 첫 문장인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우리의 삶은 남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게끔 되어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는 것이지, 반드시 남을 죄짓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어번역본을 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죄를 짓게 하는 일들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다.” (Things that cause sin will inevitably occur.) 다시 말하면 남들에게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죄짓게 하는 상황은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 굴복해서,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이들은 불행하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차라리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무서운 말씀까지 덧붙이신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쉽게 생각하자.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지은 죄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은 죄도 그 죄는 서로 연결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 죄로 인해서 타인마저 죄에 빠지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직접적으로 타인을 죄짓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둘 모두 내 죄에서 비롯된다. 결국, 내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이 아닐까? 나만 죄를 짓고 죄값을 치르겠다는 어설프게 숭고한 척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지은 죄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죄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도 죄를 지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생겨난 죄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주실 것을 믿는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참되게 뉘우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죄를 짓게 하는 상황은 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기도를 통한 자기 싸움밖에 없다. 기도해야 한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 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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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늘로 채워지는 마음….>
‘인격의학’의 창시자인 폴 투르니에 글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악성빈혈로 고생하는 한 직장 여성을 반년 이상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병가를 내고 입원해 집중치료를 받도록 권했는데, 일주일 후에 다시 온 여인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습니다. 검사를 해 보니 악성빈혈 증세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놀란 의사가 물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 여성이 대답했습니다.
“죽도록 미워하던 한 사람을 용서했어요. 바로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지더니, 삶에 희망이 생기고 이렇게 행복해졌어요.”
여인에게 만성적 악성빈혈이 발병한 원인은 미움과 분노였고, 특효약은 ‘용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5절)
그때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이르셨습니다.
요즘 여기저기서 나뭇잎들이 많이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저는 그 나뭇잎을 보면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하늘로 채워지는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아! 나뭇잎들도 떨어지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붉게 물든 나뭇잎들은 아래 가지에서부터 떨어지고, 높은 가지는 바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인생에도 이렇게 떠나가야 할 때가 있고, 보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고 할지라도 나무는 더 아름다운 하늘로 채워지는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고운님들의 삶에 그 어떤 빈자리도 하늘로 채워지고, 하늘로 채워져야 삶에 닥쳐오는 겨울을 이기고,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토록 아름다운 나뭇잎이 가녀린 나뭇가지 끝에서 맑은 가을을 향해 아기처럼 손을 흔들며 여전히 매달려 있나 봅니다. 마치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명한 문화비평가인 마셜 맥루한은 ‘의학과 성서’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분노를 품으면 각종 질병이 생기고, 기꺼이 용서할 때 이런 질병들이 치유된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채 계속 미워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저지른 단 한 번의 악행으로 끊임없이 상처 속에 매여 살게 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아프고, 용서하지 않고는 하느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머릿속으로 아는데 가슴까지 내려오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너무나 큰 아픔과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고 분노를 품으면서 살아온 한 고운님께서 영적일기를 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화해의 마음을 가졌답니다. 즉,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답니다.
저 두레박 역시도 하느님의 용서를 믿기에 이 정도라도 내 꼬락서니를 봉헌하며 살아감에 감사드린다고 합니다. 참, 참, 참말로...
하느님의 용서를 믿기에 고운님들 자신의 꼬락서니로 하느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늘로 채워지는 마음이라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자녀의 꼬락서니가 어쩌든 주님을 붙들고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도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로 채워지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그토록 어려웠던 용서 문제의 해답을 얻은 것에 기뻐하며 함께 행복한 날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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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12)
♧♧ 시편 60편 5절….
"당신 백성에게 고생을 겪게 하시고 저희에게 어지럼 이는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즐거움이나 번영을 상징합니다.(코헬렛 9장 7절. 참조) 그러나 구절에서는...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마시게 한 이 포도주는 축복의 상징이 아니라 도리어 하느님의 분노와 징계의 상징입니다.(시편 75편 9절. 이사야서 51장 17절, 21절. 예레미야서 25장 15절. 요한 묵시록 16장 19절. 참조) 이는 당시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교만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를 샀으며, 그 결과 마치 술 취한 사람들의 모습과 같이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 시편 60편 6절….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깃발을 올리시어 활 앞에서 지레 도망치게 하셨습니다. 셀라."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깃발을 올리시어...
여기서 말하는 ‘깃발’은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로(민수기 2장 2-3절. 참조) 군대의 지휘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자신들의 최고 통수권자시니, 저들은 ‘야훼 니씨(주님의 나의 깃발. 탈출기 17장 15절)’라고 외쳤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이’ 곧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금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들인 이스라엘과 백성과 함께 하면서 지휘해주실 것을 간구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활 앞에서 지레 도망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활과 화살 통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시편 127편 4-5절. 참조)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자비의 마음을 활과 화살 통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오묘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야서 49장 2절)
그래서 여기서 ‘활...’이란 영원토록 다윗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불변하는 계약의 말씀(사무엘 하권 7장 9절. 참조), 즉 진리(하느님의 마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도망치게 하셨다.’ 라는 말은 승리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였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영원히 내치지 아니하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해 이스라엘이 다시금 승리할 것임을 확신하는 다윗의 선취적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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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10년도 훨씬 지난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저와 친한 신부님의 고충을 듣게 되었는데, 글쎄 본당 신자 중에서 한 분이 술만 마셨다 하면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말로 인한 폭력이 아니라 실제로 폭행을 한다는 것이었지요. 성당에 도끼나 대형 해머를 들고 와서 성당을 부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만 드시지 않으면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그렇게 사고를 친 다음 날에는 고해소에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의 용서를 구합니다. 한두 번이야 ‘인간이 실수도 할 수 있지.’라면서 넘어갈 수 있겠지만, 계속 반복되는 모습이니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뒤에 이 신부님을 다시 만나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잘 해결되었어.”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왜? 이제 술 안 마신 데?”라고 묻자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성당에 안 나오신 데?”라고 묻자 이것도 아니랍니다. 해결은 신부님 스스로 이 형제님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육신의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었는데, 또 아프다고 찾아오면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찾아오면 치료해주어야지. 신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마음이 아파서 찾아온 것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거부하면 안 되지.”
주님께서는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약한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뉘우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 용서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청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믿음을 달라고 하지 않고 더하여 달라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만으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용서의 실천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 안에서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청해야 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한테 달려 있고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러는 데 필요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옵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힘이 은총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가능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부족한 나를 통해서 세상에 펼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믿음을 더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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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전달됩니다.}
2008년 스토니브룩 대학은 두려움의 사회 전염과 관련해 특별한 증거들을 추적했습니다. 초보 스카이다이버들을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게 한 후 겨드랑이 땀을 하나하나 채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일반적인 땀과 두려운 상황에서 나온 땀을 구분해 분무기에 넣고 노련한 자원자들에게 흡입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원자들이 두려움에 기반을 둔 땀을 흡입하자 두려움과 관련된 시상하부와 편도체 영역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장은 쉽게 전달됩니다. 따라서 내 감정이 부정적이라면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물론 내가 전염시킬 수도 있지만,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남의 긍정적 감정이 큰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십시오. 과연 어떤 감정을 품고 있습니까? 내가 그런 감정을 만든 것일 수도 있고, 그 감정에 내가 전염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감정을 전염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는 노력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은 전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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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 상처가 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찔리기도 합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 부위에 약을 바릅니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밴드를 부치기도 합니다. 붕대를 감기도 합니다. 이유는 상처의 부위가 예민해서 다시 충격을 받으면 더 아프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덧나면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저도 상처가 나곤 합니다.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부치고 며칠 지나면 아물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상처가 날 때가 있습니다. 추월하는 차가 손가락질하며 갈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기분이 상합니다. 내가 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모함하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억울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가슴에 대못을 박을 때도 있습니다. 당연히 배신감에 화가 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하기에 화가 나고, 다툼까지 생깁니다. 꽃밭의 꽃이 다른 건 인정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몸의 상처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부치면서 마음의 상처는 오히려 더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니, 당연히 더 아프기 마련입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분노와 원망의 기름을 계속 부었습니다. 더는 사람을 사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문득 거울을 보니, 어두운 얼굴이 앞에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내버려 뒀기에 덧나고 말았습니다. 삶이 기쁘지 않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지 못한 건 마음의 상처를 돌보지 않아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화병(火病)’이라고 부르는 증상은 마음의 상처에 시기와 질투, 근심과 걱정의 기름을 부을 때 생깁니다.
같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온 맘으로 받아들이고, 치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장 지오노가 소설로 표현한 ‘나무를 심은 사람’입니다. 아내를 잃었고, 자식까지 잃은 주인공은 혼자 숲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황폐해진 땅을 보았습니다. 새도 날아오지 않고, 사람도 떠난 땅입니다. 매일 그 땅에 나무의 씨를 심었습니다. 원망은 걷어내고, 사랑을 심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자 황폐했던 땅은 숲이 되었습니다. 그 숲에 새와 나비가 찾아왔습니다. 마을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사랑하면 그 상처에서 향기로운 꽃이 핍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타인의 아픔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시기와 질투의 기름을 부을 때가 있습니다. 잠도 오지 않고,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떡은 커 보이고, 나의 떡은 작아 보입니다. 금수저가 아닌 것이 불만스럽습니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분노는 더 큰 분노로 돌아옵니다. 한 번뿐인 삶이 기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테러리스트(공격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을 위한 테라피스트(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지혜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느님의 영은 분노와 원망의 마음에는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해와 사랑의 마음에 머물러 우리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큰 힘은 용서하고, 용서받는 겁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용서는 주는 것(Forgiveness)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Forgiveness is what this Course is all about. Forgiveness is your Salvation.(용서가 바로 이 과정의 모든 것이다. 용서가 그대의 구원이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You are Christ. Pure and Innocent, You Are. You are Forgiven. And, You Are Released.(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순수하고 결백합니다, 당신은.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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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사랑의 실천-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승들은 성 마르티노를 성 베네딕도 이전에 서방 수도원 제도를 개척한 탁월한 인물로 여겨 기념이 아닌 축일로 지냅니다. 헝가리 판노비아 사바리아 출신의 성인은 316년에 태어나 397년에 선종하셨으니 무려 그 험난하던 시절에 참으로 치열히 살면서 만 81세, 천수를 누리셨던 분으로 새삼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평생 ‘살아 있는 순교자’처럼 치열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적당히 안주하며 산 성인은 결코 없습니다. 최초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분이 마르티노입니다. ‘세상의 전사’에서 ‘그리스도의 전사’로 운명이 바뀌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다음 일화는 늘 들어도 새롭습니다.
-아미앵에서 지내던 3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성문에서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거지를 만났는데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무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잘라 두 쪽으로 잘라 하나를 거지에게 주었고, 그날 밤 꿈 속에서 자기가 준 반쪽의 망토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아직 예비자인 마르티노가 이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다!”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이 신비체험후 마르티노는 18세에 세례를 받고 푸아티에의 힐라리오를 찾아가 사제서품을 받고 은수생활을 시작합니다. 후에 본인의 고사固辭에도 불구하고 투르 신자들의 간청과 강권에 의해 주교가 되지만 은수적 수도생활을 계속 하면서 착한 목자가 되어 교구내 사목활동에 전념하다 갑작스런 병환으로 선종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마태복음의 최후심판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예언적으로 서술한 말씀입니다. 마르티노 성인의 신비체험과 관련하여 선택한 복음임이 분명합니다. 또 최후심판 비유 복음은 장례미사때 복음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접할 때 마다 최후심판을 늘 염두에 두고 살라는 취지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은 언젠가 죽음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의 모범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말씀은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이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곤궁중에 있는 이들의 상황이 아주 구체적입니다. 이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사랑실천을 생각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1.굶주린 이들, 2.목마른 이들, 3.나그네들, 4.헐벗은 이들, 5.병든 이들, 6.감옥에 있는 이들’ 여섯이지만 오늘 날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종파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최후심판의 잣대가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실천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련한 이를 당신의 형제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그와 동일시합니다. 바로 곤궁에 처한 모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임을 선포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형제들이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드린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보이는 형제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사때 주님의 성체를 소중히 모시듯 일상에서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같은 작은 이들을 소중히 모시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미사의 완성이요 온전한 성체신심의 실현일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이가 주님의 살아 있는 현존입니다. 최후심판은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특히 곤궁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 여부를 통해 시작됨을 봅니다.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자들의 이런 사랑 실천은 그 무엇보다 환대의 사랑 실천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근거한 분도 성인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찾아 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최후심판의 잣대는 거룩한 전례 거행도, 그 무슨 수행도 아닌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 실천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거룩한 전례생활과 필히 함께 가야하는 사랑 실천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이런 구체적 사랑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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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받았음을 기억하라>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같이 쉽지 않지만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우리도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성 에드몬드는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17,2).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가끔은 사람들로부터‘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남을 용서 하기위해서는 내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려고 애를 쓰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었다고 장담한다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시작할 뿐 용서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를 위한 회개를 시작하고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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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용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예수님께서 죄를 지은 후 회개하는 형제를 횟수에 제한없이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완전한 수, 그러니까 딱 일곱 번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수를 가리킵니다. 번번이, 계속,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죄를 짓더라도 회개한다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용서의 원형이십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루카 17,5)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 믿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주제를 이어서 배치한 복음사가의 의도를 헤아려 봅니다. 사실 용서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먼저 형제에 대한 믿음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의 회개를 믿어 주고 또 반드시 변화되리라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회개의 증거나 결과물을 다그쳐서도 안됩니다. 증거가 있다면 믿음은 필요 없으니까요. 다른 하나는 보다 궁극적인 영역으로, 그 형제 안에 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를 선하게 지으시고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믿을 때 용서는 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루카 17,1)
믿음이 약하고 불안정한 이들은 똑같은 현상 앞에서도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렇게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죄 짓고 회개하는 이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분노와 절망과 자포자기라는 죄까지 더해서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죄를 낳는 고리를 끊어 주는 길은 용서밖에 없습니다. 용서는 그의 짐을 덜어 주는 탁월한 방법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루카 17,6)
형제에 대한 아주 작고 미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 형제는 변화될 것입니다. 어쩌면 거듭되는 용서에도 거듭거듭 죄를 짓는 형제에게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실망을 내려놓고 숨을 가다듬으며 외치는 용서는 돌무화과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지는 것 같은 기적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지혜서의 시작 부분으로 우리에게 지혜을 소개합니다. 지혜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지혜 1,5)이고, "다정한 영"(지혜 1,6)이며,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지혜 1,7)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지혜 1,2)
지혜서 저자는 아버지의 지혜이신 주님을 만나는 길을 명료히 밝힙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내게 이득이 될지, 믿어도 손해는 없을지, 괜히 믿었다가 인생 더 꼬이지 않을지 간을 보며 떠보느라 경계선 위를 뱅뱅 맴도는 이에게 지혜는 자신을 드러내지도,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용서에도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신의 눈으로 경계하시지 않고, 떠보고 시험하시느라 두 얼굴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회개하는 형제에게 시험과 불신을 거두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지혜 1,1).
이 말씀은 세상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하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시험과 불신 없는 선량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용서할 때, 우리는 그 형제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형제 안에서 우리에게 발굴되실 겁니다.
지혜가 얕고 우매한 우리는 반복되는 용서가 죄의 반복을 부를까봐 우려합니다. 그래서 용서에 인색해지고 자꾸 시험해보려 합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실 반복적인 용서는 형제를 지치지 않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그게 더 중요하지요. 바로 그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이고, 또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하느님의 용서를 배우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용서받는 사람은 죄인이고 용서하는 이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처럼 용서하는 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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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하느님의 현존을 얻기 위한 수단들
모든 덕德은 좋은 습관에서 이루어집니다. 로랑 형제는 하느님 현존 연습을 무수한 노력 끝에 아예 습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중 부양도 할 수 있었으나 교만 해 질까염려되어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꽃들이 태양을 행해야 자라는 것처럼 사람의 내적 갈망은 하느님을 향하여있다.”(성 아우구스티누스)고 말처럼 로랑 형제는 모든 행동의 시작과 중간 중간 마침에 짬짬이 내적 시선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변화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변화는 선의의 습관을 길들여야 하는데, 참으로 인내와 열정과 내적 갈망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해서는 안 되며, 하느님 현존 연습을 함으로서 하느님 은총이 함께하면 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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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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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은 불행하다>
경고 말씀에 이어서 죄지은 형제자매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죄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비열하고 불쾌한 행동들,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성 내고 모욕하고 모함하고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히는 짓들이 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그런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까? 어림없는 생각입니다! 어떤 악한 것도 그분한테서 비롯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덕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기록된 대로(야고 3,2 참조), 나약한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냥 못 본 척 넘어가지 않고 꾸중하시며, 벌을 각오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짓게 하는 자들을 참고 견디라고 이르십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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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전제 조건>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의 전제 조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가봐도 잘못했는데 자숙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선처만을 바란다면 용서를 받아도
또 잘못을 저지를 사람입니다.
'그냥 용서해'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도 안하는데 예수님께서
용서하라고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참회하는 이에게 용서는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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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짓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 3)
죄와 회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회개는 용서를
용서는 믿음을
더하게 합니다.
용서와 믿음을
먹고 사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용서와 믿음은
서로를
깨어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용서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용서와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용서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에
갇혀 있는 우리를
풀어주어 다시
깨끗하게 해줍니다.
위령성월은
우리자신을
다시 보게 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며
생생한 용서로
이끌어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없다면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향하는 믿음의
시간 되십시오.
용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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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간절히 원하는 것이 회개와 용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보다 생명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래서 우리가 잊고 사는 용서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용서는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끝없는 사랑입니다. 용서는 살아있는 오늘을 더욱 살아있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평화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언제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봉헌하는 회개의 사람만이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임을 알게 되며 하느님의 소중한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만이 이웃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상생의 길은 회개와 용서의 길입니다. 생명은 회개와 용서로 더욱 뜨거워집니다. 서로의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회개와 용서의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오직 하느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성장과 변화로 우리의 시간이 더욱 행복해지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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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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