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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의미로는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이들이 대부분 현대 모로코를 비롯한 북서아프리카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는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무어인’이라고 한다. 어원은 로마 제국 시절 북서아프리카를 가리키던 말인 마우레타니아. 모리타니란 국가 이름과 어원이 같다.
크게 베르베르인과 흑인, 이주민인 아랍인으로 구분되지만, 유럽인들은 이들을 크게 분간하지 않고 그냥 통틀어 무어라고 불렀다. 이슬람 세계에는 이‘무어’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으며 북서 아프리카 지역은 마그리브, 이베리아 지역은 알 안달루스(안달루시아의 어원)라고 불렀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침공(827년)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시칠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일부까지 점령하여, 바리 토후국 등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 원정군, 노르만인의 침공으로 인해 11세기 말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토후국이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13세기 중반에 무어인을 추려내 추방함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으로 이슬람 국가가 세워진다.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던 많은 아랍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8~12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기독교 국가들의 레콘키스타(Reconquista)로 인해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여 마지막에 남아 있던 무어국가인 그라나다 토후국이 1492년에 멸망하였다. 17세기 초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까지 추방해서 흔적을 지우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추방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지역도 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돌아온 비율도 높다. 지하에 숨어서 추방을 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탄압으로 인해 몰래나마 유지하던 신앙이나 언어를 보존할 수는 없었고, 완벽하게 스페인인과 동화되었다.
몰타는 열강의 각축장을 거쳐, 현재는 사실상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 지배의 영향으로 토착언어가 사라지고, 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아랍어 방언 끝판왕인 셈계 몰타어를 쓰는 국가가 되었다.
현대의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몰타, 모리타니 사람들이 중세 무어인들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남부 스페인인,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유럽 지역에서 가장 북아프리카인, 세파르디 유대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수백년 동안 부대꼈는데, 통혼이 안 이루어졌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람들 외관도 그렇고, 북아프리카인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의 영향은 현대 스페인어에도 상당하다.
현재 스페인은 레콘키스타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의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에 모로코 사람들이 “우리들도 추방당한 무어인의 후손이다!” 라고 들고 일어나 시민권을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 현지에서 무어인이란 뜻의 단어인 moro는 학술적이거나 문화 관련된 문맥이 아니라 일상 사회에서 저 무어인 본인들(...)인 모로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인들을 일컫는 때는 주의하여 사용해야 하는 단어이다. 일단 가깝다보니 현대 스페인은 왠만한 대도시 어딜 가던 상당한 규모의 모로코인 커뮤니티가 눌러 앉아 있고,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하면 스페인은 덜 시끄러운 편이긴 하나 현대 서방 국가 어딜 가던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다문화사회에 대한 불안감, 역사적 불신, 질시 같은 정서 또한 당연히 있다.
특히 스페인 내 모로코인들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일관계가 속편해 보일 만큼 서로 불편하면서도 깊숙하게 공유하는 점도 많은 관계이기도 하다. 모로코인들 입장에서 스페인은 조상들의 원쑤이자 문화와 종교의 박해자지만, 동시에 사막화, 마약, 인신매매, 국경 단속 같은 거대한 국제적 사회 문제 해결에 있어서 꼭 필요한 파트너이고, 스페인 입장에서 모로코는 태고적 숙적이었던 것만으로도 모자라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진영의 첨병으로 스페인의 노동자, 농민들을 잔인하게 유린했지만 동 시에 스페인의 제국주의적 야욕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이 남긴 문화 문명적 족적은 부정적으론 '피레네 이남 아프리카론'의 근거가 되기도 했지만, 긍정적으로는 나머지 유럽과는 온전히 다르게 스페인'만'의 이베리아 문화를 형성한 선조'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복잡 미묘한 관계에 따라 스페인, 포르투갈 현지에서 무어란 단어는 중장년층은 아무런 문제 의식도 없이 여전히 종종 쓰는 단어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나 사회적 차별 등에 민감한 유년층과 스페인 내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 본인들은 거부하는 단어이다. 학술서, 관광 가이드 서적 같은 인쇄물에서도 최근에 출판된 물건들은 moro란 단어보다 andalusí, mudéjar, árabe 같은 구체적인 고유 명사로 이동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것도 나름 문제가 되는게, 레콘키스타나 관련 항목들에서도 나오지만, 이베리아 무슬림들도 당연히 역사적으로 여러 소집단으로 분열,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란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역사적 알-안달루스냐, 현대 행정구역인 안달루시아 자체냐 의미가 변할수가 있고, 중간에 낀 무데하르란 단어는 건축이나 미술 분야에서나 쓰이는, 대중성이 없는 학계의 고유 명사에 아직 가깝다. 그나마 보편적인게 걍 '이베리아 아랍'이란 수식어인데, 이것도 당장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의 대립은 주요 타이파들의 흥망성쇄와 지역 정치 역학에 엄청나게 중요한 갈등 요소였음을 생각해 보면 분명 종교는 같아도 아랍인들과 명백히 다른 공동체적 자의식과 지역적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이베리아 무슬림 문화를 '아랍'문화로 퉁치는 건 역사 왜곡이다. 때문에 '모로', 즉 '무어인'이란 단어가 현대 정서에는 안 맞고 비하적 명칭으로서의 전통이 길다는걸 알면서도 딱히 대체 용어가 없다는 이유로 단어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남긴 유명한 건축물로는 알함브라 궁전뿐만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에 무수히 남아있다.
알함브라 궁전(Generalife and Albayzín, 1238년)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던 무어인들이 그라나다에 지은 궁전.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극도로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어 높이 평가받는 건물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건축이 절충된 예이기도 하다. 지금은 전형적인 기독교 문화권이 된 도시에서 이슬람의 흔적이 듬뿍 담긴 궁궐을 보는 기분이 묘하다. 정반대 사례가 바로 과거에는 동방 정교 예술의 정수이자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교의 도시가 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게 4개 공간으로 구성된다.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자 가장 전망 좋은 요새인 알 카사바, 아라베스크 양식의 꽃인 나사리 궁전, 아름다운 정원과 분수의 헤네랄리페, 스페인 르네상스 시기의 건물인 카를로스 5세 궁전과 산타 마리아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이다.
세계의 건축 장식을 연구했던 <Grammer of Ornament>의 저자 오웬 존스는 알함브라, 무어인의 장식을 최상으로 꼽기도 했다. 아라베스크 무늬와 종유석 모양의 세밀하고 방대한 장식을 가진 아치와 기둥, 돔, 각종 수로와 수변, 담담한 벽의 대비 등을 볼 수 있다.
이미 로마시대에 조그만 요새가 있었고, 9세기에 그라나다의 에미르가 성벽과 토대를 올렸다. 1238년에 그라나다의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100년에 걸쳐 점차 화려한 궁궐로 변모시켰다. 이 시기에는 이미 그라나다 외의 모든 이슬람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휩쓸려 나가버렸고, 유일하게 남은 그라나다도 카스티야의 속국을 자청하면서 겨우 목숨 줄을 부지하는 상태였다. 무어인 최고의 예술이라 불리는 알함브라 궁전은 '알 안달루스'의 황혼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워졌던 것이다.
여길 빼앗기고 북아프리카로 가야했던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 마지막 에미르 무함마드 12세 보압딜은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게 슬프구나.' 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패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한심하다는 듯이 "남자처럼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여자처럼 울기라도 해야지." 라며 툭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결국 여길 잊지 못하던 보압딜은 북아프리카에 알함브라보단 못해도 대충 비슷한 궁궐을 만들어 거기서 살다가 죽었다.
이사벨라 1세 가 인근에 신도시이자 그라나다 포위망의 완성인 산타페를 건설하고 결국 1492년에 이슬람 세력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기독교 세력은 이 궁전도 접수했다. 이교도 상징이 빼곡한 공간이었음에도, 스페인 국왕이나 귀족들은 이 곳을 궁궐로 쓰길 원했다. 이사벨라 1세의 손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스페인에선 카를로스 1세)는 이 궁전에서 거주하기 위해 새로운 카를로스 5세 궁전을 알함브라 한가운데에 지었다. 그렇지만 양식이 이질적이었고 오랜 기간 완성되지도 못했다. 그는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이교도 상징을 지우기 위해 궁궐 일부분인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축하고, 성당에 딸린 수도원도 짓고, 궁궐의 일부도 기독교식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이전에 있던 아름다운 여러 건물들과 장식이 훼손되었다.
그 뒤로 알함브라 궁전을 왕궁으로 쓴다던 계획도 흐지부지되어 중앙 정부에서는 슬슬 이 궁전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18세기 초에 펠리페 5세가 며칠 들렀던 것이 마지막 왕실의 방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알함브라는 계속 훼손되는데, 계속적인 개수공사가 있었음에도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말미인 1812년에 프랑스의 세바스티앵에 의해서 탑들이 철거되어 피해를 입고, 1821년에는 지진피해까지 입었다. 그 뒤로는 지역 총독마저 알함브라 맞은편의 헤네랄리페에서 거주하면서 궁전을 완전히 방치하는 바람에 집시와 강도들의 무단거주지로까지 퇴락했다.
이 궁전이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이후 미국인 작가이자 외교관인 워싱턴 어빙에 의해 1829년 알함브라의 이야기(Tales of the Alhambra)가 출판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828년부터 호세 콘트레라스에 의해 원형을 찾기 위한 공사 및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다. 1830년에 페르난도 7세의 기부로 지속적으로 공사를 할 수 있었으며, 1847년 호세가 사망했으나 그 아들이 물려받아 계속 공사하였다. 1870년에는 국보로 지정하였고 이후 1984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21세기에도 계속해서 원형 회복을 위한 공사나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주로 천장과 기둥 사이 레이스를 묘사한 부분들을 복원하고 있다. 지금은 세월의 풍파로 색이 바랬으나 원래대로 복원하면 알록달록 색이 입혀져서 아름다울 거라고. 이외에도 약해진 구조 때문에 기둥과 건물 사이에 쇠파이프로 지탱해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스르 궁전(Nasrid Palace): 알함브라 궁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곳이다. 사자의 정원(Patio de los Leones) 등 유명한 알함브라의 장소는 거의 다 이 곳에 있다.
•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e of Charles V): 이 알함브라 중심에 있는 커다란 기독교 양식의 네모 건물이다. 카를로스 5세의 욕심에 의해 만들어진 이 건물은 오랜기간 완성되지도 못했다. 이 궁전은 현대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무거운 하중을 다른 건물들에 떠넘기고 있어 알함브라 전체의 유지 보수에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500년이 넘은 역사인지라 철거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알함브라 궁전에서 진행되는 모든 문화행사를 이곳에서 치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Ana Vidovic plays Recuerdos de la Alhambra |
첫댓글 가보고 싶은 곳이지요
우리 모두 같이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런데 가서 광장 ,,자전거 타고요 거리 카페
에서 커피 마시구요
ㅎㅎ
그럴날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그런데요~~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거기까지 가지 말구요.
분당공원 그런데가서
잔차 타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