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전두엽, ‘지혜를 탐하다.’
‘사유하다.’, ‘생각하다.’, ‘고뇌하다.’, ‘번민하다.’라는 행위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다. 더 나아가 ‘상상하다.’, ‘추상하다.’라는 고도의 사고 능력 또한 인간의 능력이다. 그러기에 인간만이 피조물의 생활 공간인 자연 세계를 초월하여 영적인 세계를 자신의 삶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이 초월적 존재이자, 절대적 존재인 신(神)과의 교류(친교)를 가능하게 해준다. 뇌과학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대뇌피질의 기능이며 특히 전두엽의 기능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인간만이 유일하게 신(神)을 찾고, 초월자와 교감하며, 궁극성(진리, 절대 선(善))에 대한 감각을 갖는다. 이렇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초월성’을 갖는 존재가 된다.
제1독서인 지혜서에서 선지자는 말한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지혜 7,8-10ㄴ) 모든 인간에게 전두엽의 기능이 있으나 지혜를 찾고 하느님을 찾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 아무리 능력이 주어져 있다 해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하느님께서 당신과의 만남이 가능하도록 모두 섭리(명(命), 법(法), 도(道))하셨지만 정작 인간 스스로가 결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하는 능력을 타고나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가 되며, 그 사유 능력으로 초월 세계를 탐구하고 지혜를 구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좇는 것은 각자 자유로운 결정이요, 자신의 의지에 달린 ‘숙명’과 같으리라.
오늘 복음에서, 평생 계명을 준수하며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예수님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ㄴ)라고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시며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중략)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하신다.
여기에서 두 가지 측면이 눈에 띈다. 하나는 ‘인간의 신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질서와 규범 속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어떤 약자도 억울하거나 착취를 당하는 일 없는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아가 우리는 영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의 초월성,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초월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다. 개인의 본성을 절대시하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 경향과 인간의 본능을 극렬하게 자극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초월성’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위협적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그러나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위협적이며 불가능한 요구’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결단을 실행하셨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주야로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후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그중 하나의 유혹이 재물이었다. 유혹은 모를 땐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깨닫고’ 나면 ‘더 좋은 선물’임을 알게 되면서 더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 법이다. 이미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유혹’의 과정을 겪어왔다.
제2독서 히브리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4,12)라고 말한다. 자연계에서 볼 때 초월성은 예리한 칼날과 같으리라. 자연계에서는 가능했던 거짓과 불의한 속임이 더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 모든 것은 스스로 증인이 될 것이다. 이때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될까? 세상의 지식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자신을 위한 변호 한마디 할 수 있을까?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3)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지혜 7,11ㄱ) 전두엽의 상상과 추상의 사고 기능을 통해 영성과 초월성을 경험해 본 사람들에게 세상의 재물과 재화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일용할 양식으로 충분하고 남은 여분은 언제든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참된 지식’이라 말할 수 있는 ‘지혜’다. ‘지혜’를 그 무엇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 찾는 사람은 알고 있다. ‘지혜’만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리라는 것을, ‘지혜’만이 우리의 갈증을 풀어줄 것을 안다. 예수님께서 ‘다 버리고 나를 따라라!’ 하신다. 어떤 누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이의 모든 것(Omnia Omnibus)’이신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 아닐까?
영성 생활에는 초심자와 같은 단계가 있다. 본성과 본능을 가진 존재로서 우리는 ‘자기 본성과 본능’을 극복해야 하고, ‘초월성’이란 ‘숙명’을 타고난 인간으로서 우리는 동물적 삶 그 이상의 세계로 초대받은 선택받은 피조물이다. 우리 각자 살아온 자취에 따라 자기 극복의 정도가 다르고, 초월성의 경험과 깨달음 또한 다르기에 자기 존재의 ‘현실 파악’이 매우 중요하다. ‘초월성’ 안에 ‘잠들어 있는 나의 운명’(숙명)을 깨우기 위해 우리는 지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지혜가 오늘도 나에게 속삭인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 자신을 알지도 못한 채, 재물과 재산으로 불안을 덜어내 안위를 확보하려는 영혼이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지혜와 초월적 영성에 대하여 조금도 알지 못한 영혼이 어떻게 하늘나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소귀에 경(經) 읽기’에 비하면 낙타 정도야 하느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니 바늘귀가 아니라 어떤 귀도 통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면 하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으니, 이 또한 내 탓이요, 내 복(福)이로다.
첫댓글 초월성 안에 잠들어있는 나의운명(숙명宿命)을 깨우기 위해 필요한건 지혜에 대한 사랑이군요
전두엽훈련 일까요?
오늘도 속삭여 보겠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부터요.
나자신의 부피를 줄여 나가야 (죽음) 바늘귀로 들어가는걸까요?,(생명)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계시는 그 곳을 향해 오늘도 나아갑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