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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김지하 [김지하의 사상기행]-(2)동학의 운세 삼은삼현(三隱三顯)
멩이 추천 0 조회 51 08.01.26 09: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남 본거지에서 매일신문 지상으로, 영남대에서 내 강의가 시작됐다.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 그리고 다음날 경주 용담(龍潭)으로 수은선생의 넋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거듭 확인한 것은, 영남에서 동학사상의 실질적 복권은 아직도 아득하다는 사실이다.

아득함에도 그리고 어떠한 피곤함이 있더라도 동학의 실질적 복권을 위한 나의 중계자적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동학의 실질적 복권은 종교와는 다른 독특함으로, 그럼에도 보편적인 새 문화의 대(大) 파도로 다가올 것이다.

그 과정은 여러사상들과의 조우와 융합, 그리고 젊은이들의 훌륭한 공부와 힘찬 실천을 통해 현실화 될 것이다.

이를 동학의 운세를 말한 삼은삼현(三隱三顯)을 통해 확인해보자.

삼은삼현.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난다’는 뜻의 이말은 동학역사의 운명이라고도 한다.

생각컨대 운명이 아니라 도리어 전개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세 번 숨었다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다시 드러나는 때는 완연히 환골탈태, 그 모습과 자취가 전과는 판이하게 달리 나타날 것이다.

동학 역사의 전개를 한번 살펴보자.

1864년 최수운(崔水雲)의 처형 직후 동학당은 풍비박산,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옥중에서 수운이 최해월(崔海月)에게 내린 지시가 그 시작이다.

나는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터이니

너는 높이 날고 멀리 도망치라.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이것이 ‘첫번째 숨음’이다.

그러면 ‘첫번째 드러남’은 무엇인가?

거의 40년에 가까운 해월의 지하조직 활동으로 전국화, 대규모화한 동학당이 포접(包接)과 육임제(六任制)로 생동하는 체제를 갖춘 후 삼례(參禮)집회, 보은(報恩)집회, 대한문복합상소(大韓門伏閤上疏)등 일련의 공개적, 합법적인 대중운동을 거친 끝에 마침내는 1894년 봄, 갑오무장혁명으로 천하를 뒤집고 집강소(執綱所)를 통해서 본격적인 대 정치변혁을 실천한 것이 그것이다.

‘두번째 숨음’은 무엇인가?

그 갑오년 겨울 공주 우금치와 태인 등지에서 치명적인 패전에 이어 전국에서 30만 내지 50만이 도륙당하고 그 뒤 세 해가 지나 해월이 체포,처형되면서 동학은 완전히 지하로 잠복하고 만다.

그렇다면 ‘두번째 드러남’은 무엇인가?

물론 이 두 번째 숨음과 두 번째 드러남의 시기에는 수십개 동학 분파의 확산과 각개약진이 있고 해월 최시형의 장자 최동희(崔東熙)의 고려혁명당이나 강증산(姜甑山)의 정세개벽(靖世開闢)운동, 김단야(金丹冶)의 형평사(衡平社)운동 등이 있다. 그리고 의암(義菴 孫秉熙)의 법통에 대한 의혹과 친일개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 복잡하게 저류에 깔려 있다.

그러나 대세(大勢)는 의연히 의암 노선에 있었으니 그것이 갑진개혁(甲辰改革), 천도교 창건, 신문화운동과 농민사(農民社) 및 부인회(婦人會) 등을 위시한 광범위한 민중변혁 운동, 그리고 저 3·1 운동과 그 이후의 천도교 청우당(靑友黨) 및 신간회(新幹會)운동, 지하 유격조직인 오심당(吾心黨) 활동에 이은 해방 직후의 삼일재현 단정반대운동(三一再現單政反對運動)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드러남’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단정 반대운동의 실패로 인한 대숙청, 동란 당시 남한에서의 친공 부역에 대한 국군수복대의 대학살로 동학은 남북한 똑같이 겨우 뒷골목의 가난한 간판 하나씩만 남기고는 거의 완전에 가까울 만큼 해체되어버린다. 그러고는 스산한 적막강산이다.

이른바 ‘세번째 숨음’이다.

반세기(半世紀)동안 어둠이 지속되었다.

죽었는가?.

동학은 이제 완전히 자기의 역사적 생명을 종결하고 말았는가?.

그래서 한낱 민족사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인가?.

그러나 수운 자신이 ‘우리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앞으로 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온다’고 했고 ‘삼은삼현’의 비밀은 도리어 해월 자신의 말씀이라는 설까지도 있다.

수운 이후 140여 년이 흘렀다. ‘삼은’ 이후 55년 여가 지났다.

동학에 대한 완전한 이해, 즉 ‘만사지(萬事知)’에 터한 ‘삼현’이 실현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있고 없음을 가리기 전에 동학이 지닌 진리의 새 원형(原形,archetype)에 대한 요구가 동아시아보다 오히려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식계에서 ‘이스트 터닝(東風)’이라 부르는, 일종의 예감과 갈증의 토네이도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얘기다.

국내에서는 목하 담론부재의 황량한 현실에서 지식인의 방황과 10대, 20대, 30대 초반 신세대의 갈증에 대한 아주 조그마한, 극소수 청장년층의 대안 모색의 한 담론으로 동학이 토론되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한 ‘삼은’에 이은 결정적 ‘삼현’이 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만약 참으로 ‘삼현’이 온다면 그것은 왜, 어떻게, 어떤 형태로, 누구에 의해서 올 것인가?

그 특징적 사안들을 열한 개 정도의 예감 영역의 항목으로 약술해볼까 한다.

하나.

동학 진리의 특징은 넓으나 간략한 곳에 있다(吾道博而約). 동학사상은 앞뒤 두 개의 주문(呪文)과 하나의 부적에 요약된다. 앞 주문인 강령주문(降靈呪文)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에 이르러 나에게 크게 내리시기를 바라옵니다(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수운은 이때의 ‘지극한 기운(至氣)’을 ‘극(極)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混元之一氣)’이라 해설했다.

‘극에 이르름’이란 우주 진화의 극치, 곧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로서 동학 용어로는 ‘지화점(至化點)’이겠다. 그리고 ‘한 기운(一氣)’이란 주역(周易)에서 우주의 체계적 질서를 상징하는 ‘태극(太極)’의 다른 말이다.

그러매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이란 ‘혼돈의 질서’를 말하니 바로 형용모순(形容矛盾)과 반대일치(反對一致)의 역설로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른바 ‘카오스모스(chaosmos)'이다. 더욱이 ‘극에 이르름’이라 했으니 동아시아 성리학의 최고 난제인 이(理)와 기(氣)의 회통이라는 커다란 차원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지성계가 보는 인간과 지구와 주변 우주의 현실은 한마디로 ‘대혼돈(big chaos)'이다.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은 탁월한 통합적 과학뿐인데 이 과학을 촉발할 수 있는 ‘혼돈 나름의 질서’의 인문학적 원형과 기준과 담론이 유럽과 아메리카에는 없다.

그들이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현상, 즉 ‘이스트 터닝’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중국에 있는 것도 아니다. 유럽도 중국도 그것이 있는 듯하지만 없다. 중국의 경우, 그것의 가능성들을 산 채로 죽였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그것이 없는 듯하지만 살아 있다.

‘지극한 기운’, 즉 ‘지기(至氣)’, ‘극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元之一氣)’. 이것이다. 바로 ‘혼돈의 질서’다.

그것이 살아 있음을 어찌 아는가?. 2002년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라는 ‘엇박’, ‘혼돈박’을 보고서 안다. 그것은 곧 지금 오고 있는 ‘쓰나미 시대’, ‘온난화’와 ‘생태계 오염’과 ‘이산화탄소’의 시대를 관통하게 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새 지구문화의 기준, ‘패러다임’인 것이다. 당연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둘.

두 번째 주문인 본주문(本呪文)의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는 세계 지성과 과학계가 갈구하고 있는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뼈대다. 즉, ‘디스커스(discourse)’다. 이 주문이 바로 ‘모심’과 ‘살림’과 ‘생명학·우주생명학’의 연찬 및 창조와 실천의 전 과정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주문 열석 자는 그 의미체계로서는 ‘시천주 조화정 만사지’의 삼단계이지만 위상구조로서는 ‘영세불망’까지 더해서 사위체(四位體)다.

이것은 ‘천부경(天符經)’의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룬다(三四成環)’의 비밀에 이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이치요 위상과 활동 사이의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으로서, 유불선 및 그리스도교, 모슬렘과 자기조직화의 진화론, 나아가 창조적 진화론, 불확정성의 원리와 관찰자 참여 우주론, 심리물리학과 동아시아의 역학(易學)등을 통합한다.

만약 ‘삼은삼현’이 단순한 불행이나 운명 정도가 아니라 동학사상의 역사적 전개의 필연이요 법칙이라고 할 경우, 주문의 의미체계 및 위상구조와 그 논리적 연관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첫번째 드러남’이 최해월류의 ‘모심(侍天主)사상 시대’라 보고 ‘두번째 드러남’이 손의암류의 ‘살림(造化定)사상 시대’라 한다면, 이제부터 오고 있는 ‘세번째 드러남’은 당연히 ‘생명학·우주생명학(萬事知)사상 시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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