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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전집 제24권
●기(記)
○최 승제(崔承制)진강후(晉康侯)의 원사(元嗣)이다 의 십자각기(十字閣記)
승제상서(承制尙書) 최공(崔公)이 갑제(甲第)의 서쪽에 집을 세웠는데, 기이하여 실로 인간 세상
에서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무릇 집을 짓는 제도는 들보를 가로 지르고 마룻대를 세로
지르며, 들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서까래와 네모진 서까래를 거는 것이 통례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집은 네모가 나서 십(十) 자와 같고 그 속은 네모가 반듯하여 정(井) 자와 같아서
세상에서 말하는 장려(帳廬)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십자(十字)라 이름하였다.
정자처럼 네모 반듯한 안에는 모두 밝은 거울이 걸려서 그 광명이 안과 밖을 환하게 비쳐, 무릇
사람과 물건의 굵고 가는 것과 크고 작은 것의 일변 일태(一變一態)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니,
쳐다보면 놀랄 만하다.
나는 듯한 용마루[飛甍], 굽은 두공[曲枅], 층층한 주두[層櫨], 첩첩한 도리[疊梠]가 모두 구부정
하게 옆으로 튀어나오고 가장귀져서 비스듬히 뻗어, 이무기가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봉이
날개치는 것과 같기도 하여 특수한 형상과 괴이한 제도가 모두 제각기 다르게 보이니, 비록 예수
(隷首)가 이를 계산하더라도 멍해서 잘 계산하지 못할 것이다.
그 붉은 칠, 푸른 칠을 하고 채색으로 아로새긴 꾸밈은 휘황찬란하여 놀이 어른거리듯, 구름이
피어오르듯, 혹은 밝은 달이 빛을 뿜는 듯하고 많은 별이 광채를 펴는 것 같으므로 비록 이루
(離婁)가 이를 보더라도 현란해서 감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목경(木經)》에 이런 제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옛날에도 세상을 뒤흔들 만한 호문(豪門)과
거벌(巨閥)이 있었고, 훌륭한 재목과 기이한 나무도 유독 지금에만 생산되고 옛날에는 생산되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반수(般倕)와 같은 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지 않았으련만, 어찌 옛날부터
대사(臺榭)와 유관(遊觀)이 이처럼 기이한 것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을까? 이것은 공의 안목과 의식이 옛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것일까?
비록 세상의 공후(公侯)와 경상(卿相)이 본받아서 건축하려 하더라도 비슷하게도 못할 것이며 설령
건축한다 하더라도 보존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공훈이 왕실(王室)에 쌓이지 못하고 은택이
생민(生民)에게 흡족하지 못하고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유관(遊觀)의 화려함을 그 분수에 넘치게
한다면 몸에 누만 될 뿐인데, 어떻게 보존할 수가 있겠는가? 이제 최공은 적선(積善)한 가문에
태어나 온 조정의 물망을 얻어서 계책을 정하고 나라를 안정하게 한 그 공렬이 빛나서 일월과
더불어 광명을 다투고, 몰래 베푼 밝은 덕이 사람의 몸에 깊이 스며들었으니, 천지 신명이 또한
도울 것인데, 어찌 몸에 누되는 일이 있겠으며, 또 어디에 간들 보존하지 못하랴?
어제 공이 나를 불러서 말하기를, “자네가 이 집을 보았지마는 이 집의 낙은 알지 못할 것이네.
화창한 바람이 맑고 질탕하여 복숭아꽃ㆍ살구꽃이 만발할 때에는 선관(蟬冠)에 구대(龜帶)를 띤
자와 읍양(揖讓)하고 용수초(龍鬚草)의 자리에 앉으매, 둥근 소반이 엇걸려 놓이고 금술잔이
가볍게 오가며, 동오(東吳)의 절색과 남국(南國)의 가인(佳人)이 거문고 줄을 퉁기면 맑은 샘물이
솟아오르는 듯하고 노래를 부르면 가는 구름도 멈추며, 향기로운 바람과 난초 냄새가 수십 리에
풍겨 화류(花柳)와 꽃다움을 다투니 이것은 내가 봄에 얻는 풍경이다. 여름철 찌는 듯한 한더위
에는 북쪽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청풍이 서늘하게 불어오고 깊숙이 자리잡은 집이 저절로 그늘
져서 햇빛이 엿보지 못하며, 찬 얼음으로 둘러싸고 큰 부채를 마주 부치며, 거기에 또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어서 아름다운 그늘을 제공하고 맑은 소리를 보내어 서늘한 기운이 8~9월의
기후와 같게 하니, 인간 세상에 쇠를 녹이고 돌을 태우는 듯한 무더위가 있음을 알지 못하네.
이것은 내가 여름에 얻는 풍경이네. 가을과 겨울에는 따스한 안방과 후끈한 별관이 있다네.
이 집은 나에게 이와 같은 즐거움을 주는데, 나는 집에 보답할 것이 없다네. 다만 화려한 문사
(文詞)를 써서 집의 영화로 삼으려 하는데, 자네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사양하다 못해 공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공의 즐거움이오. 그러나 이것은
그 바깥 것을 들어서 말했을 뿐이오. 그 마음속에 자득한 것으로 말하면, 무한한 강해처럼 넓고
무궁한 천지처럼 광대하여 일월이 늙게 못하는 바이며 귀신이 엿보지 못하는 바이니, 저 같은 사람
으로서는 능히 헤아려서 필한(筆翰)에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분부가 엄하므로 제가
또한 감히 그 대강을 적어서 공이 밖에서 얻은 것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만 그 이면의 자득
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글에 능한 선비를 기다려서 그 순수함을 발휘하여 갖추 형용하게 해야
할 것인데,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직한림원(直翰林院) 이모(李某)는 적는다.
[주C-001]최 승제(崔承制) : 최우(崔瑀)를 가리킨다. 승제(承制)는 승제상서(承制尙書)의 약칭으로,
임금의 제명(制命)을 받든 상서라는 뜻이다.
[주D-001]예수(隷首) : 황제(黃帝) 때 사람으로 산수(算數)와 도량형(度量衡)을 창안하였다.
[주D-002]이루(離婁) : 황제 때 사람으로 백보 거리에서도 추호(秋毫)의 끝을 볼 수 있을 만큼
눈이 밝았다 한다. 이주(離朱)라고도 한다.
[주D-003]반수(般倕) : 춘추 시대 노(魯) 나라의 교공(巧工) 공수반(公輸般)과 순(舜) 임금 때의
교사(巧思)로 유명한 수(垂 : 《장자》에는 수(倕)로 되어 있음)를 가리킨 듯하다.
[주D-004]동오(東吳)의……가인(佳人) :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에 미인들이 많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崔承制十字閣記 晉康侯元嗣
承制尙書崔公立閣于甲第之西。奇哉異乎。實人間所未嘗見也。大抵作屋之制。不過橫其梁縱其棟。
楶而梲之。椽而桷之。如是而已耳。今此閣也。楞四角如十字。而其中則方如井焉。類世所謂帳廬者。
故以十字名之。方井之內。悉以明鏡塡之。光明照耀。洞徹表裏。凡人物之洪纖巨細。一變一態。皆瀉
于其中。仰之可駭也。有若飛甍曲枅。層櫨疊梠。皆夭矯橫出。杈枒斜據。或若螭騰。或類鳳翥。殊形
詭制。每各異觀。雖隷首算之。茫乎惘乎。棄其籌而莫數也。其髤彤漆綠雕綵之飾。則赫赩璀璨。霞駮
雲蔚。或如明月之流光。或若繁星之布彩。雖離婁見之。眩眩晃晃。奪其睛而莫敢仰視也。未知木經尙
有如此制度否。且古亦有豪門巨閥富貴之熏天者。非長材異木之獨產於今而不產於古也。良工巧匠之若
正爾般倕者。亦無代無之。何曠古未曾聞臺榭觀游之若此其奇。而乃今日始見之耶。此豈公之眼匠心籌。
敻出於古人之所未到歟。雖世之公侯卿相欲效而營之也。略不得髣髴矣。假如能營。其保之也愈難矣。
何則。功未積於王室。澤未冾於生民。一旦遽有觀游之泰過其分。則適爲身之累耳。安得而保之哉。
今崔公生積善之門。擁傾朝之望。定策安邦之烈。炳炳與日月爭明。陰施顯德之浹人之肌膚也滋深。則
天地神明亦相之矣。庸有累於身。而又焉往而不保哉。一昨。公召予謂日。子覩夫玆閣而未識玆閣之樂
也。若夫和風澹蕩。桃杏齊坼。吾與珥蟬腰龜者揖讓。坐於龍鬚之席。員案綺錯。金鍾羽飛。東吳絶艶。
南國佳人。撫絃而淸泉激。唱歌而行雲遏。香風蘭澤。噴散數十里。而與花柳爭芳。此予之有得於春也。
南火之月。盛暑方蒸。北戶洞開。淸風颯來。深閣自陰。日光不窺。環以寒氷。交以大箑。申之以靑松
翠柏。供美蔭送淸籟。凄涼如八九月天。不知人間有流金爍石之炎也。此予之有得於夏也。若秋冬之候。
則有溫閨燠館在焉。閣之餉予樂如此。而予無以報於閣者。但欲以華文麗詞署諸上。用爲閣之榮。子可
當乎。予讓不獲已。乃言於公曰。此誠公之樂也。然擧其外而言之耳。其所自得於內者。浩浩乎若江海
之無涯。蕩蕩乎如天地之莫極。日月所不老。神鬼所不覷。非若僕輩之所能測度而形乎筆翰者也。然公
之命嚴矣。予亦敢不擧其粗而敍之。以應公所得於外者耶。其所自得於內者。必待能文之士發其粹而形
容之備者。予何足以當之哉。直翰林院李某記。
○최 승제(崔承制)의 대루기(大樓記)
대저 양지에 있으면 기분이 느긋하고 음지에 있으면 마음이 쓸쓸하며 높은 곳에 있으면 속이
시원하고 낮은 곳에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이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난 상정이다.
노자(老子)는,
“비록 화려한 집이 있더라도 설레지 않고 한가한 마음으로 초연하게 있다.”
하고,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고명(高明)한 데와 대사(臺榭)에 거처할 만하다.”
한 것은 대개 이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누대(樓臺)와 관사(觀榭)의 크고 작음과 번화하고 간소함은 또한 사람의 형세에 따라 각각
적당한 정도가 있다. 비록 지위가 같고 존귀함이 균등한 자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촉망하는 바는
다르다. 사람들이 크게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경우에 크게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옳게
여기지 않고 모두 정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공이 많고 덕이 커서 명망이
모든 사람을 압도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있는 자에 이르러서는 비록 그 집을
극도로 크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고 오히려 좁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이제 승제(承制) 최공이 거대한 누각을 거실의 남쪽에 짓게 된 까닭이다.
누각 위는 손님 1천 명을 앉힐 수 있고 누각 아래는 수레 1백 대를 나란히 놓을 만하다.
그것은 새가 날아다니는 길을 끊을 만큼 높고 해와 달을 가릴 만큼 크다. 푸른 구슬로 꾸민
기둥에 옥신[玉舃]으로 밑을 받쳤으며, 양각(陽刻)한 말[馬]이 마룻대를 등에 짊어지고 머리를
치켜들어 끌어당긴다.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이 나무로 조각되어 그 자세를 나타내는 것은 건축
이 생긴 이래로 아직까지 없었던 일이다.
《선경(仙經)》을 상고하니, 신선의 세계에 옥루(玉樓) 12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것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어서 그 집의 제도가 어떠하며 그 안에 어떤 기이한 광경이 있는지
알지 못하여 일찍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겼더니, 이 누각을 보매 비록 하늘에 있는 옥루도 아마
이보다 더 화려하지는 못하리라.
그 동쪽에는 불상을 안치한 감실(龕室)이 있다. 불사(佛事)를 행할 때면 곧 중들을 맞아들이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이르건만 장소는 오히려 여유가 있다. 누각 남쪽에는 격구장(擊毬場)을 설치
하였는데, 길이가 무려 4백여 보나 되고 평탄하기가 숫돌 같으며, 주위에 담을 둘러쌓았는데,
수리에 뻗쳤다.
공이 일찍이 여가를 이용하여 손님들을 불러 호화스러운 연석을 벌이고 술을 마시다가, 기녀(妓女)
들의 아름답고 고운 모습도 싫증이 나고 풍악 소리의 고조(高調)된 음률도 귀에 싫게 될 때에
보는 것을 상쾌하게 해 주고 기분을 시원스럽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공을 치고 말을 달리는 유희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왕량(王良 춘추시대 사람)과 조보(造父 주 목왕(周穆王) 때 사람)처럼 말 잘 타는 무리
에게 명하여 날랜 말을 타게 한다. 빠르고 민첩하여 유성(流星)처럼 달아나고 번개처럼 움직인다.
동쪽으로 갈 듯하다가는 다시 서쪽으로 뛰고, 달릴 것처럼 하다가는 다시 머무른다. 사람들은
서로 손을 모으고 말들은 서로 말굽을 모은다. 뛰고 구르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사이에 서로
공을 다툰다. 비유하면 뭇 용이 갈기를 떨치고 발톱을 세워 큰 바다 속에서 한 개의 진주(眞珠)
를 다투는 것과 같으니 아, 놀랄 만하다.
대저 공을 치고 말을 달리는 일은 평탄한 광장이나 넓은 평원이 아니면 적합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공은 홀로 그렇게 하지 않고 담을 둘러 쌓고 장랑(長廊)을 둘러 지은 그 속에서
놀이를 하게 하니 무슨 까닭인가? 무릇 넓은 평원이나 평탄한 광장에서는 비록 표주(標柱)를
세워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데도 오히려 규칙을 지키지 않고 벗어나 한계선을 넘는
자가 있다. 이것은 곧 땅이 국한되지 않고 마음이 단속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니 장무(墻廡)
안에 격구장을 설치하여, 빙빙 돌고 이리저리 달리면서도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땅이 국한되매 기술은 여유가 있고 마음이 단속되매 기교가 더욱 나온다.
이것이 공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아, 누각이 비록 맞이하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온갖 경치가 이 누각에 나타남이 저러하고,
공이 비록 받고자 하지 않더라도 누각이 공에게 이바지함이 이와 같다. 모든 훌륭하고 특출한
풍경이 이 누각에 모였다. 나는 공의 측근에 있는 호사자들이 좋은 경치를 기록한 일이 없음을
한스럽게 여기고 공에게 청하여 현액(懸額)을 쓴다.
又大樓記
夫在陽則舒。在陰則慘。處高則快。處卑則鬱。是人所以受之天而固常有者也。老子曰。雖有榮觀。
燕處超然。月令曰。可以居高明處臺榭。蓋謂是也。雖然。樓臺觀榭之大小繁簡。亦沿人之勢而各有
當焉。雖於位同貴均者。顧人所屬望則異矣。人心所不當大而大之。則人不以爲可。而皆謂之過矣。
至如功豐德鉅。望壓萬人。處一國奔走瞻望之地者。雖極其大也。人不以爲侈。而猶以爲隘也。是今
承制崔公之所以作大樓於居室之南偏者也。上可以坐客千人。下可以方車百乘。高則橫絶鳥道。大則
蔽虧日月。碧瑤瑩柱。玉舃承跋。陽馬負阿。矯首軒挐。飛禽走獸。因木生姿。自棟宇已來未之有也。
按仙經。神仙有玉樓十二。然世無眼覩者。不知其制度何如。而其中有何等奇觀。嘗以此爲恨。及觀
是樓。雖天之玉樓。想不能侈玆也。其東偏安佛龕。有營佛事。則邀桑門衲子。多至數百人。恢恢有
餘地。直樓之南。闢毬場無慮四百許步。平坦如砥。繚以周墻。連亘數里。公嘗以暇日召賓客。開瓊
筵命玉觴。及于目倦乎姿色之靡曼。耳厭乎絲行之激越。則顧可以壯其觀暢其氣者。莫若擊毬走馬之
戲也。於是乎命善馭如王良,造父之輩。乘十影之足。跨千里之蹄。翕忽揮霍。星奔電掣。將東復西。
欲走反駐。人相叢手。馬相攢蹄。爭毬於跳轉滅沒之中。譬若群龍揚鬣奮爪。爭一箇眞珠於大海之裏。
吁可駭也。大抵擊毬走馬。非以平衢廣陌。則疑若不可。而公獨不爾。使戲於周墻環廡之間者。何哉。
凡廣陌也平衢也。雖立標樹柱。要不出其限。猶有不守關禁。逸而過之者。此直由地不束心不撿故爾。
不若置之於墻廡之間。觀其廻環宛轉。不離其域。地束而枝有餘。心檢而巧愈出。此公之所以爲樂也。
噫。樓雖欲不邀。而萬景之效於玆樓者如彼。公雖欲不受。而樓之供於公者如此。凡勝特之觀。皆聚
於玆樓。則予恨左右好事者之無有以聚勝。請於公而暑其額也。
○계양(桂陽)의 자오당기(自娛堂記)
정우(貞祐 금 선종(金宣宗)의 연호) 7년 초여름에 나는 좌사간 지제고(左司諫知制誥)에서 계양
(桂陽)의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산기슭의 갈대 사이에 있는, 마치 달팽이의
깨어진 껍질 같은 다 쓰러진 집을 태수(太守)의 거실이라고 하였다.
그 구조를 살펴보니, 휘어진 들보를 마룻대에 걸쳐놓고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했을 뿐이다.
위로는 머리를 들 수 없고 아래로는 다리를 뻗을 수 없다. 더운 때를 당하여 여기에 거처하면
마치 깊은 시루 속에 들어가서 찌고 지짐을 당하는 것 같다. 처자와 종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모두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지만, 나는 홀로 즐거워하여 먼지를 쓸고 거처하면서 당(堂)의
이름을 ‘자오(自娛 자신만이 즐긴다는 뜻)’라고 써붙였더니, 손님 중에 그 이름의 연유를
힐문하는 이가 말하기를,
“지금의 태수는 옛날의 방백(邦伯)이라 빈객이 만나 뵙기를 청하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당(堂)에 오르는 사람들은 다 관원 중의 준수한 인물이며, 선비나 승려(僧侶)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자들로서 태수와 더불어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태수께서
자오라고 당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것은 앞에 든 손님들을 사람 축에 넣지 않는 것입니까?
어찌 사람에게 도량이 넓지 않는 것을 보입니까?”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손님께서는 어찌 이러한 말을 하십니까? 내가 문하성(門下省)의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에는
나가면 누른 옷을 입고 하례(下隷)가 앞에서 갈도(喝道)하고, 들어오면 맛좋은 음식이 앞에 가득
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고량자(膏粱子 부귀한 집에서 맛좋은 음식만 먹고 고생 없이 자라난
사람)들에게는 비록 부족한 것 같지만 나에게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詩人)
은 운명이 박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그러한 것이어서, 나도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사(有司)의
무고를 입어 이 유황(幽荒)하고 비습(卑濕)한 곳에 오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시키는 일
이고 사람이 작위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집이 크고 호화로우며 거처하는 것이 화려하여
스스로 폄손(貶損)된 것을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면, 하늘이 나를 처우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
어서 더욱 화를 부르기에 알맞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집의 누추한 것은, 홀로 나만이 즐거워
할 바이고 여러 사람들은 매우 이맛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어찌 나 자신의 편벽된 기호(嗜好)
로써 남에게 같이하기를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향연(享宴)의 설비가 있고 풍악과 여색
(女色)의 즐거운 일이 있다면, 나 역시 무슨 마음으로 혼자만이 그 즐거움을 누리면서 손님들과
더불어 함께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고을에 살고 이 당에 거처하는 동안에 즐거움이
없을 것은 분명합니다.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하니, 손님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따라서 이것을 기록하였으니, 때는 기묘년(1219, 고종 6)
6월 24일이다.
桂陽自娛堂記
貞祐七年孟夏。予自左司諫知制誥。謫守桂陽。州之人。以深山之側雚葦之間一頽然如蝸之破殼者。
爲大守之居。觀其制度。則拋梁架棟。強名屋耳。仰不足以擡頭。俯不足以橫膝。當暑處之。如入深甑
中而遭蒸灼也。妻兒臧獲。矉之皆不欲就居。予獨喜焉。灑掃而處之。因榜其堂曰自娛。客有詰其由者
曰。今之太守。古之邦伯。賓客請謁。日相踵繼。登是堂者。皆官曹之俊秀。儒釋之魁奇。無不與太守
享其樂者。而太守遽稱之曰自娛。則其不以向之賓客。置人品中耶。何示人以不廣歟。予笑而應之曰。
客安有是言哉。方僕之爲省郞也。出則黃裾喝道。入則方丈滿前。當是之時。在膏梁之子。則雖若不足。
於僕則大過矣。然詩人命薄。自古而然。忽一旦被有司所誣枉。而落此幽荒卑濕之地者。殆天也。非人
也。若屋宇宏傑。居處華靡。不痛自貶損。則非天所以處我之意。而祗益招禍耳。然則玆陋也。獨予之
所自娛。而衆人之所深矉也。豈可以己之所偏嗜。而欲強人以同之哉。如或有籩豆之設。聲色之歡。則
予亦何心獨享其樂。而忍不與賓客共之耶。然居是州處是堂。其無此樂也審矣。又何疑哉。客慙而退。
因以誌之。時己卯六月二十四日也。
○계양(桂陽)의 초정기(草亭記)
계양(桂陽)이란 곳은 다북쑥 우거진 사이에 궁벽하게 자리잡고 있다. 가서 놀 만한 경치 좋은
숲이나 샘물은 하나도 없다. 오직 남산(南山) 곁에 정자 한 채가 있는데, 늙은이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고(故) 상국(相國) 허공 홍재(許公洪才)가 일찍이 이 고을을 맡았을 때 그 땅에 터를 잡고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었으며, 고 태수 이실충(李實忠)이 물을 끌어 못을 만들고 그 위에 걸쳐서
정자를 지을 적에 한 칸에 서까래 10개를 걸치고 속새 이엉으로 덮은 것은 검소한 것을 보이는
것이요, 길이와 너비가 8자에 지나지 않고 앉을 자리도 8명을 넘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제도를
줄인 것이다.”하였다.
물이 바위 틈에서 나오는데 매우 차고 맑아서 얼음과 같다. 비록 한여름일지라도 들어가 목욕하면
추워서 머리털이 일어설 정도여서 오래 견딜 수가 없다. 게다가 반송(盤松)과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펴고 서늘함을 낳아서 맑은 바람이 저절로 오니, 따가운 햇볕이 가까이하지 못하여 피서
하기에 가장 좋다. 그런 까닭에 ‘척서(滌暑 더위를 씻는다는 뜻)’라는 현액(懸額)이 있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초정(草亭)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기이한 지형과 뛰어난 지세가 있어서 고을의 수령이 된 자에게는 더욱 이롭다.”
한다. 이 따위 무당이나 박수의 허망한 말은 선비된 자가 마땅히 말하는 것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속담과 항간의 이야기도 때로는 맞는 것이 있으니,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내가 오기
전에 이 정자는 뜻밖에 거문고를 불태우고 학(鶴)을 굽는 자에게 헐리게 되어 황폐하고 쓸쓸한
옛터만 남았을 뿐이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슬프게 여겨 고을의 아전을 불러 말하기를,
“이 정자는 이 태수(李太守)가 창건한 것인데, 무엇이 너희 고을에 해롭기에 감히 헐어버렸는가?
옛사람은 그 사람을 사모하여 감당(甘棠)을 베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너희 고을에서는 감히
정자를 헐었느냐?”
하였더니, 아전은 묵묵히 물러가 옛 재목을 찾아 모아서 잠깐 동안에 다시 세우고 이튿날 일을
마쳤다고 내게 와서 보고하였다. 내가 동료들과 더불어 주연(酒宴)을 베풀고 낙성식을 하였다.
아, 작년 초여름에 내가 보궐(補闕 사간(司諫))에서 외직으로 나와서 이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금년 6월에 이르러 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禮部郞中起居注知制誥)에 제배(除拜)되어 장차 궁궐
에 나아가게 되었다. 동료들이 말하기를,
“이 정자는 태수가 중건한 것인데,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뒷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할 수 없다.”
하므로, 나도 그렇게 여기고 따라서 대략을 적으니, 뒤에 오는 자에게 가볍게 허는 일이 없기를
부탁하고, 또 이 태수를 위하여 불후(不朽)의 자취를 보존하게 하려는 것이다.
경진년(1220, 고종 7) 7월 일에 늙은 태수 예부 원외랑 이모(李某)는 적는다.
[주D-001]거문고를……굽는 자 : 이 말은 《의산잡찬(義山雜簒)》 살풍경(殺風景) 조에 보이는데,
풍경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주D-002]옛사람은……일 : 남국(南國) 사람이 소백(召伯)의 덕을 추모하여 팥배나무를 아끼던
고사이다. 《詩經 國風 召南 甘棠》
桂陽草亭記
桂陽。僻在蓬艾之間。無一林泉勝境可以遊踐者。唯南山之側。有一亭焉。父老相傳云。故相國許公洪才
嘗典是州。初相其地。築石而臺之。故太守李諱實忠。疏水作沼。跨亭於其上也。一間十椽。覆之以茅。
示儉也。縱廣不過八尺。坐不過八人。殺其度也。水出巖罅。極寒冽如氷。雖盛夏入浴。毛髮立豎。不
可奈久。加以盤松茂樹。布陰產涼。淸風自來。畏景不逼。最愜於避暑。故有額曰滌暑。然州人猶以草
亭呼之。或曰。此地有奇形勝勢。尤利於爲州者。斯類巫瞽不經之說。儒者所宜愼導。然俚言野語。有
時而中。亦不可不信也。先僕之未到。忽爲燒琴煮鶴者所毀。荒涼舊地而已。予見而傷之。召州吏謂曰。
亭是李太守所創。庸害汝州。而乃敢毀耶。古人有思其人。不翦甘棠者。敢毀亭耶。吏默然而退。尋拾
舊材。咄嗟更搆。明日。以畢事來告。予與僚友置酒落之。噫。予以去歲孟炎。自補闕出守是州。至今
年六月。除拜禮部郞中起居注知制誥。將詣天闕。僚友諸君曰。此亭。太守所重開也。不留誌。無以使
後者知之。予然之。因書大槩。囑後來者之無輕廢毀。且爲李太守存不朽之迹耳。時庚辰七月日。老守
禮部員外郞李某記。
○계양망해지(桂陽望海志)
길이 계양(桂陽)의 변두리에 사방으로 나 있으나 한 면만 육지에 통하고 삼면은 다 물이다. 처음
내가 이 고을 수령으로 좌천되어 올 때 망망대해의 푸른 물을 돌아보니 섬 가운데 들어온 듯하
므로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보려 하지 않았다.
2년 후 6월에 문하성의 낭관에 제배되어 장차 날짜를 정하여 서울로 가게 되니, 전일에 보던 망망
대해의 푸른 물이 다 좋게만 보였다. 그래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모두 놀러가 보았다.
처음 만일사(萬日寺)의 누대(樓臺)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큰 배가 파도 가운데 떠 있는 것이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과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머리를 조금 드러낸 것과 같으며,
돛대가 가는 것이 사람이 우뚝 솟은 모자를 쓰고 가는 것과 같고, 뭇 산과 여러 섬은 묘연하게
마주 대하여 우뚝한 것, 벗어진 것, 추켜든 것, 엎드린 것, 등척이 나온 것, 상투처럼 솟은 것,
구멍처럼 가운데가 뚫린 것, 일산처럼 머리가 둥근 것 등등이 있다. 사승(寺僧)이 와서 바라보는
일을 돕다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자연도(紫燕島)ㆍ고연도(高燕島)ㆍ기린도(麒麟島)입니다.”
하고,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것은 경도(京都)의 곡령(鵠嶺), 저것은 승천부(昇天府)의 진산(鎭山)ㆍ용산(龍山), 인주
(仁州)의 망산(望山), 통진(通津)의 망산입니다.”
하며, 역력히 잘 가르쳐 주었다. 이날 내가 매우 즐거워서 함께 놀러온 자와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왔다.
며칠 후에 명월사(明月寺)에 가서 앞서와 같이 놀았다. 그러나 명월사는 많은 산들이 가려서
만일사의 툭 트인 것만 못하였다.
며칠 후에 다시 산을 따라 북으로 바다를 끼고 동으로 향하여 조수가 밀려오는 것과 해시(海市)
의 변괴를 구경하는데,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다가 피곤한 뒤에야 돌아오니, 함께 놀던 자
모모인이 모두 술병을 가지고 따랐다.
아, 저 물은 전일의 물이요 마음도 전일의 마음인데, 전일에 보기 싫던 것을 지금은 도리어
즐거운 구경거리로 삼으니, 그것은 구구한 한 벼슬을 얻은 때문일까? 마음은 나의 마음이거늘
능히 자제하지 못하고 이처럼 때를 따라 바뀌게 하니, 그 사생을 동일하게 하고 득실을 동등하게
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후일에 경계할 만한 것이기에 적는다.
桂陽望海志
路四出桂之徼。唯一面得通於陸。三面皆水也。始予謫守是州。環顧水之蒼然浩然者。疑入島嶼中。
悒悒然不樂。輒低首閉眼不欲見也。及二年夏六月。除拜省郞。將計日上道。以復于京師。則向之蒼然
浩然者。皆可樂也。於是凡可以望海者。無不遊踐。始於萬日寺樓上望之。大舶點波心。僅若鳧鴨之游
泳者。小舟則如人入水微露其頭者。帆蓆之去。僅類人揷高帽而行者。群山衆島。杳然相望。有屺者峐
者。跂者伏者。脊出者䯻擢者。中穿如穴者。首凸如傘頭者。寺僧來佐望。輒以手指點之。島曰。彼紫
燕也。高燕也。麒麟也。山曰。彼京都之鵠嶺也。彼昇天府之鎭也。龍山也。仁州之望也。通津之望也。
歷歷而數。如指諸掌。是日予甚樂焉。與與遊者觴之。乘醉而反。後數日。遊明月寺亦如之。然明月頗
有山之掩翳者。不若萬日之豁敞也。後數日。復循山而北。竝海而東。觀潮水之激薄與海市之變怪。或
乘馬。或步行。稍憊而後還焉。與遊者某某人。皆携壺縱之。嗚呼。水向者之水也。心向者之心也。以
向之所忌見者。今反爲嗜觀。豈以得區區一官之故歟。心吾心也。不能自制。使因時貿易之如此。其於
一死生齊得喪。得可冀乎。後尙可警故志之。
○손 비서(孫祕書)의 냉천정기(冷泉亭記)
운대 아감(芸臺亞監) 비서성 소감(祕書省少監) 손군(孫君)이 성북(城北)의 어느 마을에 새 집을
지었다. 큰 바위가 있어서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며, 형상은 쇠를 깎아세운 듯이 험준하여 청사
(廳事) 북쪽에서부터 동쪽 구석까지 창창하게 둘러 있다. 그 아래에 차가운 샘이 철철 흘러내려
고여서 깊은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그 맑고 깨끗함이 실로 아낄 만하다.
청사 동쪽에 붙여서 작은 정자를 걸쳐 지었는데 10여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다. 맑고 깨끗함이
산재(山齋)와 같으니, 이것은 편안하게 노닐고 한가롭게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가 귀인(貴人)의 사는 곳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정원을 꾸미는 데는 반드시 굴곡이 많고
우묵하게 패고 혹난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기이하게 생긴 돌들을 가져다가, 여러 개를 쌓아서 산을
만들고 형산(衡山)과 곽산(霍山)의 기이한 모습을 본뜬 것이 진실로 기묘하다.
그러나 그것은 조물주가 일찍이 개벽하여 놓은 높고 깊숙하고 기이하게 빼어난 천연의 형상만은
못하다. 저들도 또한 거짓이 진실만 못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귀의 힘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은 기이한 꽃, 이상한 나무, 진귀한 새, 기이한 짐승 같은 것뿐이요, 암석의 높고 크며 위엄찬
것 같은 것은 권력으로는 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억지로 가져오려고 하면 마땅히 큰 끌과 잘
드는 칼을 사용하여 조각조각 자르고 한장 한장 쪼개어 수레에 싣고 말로 끌어온 뒤라야 될 것
이다. 구차히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다만 깨어진 돌과 흩어진 자갈일 뿐이다. 설사 쌓아서 높게
한들 앞에서 말한 기괴한 돌을 여러 층 쌓아 산을 만든 것과 다름이 없다. 어찌 다시 높고 그윽
하며 기이하게 빼어난 천연 그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제 손군의 집은 그윽한 벽지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서울 안
만인이 살고 있는 사이에 있다. 그런데도 거대한 바위의 기이하고 아름다움이 이와 같으니, 손군
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손군의 높은 회포와 뛰어난 생각이 실로 진세(塵世)의 밖에 초월하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공명(功名)에 얽매인 바 되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푸른 산과 흰 구름에
있는 까닭에 하늘이 이것을 선사하여 위로함이라 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손군을 우러러보는
명망도 또한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내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북쪽에 서 있는 바위는 진실로 알맞아서 가감할 필요가 없지만, 동쪽에 있는 것은 너무 가까이
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심정을 퍽 답답하게 하니 떼어서 3~4척 물린다면 매우 좋겠다.”
하였더니, 주인도 또한 내 말대로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는 그 헌(軒)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명명
(命名)을 청하기에 내가 ‘냉천(冷泉)’이라 이름을 붙였더니, 어떤 손이 말하기를,
“이 정자가 명승(名勝)이 된 것은 다 이 바위 때문인데, 도리어 한 잔쯤 되는 작은 샘을 가지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 같다.”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바위는 비록 기이하지만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바가 적으며, 샘은 비록 얕더라도 능히 차가운
물이 젖과 같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줌이 원만하지 않은가? 이제 내가 그대와 더불어 차를 끓여
마시고 술을 걸러 잔질하는 것도 또한 샘의 베푸는 바가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샘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니, 손이 부드러운 낯빛으로 크게 웃었다.
손군이 또 나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청하였다. 아, 나와 나의 붓은 다 늙었다. 그러나 주인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본 바를 대충 적는다. 모월 모일에 보문각 대제전고(寶文閣待制典誥)
이모(李某)는 기(記)를 쓰고 뒤에 다시 40자(字)를 적는다.
발바닥 부르틀 정도로 기이한 봉우리 찾으면 / 累繭覓奇峯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지 않으랴 / 何處不相遇
힘으로 지고 오지 못해 / 力未負而來
돌아와 한갓 생각만 할 뿐 / 及廻空眷顧
부럽도다 그대 이 바위를 가져 / 羨君得茲巖
향로봉 향해 거주한 듯함이 / 擬向香爐住
하필 천태산을 사모하랴 / 何必思天台
멀리 백세조를 배우리라 / 遠學百世祖
[주D-001]천태산(天台山)을……배우리라 : 송(宋) 나라 때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에
들어가 약을 캐다가 신선을 만나 10세(世) 만에 고향에 돌아온 고사가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孫祕書冷泉亭記
芸臺亞監孫君。卜新宅于城北之某里。有巨巖高可數丈。形若削鐵者。巉巉然蒼蒼然。自廳事之北。
彌于東隅。其下有冷泉。泫然流出。渟成一泓。澄湛可愛。附廳事之東。架以小亭。可坐十許人。蕭洒
如山齋。是遊讌閑適之所也。予觀貴人之居多矣。其飾林園。必以怪石之盤窪癭瘤者。累之爲山。效衡
霍之奇。信妙矣。然未若造物者之所曾開闢。嶙峋奇秀天然之狀也。彼亦非不識假之不似眞也。然富貴
所能致者。如奇花異木珍禽奇獸之類是已。其若巖石之巍峨磊碨者。權力所不能來也。強欲致焉。當用
巨鑿利刃。片截叚剖。車載馬馱。然後似可矣。苟如是。特碎石與散礫耳。雖積而高之。其與向之累怪
石爲山者無別矣。寧復有嶙峋奇秀天然之舊狀耶。今孫君之居。非在幽遐僻遠之地。乃鳳城中萬人所寰
之間也。於焉有巨巖之奇勝如此。孫君得而有之。此豈君之高懷逸想。固超軼世外。而一爲功名所羈。
心未嘗不在靑山白雲。故天以此餉之。而有以慰之耶。巖瞻之望。亦基于此矣。予謂主人曰。巖之立于
北者。誠穩當無可增損。唯在東者甚迫近。使人情頗鬱。宜鑿開小却數四尺。則當極佳。主人亦以吾言
爲然。因指其軒。請予名之。予以冷泉名之。客有曰。此亭所倚以爲勝者。凡以玆巖也。反以一勺小泉
名之。似未宜也。予曰。巖雖奇。餉人之利小矣。泉雖淺。能以氷漿乳液潤人周矣。予今與若點荈而飮。
漉酒而酌。亦莫非泉之施也。可忍負乎。客破顔大笑。孫君又請予爲記。噫。予與筆俱老矣。然重違主
人之請。粗書所見耳。某月日。寶文閣待制典誥李某記。記後復題四十字云。
累繭覓奇峯。何處不相遇。力未負而來。及廻空眷顧。羨君得玆巖。擬向香爐住。何必思天台。遠學百
世祖。
○천개동기(天開洞記)
태화(泰和 금 장종(金章宗)의 연호) 2년 임술(1202, 신종 5)에 나는 성동(城東)의 옛집을 떠나
성남(城南)의 안신리(安申里)로 이사하였다. 찬샘[冷泉]이 마을 왼쪽에 있는 바위 틈에서 졸졸
흘러나오고 마을은 깊숙하고 지세는 아늑하여 산촌(山村)이나 야촌(野村)과 같으며, 맑고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든다. 나는 여기에 사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나 다만 동네 이름이 색동(塞洞)이어서 나
도 그 이름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뒤 몇 해 지나서 수재(秀才 생원(生員)의 별칭) 백정규(白廷珪)라는 사람이 이웃에 이사왔다.
그의 아버지인 우승선 한림학사(右承宣翰林學士) 모씨(某氏)도 간혹 와서 같이 있고는 하였다.
그가 가끔 나에게 말하기를,
“동네 이름이 매우 좋지 못한데 자네는 왜 고치지 않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이미 그렇게 부른 지가 오래이므로 이 동네만이 아니고 온 나라 안이 다 그렇게 부르니, 내가
비록 새 이름을 지은들,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명하여 모두 고친 대로 부르게 할 수 있겠
는가? 더구나 나 같은 한미한 사람이 명명한 것을 누가 따르겠는가?”
하고, 고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가 이 동네에 자리잡고 산 지 이제 벌써 20여 년이 되었다. 처음 이사온 뒤 몇 해도 안
되어서 한림(翰林) 벼슬에 제배되고, 빠르게 승진되어 영화스런 요직을 고루 거쳐서 이제 이미
4품(品)의 지위에 올랐다. 백군(白君)도 또한 마찬가지로 여기에 자리잡고 살면서부터 처음으로
벼슬하게 되었는데, 여러 번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이르렀다. 그 뒤로부터 좋은 관직과
풍족한 봉록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와 살게 되어 추기(騶騎 고관을 수행하는 말 탄 구종(驅從))의
오고감이 빈번하였으니, 나는 하늘이 장차 이 동네를 크게 개발할 것이라고 여긴다.
비(否)의 상태가 극도에 이르면 태(泰)의 상태로 돌아가고, 막힌 것이 오래되면 통하는 것은 음양
(陰陽)의 떳떳한 이치이다. 동네의 장래가 장차 열리려 하니, 나는 그 이름을 새로 지어서 하늘의
뜻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에 천개동(天開洞)이라 명명한다.
지금은 비록 사람들에게 내가 지은 동명을 부르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후세에 어떤 사람이 만인을
설득하여 모두 이 이름을 부르게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비록 부르지 않더라도 하늘이
만약 이름지은 뜻을 안다면 동네의 운이 더욱 열릴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더구나 처음의 이름인
색동도 사람들은 그대로 불렀는데 이같은 이름이 끝내 쓰이지 않겠는가?
정우(貞祐) 11년 계미(1223, 고종 10))에 적는다.
[주D-001]비(否)의 상태가……통하는 것 : 《주역》에 태괘(泰卦)와 비괘(否卦)가 있는데, 태괘
에는 “천지가 사귀어서 만물이 통창한다.[天地交而萬物通]”하여 양(陽)이 자라는 것을 나타냈고,
비괘에는 “천지가 사귀지 아니하여 만물이 통창하지 않는다.[天地不交而萬物不通]” 하여 음(陰)
이 자라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음양이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말한 것이다.
天開洞記
泰和二年壬戌歲。予去城東之舊居。卜遷于城南安申之里。有冷泉潺湲。出於洞之左趾之巖竇。洞深地奧。
如山村野居。蕭洒可愛。予居之甚樂。但洞名塞。雖吾亦不喜其名。後數載。有白秀才廷珪者來卜隣。
其嚴君右承宣翰林學士某。或來寓居。往往嘗謂予曰。洞名殊未佳。子盍改之耶。予對曰。業已呼之久矣。
非特此洞。擧一國皆呼之。予雖名之。豈盡戶曉。使皆導耶。矧微者所名。孰從之耶。遂不改至于今。然
予之卜居是洞。今已二十餘年矣。自始來不數載。得除拜翰林。驟歷華要。今已踐四品矣。白君亦如之。
自卜居于此。始得仕。累遷至侍御史。自爾美官豐祿者。衮衮來居。鬱乎騶騎之旁午。則予以爲天將大啓
玆洞矣。夫否極則泰。塞久則通。是陰陽常數。洞之將啓也。予不可以不新其名。以答天意。於是。乃名
之曰天開。今雖未使人導吾所名者。安知後世不有人能喩萬人。使皆得導玆名耶。人雖不呼之。天若知所
以名之之意。則洞之益啓也無疑矣。況始之名塞者。人猶從之。若玆名豈終廢者耶。貞祐十一年癸未歲記。
○의왕사(醫王寺)에 처음 창건된 아라한전기(阿羅漢殿記)
옛날 우리 불씨(佛氏)의 제자에 오백 대사(五百大士 오백나한(五百羅漢))가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아라한(阿羅漢)의 도(道)를 얻고 문득 그것을 구경멸도(究竟滅度)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화엄시(華嚴時)ㆍ녹원시(鹿苑時)ㆍ방등시(方等時)ㆍ반야시(般若時)를 겪었으나 오히려
대법(大法)을 증득(證得)하지 못했다가 일륜(日輪)이 정오가 되는 법화시(法華時)에 이르러 불지견
(佛知見)를 열어 대승장(大乘藏)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오백 성사(五百聖師)는 천태법문(天台法門)
에 있어서 인연(因緣)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경사(京師)에서 몇 보(步) 떨어진 지점에 의왕사(醫王寺)라는 옛절이 있는데, 천태 노숙(天台
老宿)인 혜발(惠拔)이 여기에 와서 거처하면서 낡은 것을 모두 수리하여 다시 새롭게 되었으니,
옛날 의왕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종문 상장 대선사(宗門上匠大禪師)인 각공(覺公)이 와서 놀면서 바야흐로 자씨전(慈氏殿)에 예불
하려다가 오백 존상(五百尊像)이 흩어져서 먼지에 파묻히고 단청이 희미해진 것을 보고 발공(拔公)
을 불렀다. 그들은 함께 먼지를 떨어내면서 같이 울음을 터뜨리고, 존용(尊容)을 우러러 모시는
일에 마음을 같이하였다. 그들은 함께 유일(遺逸)된 것을 찾고서 그 찾아내지 못한 것을 헤아리니
대범 27탱화(幀畫)였다. 발공이 선사(禪師)에게 말하기를,
“존상(尊像)이 여기에서 여러 해 동안 먼지에 파묻혀 있는 것을 여기에 상주하는 저희들로서
오히려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선사께서 비로소 발견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기다림이 있어서 그렇게
됨이 아니리까?”
하였다. 선사도 또한 한참 동안 한숨을 쉬었으며, 얼마 후에 화공을 모집하여 그려서 그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보충하였다.
시랑(侍郞) 최광재(崔光宰)가 그 옛 화상을 수리하기를 청하니, 선사가 흔연히 허락하였다.
옛 화상을 수리할 때 모두 물로 씻어내니, 먼지가 벗겨지고 색채가 드러나 모든 연식(緣飾)이 다
새롭게 되자 모두 단향목(檀香木)으로 축(軸)을 만들고, 아울러 주불(主佛)과 감재사자(監齋使者)
의 상(像)을 그렸다. 발공이 특별히 그 전각을 수리하고 이를 맞이하자 이 절이 비로소 오백
성사의 전각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은 그 성사(聖師)와 법문(法門)이 인연이 있는 소치인가?
처음 선사가 화공을 시켜 존용(尊容)을 그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그린 상을 주므로 선사가 먼저
한 상을 받아서 보니, 바로 두타상(頭陀像)이었다. 이튿날 화공이 와서 그림이 다 완성되었음을
알리고 우선 한 탱화를 주는데, 머리털이 드리워 이마가 덮인 것이 꿈에 보았던 것이었다.
또 한 여승이 최공(崔公)에게 한 탱화를 청하여 보수해서 돌려주려고 했으나 아직 끝내지 못하였다.
이때 최공의 부인은 여승이 청한 일을 모르고서 가서 그 탱화를 찾다가 찾지 못하였더니, 꿈에 한
중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이원(尼院)에 있다.”
하였다. 부인이 꿈에서 깨어 이상하게 여기고 이원에 가서 찾았더니 과연 그 탱화가 거기에
있었다. 아, 사람이 진실로 지성을 돈독히 하면, 지인(至人)이 물(物)에 응해줌이 이처럼 빈틈이
없으니, 그 빠르게 응함을 어찌 논하랴?
또 존상이 오래도록 묻혀 있었는데 우리 대선사(大禪師)가 비로소 발견하여 그 궐루된 것까지
보충하였으니, 산(山)을 만드는 일에 비유한다면, 그 산이 이미 둥그스름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거기에다 더 높게 쌓아올린 자는 발공과 최공이요, 사문(斯文)에 의탁하여 그 공을 새기려는
자는 거사(居士) 춘경(春卿)이다. 거사도 또한 유자(儒者)로서 지관(止觀)을 배운 사람이다.
이들이 모두 합력하여 일이 원만하게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후일에 오백보명여래(五百普
明如來)를 보게 된다면, 이것은 어찌 오늘날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명창(明昌) 6년(1195, 명종 25) 모월 모일에 적는다.
[주D-001]아라한(阿羅漢) : 불가의 말로 소승(小乘)의 교법(敎法)을 수행하는 성문사과(聲聞四果)의
가장 윗자리이다.
[주D-002]구경멸도(究竟滅度) : 불가의 말. 구경(究竟)은 최상의 뜻, 멸도(滅度)는 열반(涅槃)을
번역한 말이니, 즉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진리를 궁구하여 불생 불멸(不生不滅)
의 법을 체득한 최상의 경지라는 뜻이다.
[주D-003]화엄시(華嚴時)……법화시(法華時) : 불가에서 부처의 1대 교설의 차례를 5시로 구별한다.
화엄시(華嚴時)는 성도 후 최초의 21일 동안에 《화엄경(華嚴經)》을 설한 시기, 아함시
(阿含時)는 그 다음 12년간 녹야원(鹿野苑)에서 《아함경(阿含經)》을 설한 시기, 방등시
(方等時)는 다음의 8년간 《유마경(維摩經)》ㆍ《금광명경(金光明經)》ㆍ
《능가경(楞迦經)》ㆍ《승만경(勝鬘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 등 방등부의 여러
경을 설한 시기, 반야시(般若時)는 다음의 22년 동안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
을 설한 시기, 법화 열반시(法華涅槃時)는 최후의 8년간 《법화경(法華經)》을 설하고
입멸시(入滅時)에 《열반경》을 설한 시기이다.
[주D-004]불지견(佛知見) : 제법 실상(諸法實相)의 이치를 깨닫고 비추어보는 부처의 지혜를 말한다.
[주D-005]대승장(大乘藏) : 성불하는 큰 이상에 이르는 도법을 밝힌 경전의 총칭, 즉 《화엄경》ㆍ
《법화경》ㆍ《반야경》ㆍ《무량수경》등을 말한다. 장(藏)은 저축, 또는 포함하는 뜻이
있고, 경전은 글과 뜻을 포함하였으므로 장이라 한다. 대승경(大乘經).
[주D-006]주불(主佛)과 감재사자(監齋使者) : 주불은 주세불(主世佛)의 약칭으로 부처 중에 가장
으뜸되는 부처이고, 감재사자는 선종(禪宗)에서 대중의 식물을 감독하는 신으로 감재보살
(監齋菩薩)이라고도 한다.
[주D-007]지관(止觀) : 정(定)ㆍ혜(慧)를 닦는 불교의 수도 방법이다. 지는 정지(停止)이니 정적
(靜的)으로 마음을 거두어 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며, 관은 관달
(觀達)이니 동적(動的)으로 지혜를 내어 관조(觀照)하여 진여(眞如)에 계합(契合)하는
것이다.
醫王寺。始創阿羅漢殿記。
昔者。我佛氏之弟子有五百大士。初得阿羅漢道。便自以爲究竟滅度。故閱華嚴鹿苑方等般若四時。
猶未證大法。至法華日輪亭午時。開佛知見。入大乘藏。則五百聖師於天台法門。爲有因矣。今夫距京
師若干步。有古殘寺。曰醫王。天台老宿惠拔來居之。悉修廢更新。非復舊醫王也。宗門上匠大禪師覺
公來遊。方禮慈氏殿。見五百尊像散頓陬隙。霾侵塵蝕。丹靑漫暗。遂召拔公。相與拂拭。異眼而同泣。
仰弔尊容。四手而一心。共尋遺逸。課其所未得。則凡二十有七幀也。拔公謂禪師曰。尊像之在此。歷
祀爲塵埃所蔽。雖常住如吾輩者。猶不得而見之。至禪師始見而發之。此豈無待而然耶。禪師亦噓戲良
久。尋募工繪畫。補其所未得者。其古像則崔侍郞光宰請緝理之。師欣然許之。其理之也。悉以水類洗。
垢落色見。宛然稍新。凡緣飾無不新之。皆軸以檀香。并畫主佛監齋使者像。拔公特新其殿以迎之。是
寺於是始有五百聖師之殿。此豈聖師與法門因緣之致耶。初禪師命工畫尊容。夢有人以所畫像授之。師
先受一像視之。乃頭陀像也。明日。畫工以功畢來告。果先授一幀。髮垂過額。其夢中所見也。又有一
尼請於崔公得一幀。欲補還之而未爾。夫人未知尼之請去。搜尋未得。夜夢一僧來告曰。我在尼院。夫
人覺而異之。訪於尼院。果得焉。噫。人苟有篤誠。則至人之應物也。如符合吻交。若此其速。庸可議
乎。且尊像之久沒也。我大禪師。始見而發之。乃至補足其闕。則譬之爲山。幾已穹然矣。其從而築之。
增至岌嶪者。拔公崔公之謂也。託斯文而欲勒此功山者。居士春卿也。居士亦儒衣而學步止觀者也。
合是而能事畢矣。若他日得見五百普明如來。此豈非今日之因歟。明昌六年月日記。
○현종원 중창기(懸鐘院重創記)
심하도다, 길 다니는 자의 어려움이여. 간험한 길을 걷노라면 발바닥이 부르트고 더운 날씨에
가노라면 목구멍에서 화기가 난다. 이런 때에는 시원한 곳에 쉬어 맑은 샘물을 마셔서 순조롭게
섭생을 한 다음에야 피로가 풀려서 편안하게 되니 이것은 인정의 떳떳한 이치다. 만일 불행하게도
수고로움과 목마름을 참고 또 먼 길을 간다면 그 이른바 인정의 떳떳한 이치라는 것은 어그러져서
도리어 역리(逆理)가 되고, 병의 싹이 이로 말미암아 생길 것이다. 혹 우설(雨雪)이 마구 쏟아질
때 피할 곳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사슴처럼 풀 속이나 숲 속에 엎드려야 할 것인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왕인(王人 왕명을 받든 사람)ㆍ대빈(大賓) 같은 이들이 어떻게 감히 들판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정(亭)ㆍ관(館)ㆍ원(院)ㆍ우(宇)가 지어지게 된 것이다.
현종원(懸鐘院)은 남쪽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는데, 무너진 지 오래되어 행인(行人)이 묵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동서로 왕래하는 자들이 이를 괴롭게 여긴다.
김해부(金海府) 아전인 아무[某]가 개연히 이것을 수리할 뜻을 가지고 가산을 모두 털어서 구암사
(龜巖寺)의 중 아무를 시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공인을 모으고 재목을 모아서 그 집을 한번
새롭게 하되, 육중한 들보와 웅장한 마룻대로 그 내면을 장엄하게 하고 높은 문과 큰 중문으로
그 외면을 견고히 하며, 높은 담으로 둘러서 사방을 튼튼하게 막았다. 이렇게 한 뒤에야 행인으
로서 여기에 들어 묵게 되는 자는 마치 금성(金城 견고한 성)에 드는 것과 같아서 밤에 마음 편히
묵는다.
앞에 한 정자를 세워 거기에 평상과 방석 등을 두어서 휴식 장소로 대비하고 사발과 잔 등 물
떠먹는 기구를 마련해 두니, 앞에서 말한 발바닥이 부르튼 자와 목구멍에서 화기가 난 자가 쉴
수 있고 마실 수 있어 각기 그 바라는 바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빈객(賓客)을 묵게 하는 집은 낮게 지어서 빈객들의 전망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락을
올려서 그 거처를 높이되, 동자기둥을 나는 듯 세우고 두주를 달아나는 듯 꾸며서 공중에 우뚝
솟아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남쪽을 바라보면 창해의 돛단배들이 즐비하고, 서쪽을 바라보면 촌락이 펼쳐 있다.
아래에는 연당(蓮塘)과 유저(柳渚)가 있어 백로(白鷺)와 취금(翠禽)이 날아 서로 왕래하면서 부침
유희하니, 그것은 마치 때를 타서 득의한 자의 즐거움과 같다. 앞에서 말한 왕인ㆍ대빈으로서
왕래하는 자가 절(節)을 멈추고 이 다락에 오르면 표표히 일어나는 놀과 같이 소요(逍遙)하고
언앙(偃仰)하지 않음이 없으리니, 다만 눈비를 피하여 행차를 멈출 뿐 아니라, 해가 넘어가도
떠나는 일을 잊을 것이며, 떠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자주 뒤돌아보며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나
친한 벗을 만나 차마 이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할 것이다.
아, 세상에서 높은 벼슬과 후한 녹을 차지한 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이나 더 잘할 것만 생각할 뿐,
물(物)을 구제하고 사람을 이롭게 할 것으로 뜻을 삼는 일이 반드시 적은데, 아무는 다만 한
고을의 관리일 뿐이어서 공사간에 분주하노라면 여가가 없을 터인데도 유독 분발하여 일시의 비용
을 가벼이 여기고 만세의 이익을 중히 여기며, 일신의 노고를 잊고 만인의 안일을 도모하여 삽시
간에 이와 같이 건립하였으니, 이것은 누가 독려하고 누가 분부한 것일까? 실은 천심에서 우러나
저절로 한 것이니, 이야말로 독실하고 근실하고 지성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족자(族子)인 진사(進士) 김모(金某)가 이 공적을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전말을 대략
적어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매우 성근(誠勤)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차서로 엮어서 글을 만들
었을 뿐, 그 옥우영동(屋宇楹棟)의 다소와 공역일월(工役日月)의 시말에 대한 것은 모두 열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승안(承安) 3년(1198, 신종 1) 모월 모일에 적는다.
懸鐘院重刱記
甚矣。行路者之難也。觸涉艱梗。足累繭矣。奔喘暑熱。喉生煙矣。方是時。息爽塏嚥淸甘。有以順攝
然後釋然夷泰者。人情之常理也。脫不幸奈勞忍渴。又適遐阻。則其所謂淸之常理乖戾反逆。而病之芽
孼。由此而生矣。其或雨雪暴作。顧鬜然無所依庇。則無奈草跧林伏。麕鹿之若也。何況如王人大賓者。
敢舍於野哉。是亭館院宇之所由作也。懸鐘院者。南路之要會也。頽壞寢久。行人不得宿。則東西往來
者病之。金海府吏某甲。慨然有肯構之志。悉罄其家貨。使龜巖寺浮屠某句當之。鳩工庀材。一新其宇。
豐梁傑棟。以壯其內。崇門大閎。以固其外。繚之以脩築高墉。備捍衛四阿。然後行旅之入宿者。如入
金城。夜不相警焉。前立一亭。置床茵以備休息之所。設甌勺以資挹酌之具。向之繭其足者。煙其喉者。
求息求飮。各充其望焉。舍賓客。不宜使夷庳而錮遠目。故樓以崇其居。飛枅走栱。上出鳥道。南望蒼
海。桅檣相望。西望墟落。村閻撲地。下有蓮塘柳渚。白鷺翠禽。飛相往來。浮沈遊戲。其若乘時得意
者之樂也。向之王人大賓行使往來者。弭節而登此樓。則飄飄若霞擧。莫不逍遙偃仰。非特避雨雪息騶
馭。抑移日忘去。去必屢顧眷眷焉。如遇佳人勝友而不忍別也。嗚呼。世之有重官豐祿者。顧自奉何如
耳。鮮必以濟物利人爲意者。某甲直一州之吏耳。奔公走私。宜若不給。而獨奮然發志。輕一時之費。
重萬世之利。忘一己之勞。規萬人之逸。於咄嗟間。其所樹立如此。此孰督之而孰命之耶。良由天機自
動。得於中而應於外也。是可謂惇篤謹愿至誠者歟。其族子進士金某欲爲不朽之圖。草具本末。乞予爲
志。勤且誠。故但次而文之耳。其屋宇楹棟之多少。工後日月之始卒。皆不列以請。故未之載也。承安
三年月日記。
○개천사(開天寺)의 청석탑기명(靑石塔記銘)
종실(宗室)인 광릉후(廣陵侯) 면(沔)이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담박한
생각이 있었다. 방외(方外)의 교우(交友)에 고승(高僧) 아무가 있었는데, 그가 풍세현(豐歲縣)의
남쪽 땅에 가서 개천사(開天寺)라는 옛절을 얻어 바야흐로 다시 창건하려 하였는데, 광릉후가
시주(施主)가 되어 더욱 힘이 되었다.
고승의 수제자의 제자인 현규(玄規)가 이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스승께서 창건한 것이 이와 같은데, 내가 그 문하에 있으면서 한 가지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또한 하나의 수치다.”
하고, 이에 드디어 범어(梵語)의 이른바 솔도파(窣堵波)라는 것을 세우되, 모두 청석(靑石)을 사용
하여 빙빙 돌려 쌓아 올려서 만들었는데 대범 13층이었다. 탑이 이미 완성되자 광릉후에게 이 일을
보고하고, 또 말하기를,
“중이 먹는 것도 모두 국토에서 나는 곡물입니다. 그런데 만약 안일하게만 지내고 국가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도 없이 죽는다면, 나라의 은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국가에 복을 빌어
바치려는 생각에서 이제 이 하찮은 석탑을 세워 이미 완성되었으니, 글 잘하는 사람에게 명(銘)을
받아서 이 사적이 길이 썩지 않게 하려는 생각뿐입니다.”
하였다. 광릉후가 그 말을 듣고 그의 마음가짐이 성실하여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가상히
여기고서, 농서(隴西) 이춘경(李春卿)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명(記銘)을 부탁하였다. 내 비록 글을
잘하지는 못하나, 의리상 남의 선행(善行)을 덮어 버리고 싶지 않으며, 또 광릉후의 부탁을
어기기 어려우므로 삼가 받아들여 명을 쓰노니 때는 황상(皇上 고려 고종)의 즉위 원년(1214)
모월 모일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쌍림에서 멸도하신 분 / 雙林滅度
바로 우리 대웅이다 / 是我大雄
이미 멸했다 한다면 / 若云已滅
일체가 모두 공이니라 / 一切皆空
비록 탑이 온전한 몸이나 / 雖塔全身
속에 무엇이 있으리오 / 何有於中
이 멸은 멸이 아니요 / 是滅非滅
구경에는 무루한 것이다 / 究竟無漏
백억이나 화신을 하였는데 / 百億化身
어디엔들 보지 못하랴 / 於何不覩
그렇다면 이 탑은 / 然則是塔
역시 부처가 머문 곳이라 / 亦佛所住
부처는 어디에서 오며 / 佛從何來
탑은 다시 무슨 물건인고 / 塔復何物
탑을 보고 탑을 잊어야 / 見塔忘塔
보탑이 이에 나오리 / 寶塔乃出
이 탑으로 인하여 / 由是塔故
제불을 보게 되리라 / 得見諸佛
[주D-001]솔도파(窣堵波) : 사리(舍利)의 봉안이나 절의 장엄을 표시하는 목적으로 쌓은 탑이다.
[주D-002]무루(無漏) : 누(漏)는 객관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육근(六根) 즉 안근(眼根)ㆍ이근
(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의근(意根)에서 허물을 누출(漏出)한다는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 따라서 무루는 번뇌와 함께 있지 아니함을 말한다.
[주D-003]화신(化身) : 화현(化現)하는 불신(佛身)을 말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알맞는
대상으로 화현(化現)하는 것이다.
開天寺靑石塔記銘
宗室廣陵侯沔。軒裳中。有出塵之想。淡如也。方外之交。有高僧某者。就豐歲縣之南壤。得古寺曰開
天。方創而新之也。侯爲之檀越。尤有力焉。師之高弟弟子玄規見之。乃嘆曰。師所樹立如此。吾居其
門。無一事有所措焉。則亦一恥也。於是遂立梵所謂窣堵波者。悉用靑石爲之。展轉盤互。凡十有三級。
旣成。遂報於侯。且曰。髡所腐亦土毛。若恬安汨沒。無分寸之效。而溘先朝露。則其若國恩何。用是
思有以奉福朝家者。今營此區區一石浮圖。旣辦矣。第待爲文者銘之。爲不朽之圖耳。侯聞其言。嘉其
所守惇固有不可欺者。書抵隴西李春卿。託以記銘。予雖不能文。義不欲蓋人之善。且重違侯請。敢受
而銘之。時皇上卽祚之元年某月日也。銘曰。
雙林滅度。是我大雄。若云已滅。一切皆空。雖塔全身。何有於中。是滅非滅。究竟無漏。百億化身。
於何不覩。然則是塔。亦佛所住。佛從何來。塔復何物。見塔忘塔。寶塔乃出。由是塔故。得見諸佛。
○묘향산(妙香山)의 보현사(普賢寺)에 있는 당주(堂主)인 비로자나여래(毘盧遮那如來)의 장륙소
상기(丈六塑像記)
부처가 멸도한 지 오래여서 유상(遺像)이 있지 않으니, 어느 곳에 귀의하겠는가? 그렇다면 부도
(浮屠)들이 불상(佛像)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직책이니, 우리 유가자류(儒家者流)가 공자의 상을
그려서 받드는 일과 같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나와 같이 불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자나 무료한 자들이 있어, 부도를
가장하고서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겠다고 큰소리치나 그 실상은 자신들의 생활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사람에게 믿음을 사야만 하므로 먼저 기이한 행동을 하기에 힘쓰되,
얼굴을 수척하게 하고 때가 낀 옷을 입으며, 머리를 태우고 팔뚝을 지지는 등 못하는 일이 없으며,
혹은 겨울에 눈길을 맨발로 걸어 높은 소리로 염불을 하면서 이길 저길을 따라 가가호호를 샅샅이
찾아다니되 따르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권유 또는 강압하여 한 푼의 돈, 한 치의
포백이나마 기필코 받아내고야 만다. 이것은 스스로 지옥에 갈 짓을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간탐(慳貪)ㆍ비방(誹謗)의 죄를 얻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성실한 자는 비록 그 외모를 꾸미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받들고,
마음이 거짓된 자는 비록 기이한 행동을 보여 사람들에게 현혹됨을 구한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공경하는 자가 적게 되니, 이는 이치의 떳떳한 것이다.
비구(比丘)인 학주(學珠)는 참으로 거짓없이 성실한 자이다. 그는 일찍이 묘향산 보현사에 거하여
초의(草衣)를 입고 한가히 앉아 홍진(紅塵)을 멀리한 지 오래였다. 보현사는 북쪽 지방에서
유명한 절이라, 고인(高人)ㆍ석자(釋子)나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의 집결장소이다.
정우(貞祐) 모년 병자(1216, 고종 3))에 거란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여 불사(佛寺)와 신사(神祠)
할 것 없이 마구 불태워 이 절도 또한 타버리게 되고 불상과 모든 시설도 없어졌다.
대사가 개연히 분발하여 불상을 모시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좁은 지역의 힘으로는 이처럼 거대
한 일을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그는 매양 대중이 모인
자리마다 그 불상을 만들어야 할 의견만을 말할 뿐 강력히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말을 들은 사람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상방(上方 임금)으로부터 공후(公侯)ㆍ경상(卿相)ㆍ선남(善男)ㆍ신녀(信女)에 이르기
까지 모두 시주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모여진 진화(珍貨)는 산처럼 쌓였다.
그래서 대사는 그 경비를 충당하여 곧 당주인 비로자나여래의 장륙상과 그 보처(補處)인 문수
(文殊)ㆍ보현(普賢) 두 보살의 존상을 만든 다음 모두 금은과 온갖 보화로 광채가 찬란하게
꾸미니, 범상(梵相)이 완전히 갖추어져서 의젓이 입이 말을 하고 눈이 움직이는 것 같고, 청정
(淸淨)한 법신(法身)이 완연히 앞에 있는 것과 같았으며, 종경(鐘磬)ㆍ노항(鑪缸)의 기구까지도
그 제작을 극도로 해서 호사스럽게 꾸미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니 아, 이처럼 거대한 일을 고관
대작이 경영했더라도 그 노고와 경비를 감당하지 못했을 터인데, 학주는 한낱 중인데다가 여러
사람을 규합하여 조금씩 거두어 모은 다음에 만들었으나 힘이 적게 들고 효과가 신속함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반드시 만겁(萬劫)의 숙원(宿願)인 소치이리라.
불상이 완성되자 임시로 상국(相國) 최공(崔公)의 별재(別齋)에 안치하니 진신 사대부(搢紳士
大夫)와 고인(高人)ㆍ운사(韻士)들이 운집하여 진신(眞身)을 뵌 것처럼 막배(膜拜)하였고,
게송(偈頌)으로 범상(梵相)을 형용하는 자도 부지기수였다.내가 일찍이 대사에게 말하기를,
“대저 심법(心法)으로 본다면 곧바로 그 정상(頂上)을 밟으려고 해야 할 터인데, 자네는 바야
흐로 그 상을 만들고 있으니, 그 견성(見性)에 있어서 또한 멀지 않겠는가?”하였더니, 대사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세속과 인정의 야박함이 매우 심한데, 어찌 사람마다 모두 곧바로 깨닫는 뜻을 알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인정이란 환경을 대해서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연을 얻은 다음에
참된 도(道)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네. 내가 이 상을 만드는 것은 대개 사람들을 진여(眞如)에
돌아가게 하고, 사람들을 경불(敬佛)하게 하려는 것이네.”
하므로, 나는 비로소 그 말을 옳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사는 말하기를,
“자네가 이미 나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니, 나를 위해서 기문을 지어야 옳을 일이네.”
하기에, 내가 글을 잘할 줄 모른다고 사양하였더니 대사는 듣지 않고 나의 집을 수십 번이나 찾아
와서 요구하므로, 나는 그의 고집이 그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드디어 기문을 쓴다. 대사도 꽤
글을 잘 짓는 처지에 부처를 찬양하는 송(頌)을 지었는데, 그 뜻에 족히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정우 11년 계미(1223, 고종 10) 2월 일에 모(某)는 적는다.
[주C-001]장륙소상기(丈六塑像記) : 한 길 6척 되는 소상에 대한 기문(記文)이다.
[주D-001]머리를……지지는 : 불가에서 진법(眞法)을 수련하는 한 방법이다.
[주D-002]선남(善男)ㆍ신녀(信女) : 불가에서 불교를 신앙하는 남녀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D-003]보처(補處) : 불가의 말로 전불(前佛)이 이미 입멸(入滅)한 뒤에 성불(成佛)하여 그곳을
보충한다는 말이다. 주불(主佛)의 좌우에 모신 보살을 말한다.
[주D-004]법신(法身) : 법(法)은 진여(眞如)의 뜻이니, 즉 법계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의 진신
(眞身)이란 말이다.
[주D-005]막배(膜拜) :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서 절하는 일이다.
[주D-006]견성(見性) : 불가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숙어로 쓰는데, 즉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한다.
妙香山普賢寺堂主毗盧遮那如來丈六塑像記
佛滅度久矣。不有遺像。安所歸心。然則浮屠者之營造佛像。乃其職也。如吾儒家者流。繪畫夫子之像
而宗事之也。雖然。其間有予所不悅者。若無賴男子假形浮屠。聲言營寺造佛。而其實自奉者是已。此
則規有以取必於人。先務爲奇行。乃殘形垢服。燃頭灼臂。無所不爲。或冬月洗足踏雪。大其聲唱其願。
徇路行喝。乃至千門萬戶。無所不踐。有不隨喜者。輒諭之強之。必取銖金寸帛然後乃已。此非特自造
墮地獄之業。亦焉知不使人得慳貪誹謗之罪耶。何則。心之誠者。雖不飾其外。人悅而奉之。內之僞者。
雖務奇示異。求眩於人。鮮克有心敬者。理之常也。比丘學珠。實誠而不僞者也。嘗棲妙香山普賢寺。
草衣宴坐。不迹紅塵者久矣。普賢寺者。北地之名寺也。凡高人釋子遺世鍊眞者之所嘗遊集也。越貞祐
某年丙子。契丹闌犯封境。無佛寺神祠。皆焚滅之。是寺亦爲煨燼。像設從而蕩掃。師慨然發憤。思欲
營妥佛像。自以爲偏方小土。不可以成大事。遂間開徑到京師。每於稠人中。但言其所以營之之意。而
不力於丐請。然見其貌聞其言者。無不悅而奉之。自上方至公侯卿相善男信女。皆願爲檀那。其委珍貨
如山積焉。師於是充其經費。乃塑成堂主毗盧遮那如來丈六像及其補處文殊,普賢兩菩薩尊像。悉飾以
金銀百寶。使光彩爛發。梵相具足。儼然若口言目動。而淸淨法身。宛如在前。至於鍾磬鑪缸之具。無
不極其制而侈焉。噫。此大事也。脫使巨官腆祿者營之。有不堪其勞費者。學珠特一鉢髡耳。雖集衆緣。
銖積寸累。然後爲之。顧力省效敏如此。則是豈偶然哉。必萬劫宿願之所漸也。及成。權措于相國崔公
別齋。縉紳士大夫高人韻士。無不坌集膜拜。如見眞身。其以偈頌形容梵相者。不可勝計。予嘗謂師曰。
夫以心法觀之。猶欲直踏其頂上。吾子方且塑其像。其於見性。不亦遼乎。師笑之曰。世薄民偸甚矣。
焉得使人人皆坦然知直悟之旨耶。凡人情。對境起想。由想得因。然後入於道眞者也。予之營此像。
蓋欲驅人以歸眞。勖人以敬佛耳。予始頷之。師曰。子旣頷吾言。其爲我記之可乎。予以不能文爲解。
師不聽。凡納踵於吾門者累十。予懼其不已。遂筆之。師亦頗能屬文。著讚佛頌。其意有足觀者。貞祐
十一年癸未二月日。某記。
○혁 상인(赫上人)의 능파정기(凌波亭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권호(權豪)와 귀인(貴人)이 정사(亭榭)를 짓고 유관(遊觀)의 낙을 가져도
사람들은 오히려 간혹 비난하는데, 하물며 중으로서 이런 일을 힘쓰는 것은 사치에 지나쳐 도(道)
에 어긋나는 일에 가깝지 않은가?”
하나, 나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인정이 모두 청련불계(靑蓮佛界)나 백옥선대(白玉仙臺)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개 그 땅이 청정(淸淨)하여 티끌이 없기 때문이다. 무릇 땅이
청정하면 마음도 청정한 법이니, 마음이 청정하면서 탁악(濁惡)과 열뇌(熱惱)에 지배되는 일은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비록 인간세상에 있더라도 진실로 땅의 청정함을 얻어서 그 심려
(心慮)를 씻을 수 있다면 이것도 또한 불계(佛界)이며 선대(仙臺)인 것이니, 어찌 청련불계나
백옥선대를 부러워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마음을 닦는다면 불계나 선계를 밟는 일에도 한 길이
될 것이다.”하였다.
삼악산인(三岳山人) 종혁(宗赫)이란 자는 본래 조계(曹溪)의 운사(韻士)이다. 그는 일찍이 방외
(方外)에 방랑하여 뜬구름 같은 행적이 오래 계속되더니, 정우(貞祐) 모년에 우연히 수춘군
(壽春郡)의 덕흥(德興)이란 곳에서 옛 사원(寺院)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의 산수가 좋기 때문에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집이 쓰러진 것은 모두 고치고, 담이 무너진 것도 새로 쌓는 등 옛날의 체제보다 더욱 확대시켜서
여러 중들이 모여와서 살 곳을 넓혀 놓았다. 그런 다음 ‘빈객들이 경유하게 되면 나는 그들에게
처소를 제공하고 응접하는 예(禮)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우(佛宇) 가운데에 그들의
호방(豪放)한 심정과 방자한 몸가짐으로 유상(遊賞)하며 연희(宴喜)하는 장소를 둘 수는 없다’
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절 곁에 물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물결 밑에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정자를 걸쳐 지은 다음 띠풀로 지붕을 덮었으니,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그림으로 장식한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다.
그 정자 위에서 유연(遊宴)을 하게 되면, 좌빈(坐賓)들의 부앙굴신(俯仰屈伸)과 일빈일소(一嚬
一笑)하는 모습이, 배반(杯盤)ㆍ궤석(几席)ㆍ준호(樽壺)ㆍ기국(棋局)의 그림자와 함께 수면에
비치니, 그것은 마치 밝은 거울 속으로부터 인물(人物)과 즙기(什器)의 나열된 것이 영사(映寫)
함을 보는 것과 같다.
봄철 맑은 물에 일광이 내리비칠 때에는 수백 마리쯤 되는 물고기가 떼를 지어 헤엄치는데, 굽어
보면 환히 보여 셀 수가 있으며, 가을 8~9월쯤 되어 나뭇잎은 반쯤 떨어지고 서리는 내리고 물은
맑은데 단풍나무가 언덕에 늘어서서 거꾸로 물결 위에 비치매, 찬란하기가 마치 강 가운데에서
비단을 빠는 것과 같으니, 이런 것들 때문에 물 위에 있는 정자가 승경(勝景)이 되는 것이다.
그 경치의 대략은 이러하거니와, 절이(絶異)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 무어라고 형언할 수가 없다.
이것을 보는 자는 자기 마음속에 스스로 알고 있을 뿐이다. 만일 남에게 자랑한다면 말하는
입이 능히 보는 눈만 못하다. 화가는 그 대체만을 형상할 뿐이다. 아무리 잘 그린다 해도 그
단청(丹靑)이 능히 진상과 같지 못하다.
아, 이러한 것으로 빈객을 대접하는데, 그 누가 중이 정자를 짓고 유관의 낙을 갖는 것을 마땅치
않다고 하겠는가? 중국 사신으로부터 행려(行旅)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오가는 자들은 모두 이곳
을 유람하게 된다. 그들이 여기에서 한가히 노닐 때에는 그들의 심정은 마치 청란(靑鸞)과 백학
(白鶴)을 타고 우주의 밖을 나가는 것과 같으리니, 백옥선대를 구태여 칭할 것 있겠는가?
유람하는 자도 오히려 이러하거든, 이 정자에 항시 한가히 앉아서 맑은 경치를 실컷 누리는
우리의 선로(禪老)와 같은 이들은 생각건대, 이미 청련불계와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도에 어긋난다고 하겠는가?
혁공(赫公)은 본디 글을 좋아한지라, 나의 벗 한홍(韓鴻)을 중개로 해서 나의 기문을 빌려 정자
의 장식을 하여 후세에 전하려고 한다기에 나는 승낙하지 않고 2년 동안 끌었더니, 한군(韓君)이
성내는 기색이 보였다. 그래서 대충 그 한두 가지를 적고 따라서 그 현액을 능파정(凌波亭)이라
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자가 물 위에 솟아 있기 때문이다.
아, 나도 또한 늙었으니, 후일에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복건(幅巾)과 여장(藜杖)으로 그 가운데
가서 놀면서 풍월(風月)의 주인이 되어 1편의 글과 1수(首)의 시로 무궁한 경치를 다 모사하여
오늘날 그리워 잊지 못하는 나의 소원을 갚으리라. 호산(湖山)이 영(靈)이 있거든 아직 기다려다오.
정우 11년(1223, 고종 10)에 백운거사 대제전고(待制典誥) 이춘경(李春卿)은 기록한다.
赫上人凌波亭記
或曰。權豪貴人之有喜爲亭榭游觀之樂。人猶或非之。況浮屠而務爲此者。其無奈幾於夸浮羨侈而戾於
道耶。予曰。非也。且人情之皆欲至於靑蓮佛界白玉仙臺者。無他焉。蓋以其地之淸淨無塵故耳。夫地
之淸淨。則心亦爾也。未有心淸淨而爲濁惡熱惱之所乘者也。由是觀之。雖在人間世上。苟得値地之淸
淨。而有以汰其心慮。則是亦佛界也仙臺也。何羨於彼哉。由是而習焉。其蹈佛仙境界。亦其漸也。三
岳山人宗赫者。本曹溪韻士也。嘗放浪方外。浮雲其迹者久矣。越貞祐某年。偶得古院於壽春郡之坤維
號德興者。以其山水可愛。故因駐鍚焉。其棟宇之欹仄者悉更之。垣墻之頽圮者亦新之。乃至恢拓舊制。
以廣其群髡棲集之地。然後意以爲有賓客之經由。吾不可不供其位。廢應接之禮矣。雖然。於佛宇中。
亦不可置其放情肆體遊賞宴喜之所矣。於是選寺之傍地有水之泓碧漣漪者。遂植礎波底。跨亭於其上。
以茅覆之。遠而望之。若輕舟畫舫浮在滄浪然也。有遊讌其上。則凡坐賓之俯仰屈伸一嚬一笑之態。與
夫柸盤几席樽壺棋局之影。瀉在波面。若從明鏡中見人物什器之羅列映澈者。至如春水漫淥。日光涵明。
有魚可數百尾遊泳族戲。俯鑑之了了然可數。或涼秋八九月時。木葉半脫。霜落水淸。丹楓夾岸。倒映
波上。爛然若濯錦江中。此皆水亭所以爲勝也。雖大略如此。至絶異處又不可得而名言矣。見之者心自
知耳。若傳夸於人。則口不能如眼也。畫之者。狀其粗耳。丹靑不能似其眞也。噫。以此餉客。其誰謂
浮屠不宜有亭榭游觀之樂乎。自皇華星節。至于行旅之東西者。莫不遊踐。方其逍遙盤薄也。意若控靑
彎跨白鶴。出乎八極之表矣。何白玉仙臺之足導哉。遊者尙爾。如吾禪老之常宴坐飽淸景者。想已與靑
蓮佛界爲隣矣。何謂戾於道耶。赫公素喜文。憑予友韓鴻傳乞予爲記。欲爲亭之飾而傳之後。予不頷凡
二年。韓君不能無慍色。然後粗志其一二。而因署其額曰凌波。蓋以亭之拔水斗起也。嗚戲。僕亦老矣。
異日當掛冠高謝。以幅巾藜杖。往遊其中。作風月主人。而於一篇一詠。盡瀉無窮之景。以償予今日之
懸懸傾佇也。湖山有靈。姑需焉。貞祐十一年。白雲居士待制典誥李春卿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