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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둘래산길 트레킹
2023년 11월 [아산] 천년의숲길&외암민속마을 정기산행
[아산] 천년의숲길&외암민속마을
2023년 11월 12일, 둘째 일요일.(기온 2˚~ 7˚)
아산 천년의숲길&외암민속마을
트레킹 출발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586-5 (봉곡사주차장)
트레킹 도착 : 충남 아산시 송악면 강장리 115-1 (강장1리버스승강장)
코스 : 봉곡사(들머리) → 송남휴게소 → 긴골산입구 → 배골마을(날머리)
거리및 시간 : 10km / 3시간 40분(휴식시간 포함)
산행안내 팀장 : 젠틀맨
안내지기(선두,후미) : 바론 / 새바람
사진 청마(靑馬)
봉곡사 주차장에서 봉곡사까지 약 700m에 걸쳐 있는 소나무숲이 흔히"천년의 숲"이라고 부르며
수년 전 산림청 주최 아름다운 거리숲 부문으로 장려상을 수상을 한 바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숲이다.
여기에 있는 소나무들은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드리 소나무 밑동에는 한결같이 V자 모양의 흉터가 있는데 이는 일제가 패망직전에 연료로 쓰고자 송진을 채취하려고 주민들을 동원해 낸 상처이다. 언뜻 보면 소나무가 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보는 이들의 마음은 더욱 저린다. 인간들은 나무에게 해를 끼치기만 하는데 나무는 인간에게 한없이 베풀기만 한다는 것을 여기 와서 깨닫기 때문이다.
아산 송악 천년의 숲길
아산 '천년의 숲길'은 아산의 청정지역의 송학면 유곡리와 강장리, 동화리, 궁평리에 걸쳐 조성되는 총연장 26.5km의 산, 들, 마을, 호숫길이다 '천년의 숲길'은 봉곡사주차장에서부터 천년고찰인 봉곡사를 품은 봉수산 능선길과 웰빙마을, 아늑한 임도, 울창한 숲, 숲 사이로 청정한 호반이 내려다 보이는 천혜의 명승지를 두루 품은 길로서 여행객의 기호와 수준에 따라 4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봉곡사 주차장위 만공탑.
봉곡사는 만공스님이 1895. 7.25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
봉곡사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 도선국사가 창건 했으며 산이 봉의 머리 같다 해서 "봉수산"이라 하고 절은 이 산 위에 베틀바위의 전설로 유명한 돌석자를 붙여서 '석암'이라 칭했다. 고려 18년 의종(1170년) 시 보조국사가 중창했으며 세종조(1419년) 함허대화상이 중창하고, 당시는 암자만도 상암, 벽련암, 보조암, 태화암등이 있었다. 조선왕조 14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본전과 여섯 암자들이 전부 폐허가 되었다가 이조 16대 인조 24년(1647년) 다시 중창했다. 그 후 22대 정조 18년(1794년)궤한화상이 중수하고 산이름을 태화산으로 바꾸고, 이 산이 봉이 양쪽 날개를 펼치고 나는 것과 같다 하여 봉곡사라 개칭하였다. 조선왕조 26대 고종 7년(1891년) 서봉화상이 법당 및 요사를 중수하여 현존하고 있으며 그 후 만 공 선사께서 을미년(1895년) 7월에 문득 법계성을 크게 깨달아 오도송을 읊으시어 유명한 성지로 전해지고 있다(대한불교조계종봉곡사)
만공은 23세 때인 1893년부터 2년 동안 봉곡사에 머물며 면벽수행을 하였는데,
1895년 7월 26일에 활연대오의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고 전한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 밖인데]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에서 건너왔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축시에는 닭이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뜨네] ↓
만공탑.
세계일화(世界一花)는 만공스님의 친필
봉곡사(鳳谷寺). 충남문화재자료 323. 887 도선국사가 창건 만공 선사가 득도한 곳
봉곡사(鳳谷寺)는 아산시 봉수산 북쪽 산능선의 갈매봉 동쪽 중턱에 자리한 고려시대 사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봉곡사는 아산 지역의 대표적 고찰 중 하나이지만 그 내력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 구전이다. 887년(진성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근거 기록은 없으며 사찰 명칭도 알 수 없다. 고려 의종 대에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조선 전기에 함허(涵虛)[1376~1433]가 중창하였다 전하고, 이 시기 여러 산내 암자가 있을 정도로 사세가 컸다고 전하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석암사 재송악산(石菴寺在松岳山)"[석암사는 송악산에 있다.]이라는 내용이 지금까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원래는 근처 다른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 위치가 어디인지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사찰이 모두 전소하고 1646년(인조 24)에 현재 위치에 중창되었다.
1760년대의 『여지도서』「온양군읍지」에는 "석암사 재군남이십리 송악산(石庵寺在郡南二十里松岳山)"이라 기록되어 있다. 1794년 중수 과정에서 봉곡사로 개칭하였다 전해진다. 1795년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봉곡사 방문 기록이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런데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온양서암지봉곡사(溫陽西巖之鳳谷寺)", 「봉곡사술지시서(鳳谷寺述志詩序)」에 "온양지봉곡사(溫陽之鳳谷寺)", 정약용 자찬 「묘지명(墓誌銘)」에 "온양지석암사(溫陽之石巖寺)" 등으로 기록하여 석암사와 봉곡사가 혼재되어 있어 이 시기 전후로 ‘봉곡사’로 개칭된 것으로 보인다. 1911년의 『조선지지자료』에 ‘봉곡사’로 기록하고 우리말로 ‘석암절’이라 한다고 하여 ‘봉곡사’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어 있고, 주민들은 오랜 관행에 따라 석암절[석암사]로 부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929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봉곡사가 송악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곡사는 규모가 작은 사찰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사찰로서 법등이 이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봉곡사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과 불교 중흥에 기여한 근대의 큰스님인 만공(滿空)[1871~1946]의 일화가 알려져 있다. 정약용은 34세 때인 1795년(정조 19)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 밀입국 사건의 영향으로 7월에 충청남도 청양에 있는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어 5개월간 근무하였다. 정약용은 1795년 10월 26일부터 11월 5일까지 봉곡사에 열흘간 머물며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인 이삼환(李森煥)과 함께 봉곡사에서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 교정하였다. 그때 내포 지역 명문가의 자제들과 함께 문답한 내용으로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를 저술하였고, 당시 봉곡사에서 지은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만공은 23세 때인 1893년부터 2년 동안 봉곡사에 머물며 면벽수행을 하였는데,
1895년 7월 26일에 활연대오의 깨달음을 얻어 다음과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고 전한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빈 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 밖인데]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흰 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에서 건너왔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축시에는 닭이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뜨네]
봉곡사(鳳谷寺) 대웅전
봉곡사는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요사채·고방이 고건축물로 남아 있고, 근래에 건립한 향각전과 삼성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절 입구의 둔덕에는 만공 스님의 친필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새겨 1993년에 건립한 만공탑이 있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 몇 차례의 보수 공사를 통한 정비가 이루어져 지금의 단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곡사에 오르는 우거진 소나무 숲길은 최근에 ‘천년의 숲길’로 명명한 아름다운 길이다. 길가의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송진을 채취하여 공출했던 상처와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봉곡사대웅전및고방은 1993년 7월 20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물로 17세기 봉곡사의 중수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의 목조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기둥이 기울고 벽에 틈이 생기는 등 시급한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ㅁ’ 자형 요사채의 북쪽 모서리를 이루고 있는 고방(庫房)은 사찰의 여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건물이다. 내부는 2층 구조로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고방은 인근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에도 남아 있어 사찰 건축물의 지역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요사채의 전면은 불전으로 꾸며져 있으며, 내부에는 목조문수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목조문수보살좌상은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본래 보현보살좌상 1구와 함께 삼존불로 대웅전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음보살도인 봉곡사불화 1점도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나 1985년에 도난당해 소재가 불명인 상황이다.
고방(庫房)은
사찰의 여러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 건물이다. 내부는 2층 구조로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고방은 인근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에도 남아 있어 사찰 건축물의 지역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
봉곡사 천년 비손길
(주차장~봉곡사~봉수산~오 형제고개~누에고개~배골마을~궁평저수지~봉곡사~주차장. 총연장거리 13km)
봉곡사 주차장(지풍골)을 출발해 봉곡사를 거쳐 봉수산을 오른다. 이곳에서 아산기맥 능선을 타고 오 형제고개까지 진행한 후 오 돌게마을과 강장마을, 배골마을을 거쳐 송악저수지 안쪽의 귀얄길, 송남휴게소를 지나 다시 지풍골로 돌아오는 코스로서 천년의 숲길을 한 바퀴 돌아오는 전형적인 등산로인 아산기맥 능선길, 배골마을에서 송남휴게소에 이르는 들길과 호숫길, 숲길, 송남휴게소에서 지풍골에 이르는 시골길 다양한 길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코스다.
봉곡사 솔바람길 (봉곡사~봉곡사임도길~누에마을. 총연장길이 3.5km)
봉곡사 아래 사방댐 입구에서부터 오 돌게마을 위 사방댐까지 약 2km에 조성된 임도인데, 요철이 덜하고 주변 숲이 웅장해 산책길로 그만이다. 중간에 다리 쉼을 할 수 있는 원두막도 있고 길가에는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 운치를 더해준다. 이 임도는 그다지 멀지 않아 봉곡사 쪽에서나 오 돌게마을 쪽에서 왕복이 가능하다는 편리함이 있다.
외암마을의 기본적인 지형 조건을 보면 광덕산에 북쪽으로 뻗은 설화산(441미터)을 주산으로 하고 멀리 남서쪽에 위치한 봉수산(535미터)을 조산으로 한다. 설화산은 마을 남쪽 약 4.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광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금북정맥에 속하는 산악이다.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외암리의 내맥을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이라고 보는데 용이 제 몸을 휘감아 꼬리를 돌아보는 모양을 말한다. 외암이라는 이름은 마을 입구에서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설화산 바위에서 연유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대체로 외암리 서쪽에 있는 역말과 관련 있다고 추정한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부터 시흥역이 있었는데 외암마을은 말을 거두어 먹이던 곳이므로 오양골이라고 불렀고 오양의 '오야'에서 외암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마을 정면의 야트막한 산이 면장산이다. 주민들은 흔히 '면적산'이라고 하는데 주변 산악 가운데 가장 먼저 떠내려와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봉수산과 설화산의 맑고 깨끗한 물과 공기를 이어받은 외암마을에는 500여 년 전 강씨와 목씨가 살았고 일정 기간 동안 평택 진씨가 주로 살았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의 묘가 외암마을 남쪽으로 약 500미터 거리에 있다. 그런데 16세기에 이사종(?~1589)이 참봉 진안평의 맏딸과 결혼하면서 예안 이씨 일가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혼인 풍속인 남귀여가1) 가 행해지던 시기이므로 이곳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외암마을이 본격적으로 예안 이씨의 터전이 된 것은 입향조 이사종의 5대손 외암 이간(1677~1737)부터다. 그는 숙종 36년(1710) 장릉 참봉에 천거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는데, 숙종 42년(1716) 다시 천거되자 세자시강원 자의가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볼 때 능력이 매우 탁월했던 모양이다. 이후 종부시정, 회덕현감, 충청도도사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서 주로 지내면서 권선재를 건립해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외암유고』를 남겼다. 그는 조선 후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명으로 호서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한 것으로 명망이 높았다. 51세인 1737년에 사망하자 정조는 이조참판을,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사후에 불천지위 로 모셔지면서 외암마을이 예안 이씨의 씨족 마을로 자리를 굳힌다. 외암의 묘는 현재 마을 입구의 소나무 숲에 서향으로 위치해 있다.
외암리는 조선 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성렬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해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 운동에 관여했다. 퇴호 이정렬(1868~1950)도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고종으로부터 '퇴호거사'라는 호를 받았다. 이정렬은 근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로 그는 어려서부터 명성황후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7세 때(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내전에 들어가 사건의 전말을 명성황후에게 고해 명성황후로부터 직접 '원대지기(遠大之器)'라는 칭송을 들었다.
24세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에 들어섰는데 34세 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 조약과 사법권 이양을 요구하자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 책임자인 외부대신을 탄핵할 것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했다. 관직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직접 복직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나 끝내 사퇴했고, 일제 강점기가 되자 충남 일대의 항일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살던 집이다.
외암마을은 입구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가므로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 밖에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다.
대부분의 전통 마을에는 다리를 건너기 전 효자, 효부의 정려각이 있기 마련인데 외암마을에는 안동 권 씨의 정려각이 있다. 권 씨는 예안 이씨 이용덕에게 13세 때 시집왔는데 불행하게도 다음 해에 남편이 요절했다. 청상과부가 된 권 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가사를 이끌다 86세에 사망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자 1978년에 정려각을 세운 것이다. 장승과 솟대도 세워져 있는데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암 민속마을 입장요금
어른 2000원
어린이, 청소년, 군인 1000원
무료 관람
아산시민 (신분증 확인)
외암 민속마을 내 민박집 투숙객
경로 65세 이상, 6세 이하 어린이
장애인 복지카드 소지자
주차장 이용
공영주차장 이용 주차료는 무료
외암 민속마을 운영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외암 민속마을 보호수인 느티나무는 수령이 무려 600년이고 나무 높이는 21m,
나무 둘레는 170cm이다. 1982년 11월 10일에 보호수로 지정됨
아산 외암마을에 있는 상전은 아산 맛집으로도 유명하고 티비에도 나온 해물파전 맛집이다. 주변에 비슷한 메뉴를 파는 식당들고 꽤 있는데 여기만 사람이 북적북적하다. 아산 맛집 상전이 가면 사진에 보이는 할머니가 실제로 파전을 열정적으로 부치고 계시는 걸 볼 수 있다. 외암민속마을 맛집 상전은 해물파전이 베스트 메뉴이다. 이거 안시킨 테이블은 없다. 상전 이모님이 무지 큰 무쇠팬에 파전을 부쳐주시는데 파랑 해물이 가득 들어간다
이곳의 반찬은 셀프로 원하는 만큼 추가로 즐길 수 있어 더욱 인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전만이 이곳의 매력이 아닙니다 다양한 음식들 중에서도 파전은 물론, 소머리국밥도 그 맛이 뛰어납니다 갈비탕은 특히 눈에 띄는데, 그 이유는 그 안에 들어간 왕갈비대 덕분입니다 고기의 질이 훌륭하여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다만, 국물의 진함은 약간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전체적인 맛은 아주 훌륭합니다. 또한 산채비빔밥 역시 그 양과 맛으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의 분위기도 훈훈합니다. 주변의 자연 환경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고즈넉한 분위기는 특별한 휴식을 제공해주는데 그리고 이곳의 특별함은 할머님 주인분이 직접 해물파전을 구워주신다는 점이 손맛이 더해져 파전이 더욱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다양한 매력을 갖춘 '파전마을'에서 이번 생활의달인 아산 파전 달인 을 만날수 있습니다
함께하여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