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아이 /주하림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 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저녁식사 도중 엄마의 남자와 작은 목소리로 다툰 날이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폭염을 만들어낸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원치 않은 곳에서 서서히 눈 뜨는 동안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가 멜빵차림 어린애로 변하고
친구가 나의 미래를 헐뜯다 떠났죠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끝없이 달리고서야 눈의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동네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
입이 세 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
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
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
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 개의 입을 달고,
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
눈이 처음 건넨 말은 불을 꺼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곧
돌멩이와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일대기를 꺼내놨죠
왜 나의 눈이 세상의 정물을 칭찬하며 우물쭈물 입을 엽니까
한 몸이 되려고 울퉁불퉁 시간 위를 견디었다 말하지 못합니까
서로 같은 방향을 보기 위해 멍자국이 새카맣게 쏠린 것이라고
왜 그 결심은 나를 흔들며 무섭게 설득시키지 못합니까
바다 일몰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청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입술 주변에 삐뚤빼뚤 다리를 그려주었죠
얘야, 이십년 넘게 떨어져 있던 한쪽 눈을 찾아가도 되겠니
내 가슴을 벌려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자궁을 헤치다 천천히 침몰하는 해파리떼, 퉁퉁 붓는 눈꺼풀들
- 2009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
■ 주하림 시인
- 1986년 전북 군산 출생
-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9년 <창작과비평> 등단
- 시집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심사평》
주하림의 시는 세계와 대결하려는 시선을 놓치 않으면서도 말하려는 바를 이미지로 변환해내는 능력과 의지가 돋보인다. 가끔씩 이미지의 전개가 불필요한 얼개들에 의존하여 장황해지는 단점도 눈에 띄지만 충돌하여 확산하는 이미지가 주는 건강한 긴장은 우리 시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사례가 되기에 충분하다. 심사위원들은 주하림이 가진 패기와 열정을 높이 사기로 했다.
- 심사위원 : 박형준 진은영 신용목
주하림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 도발적인 언어감각의 세계로
그의 시는 도발적이다. 또 감각적이며,이국적이다. 2009년 창비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군산 출신의 주하림 시인(37)이 색다른 시작법으로 문단에 신고식을 했다.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
시집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시집에서 시인은 생경하고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톡톡 튀어오르는 환상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마을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입이 세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눈이 영영 사라지길 미니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개의 입을 달고,/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레드 아이'중에서)
문학평론가 황현산씨는 시인의 시를 두고 "논리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꾸려놓은 감각의 세계를 목격하다보면 어느새 시인의 언어에 실려 이국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독특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고 했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의 배경도 다분히 이국적이다. 카를 다리(체코), 말라부 해변, 프레그레소(멕시코) 북경, 상하이, 하얼빈, 후꾸오까, 오끼나와, 비벌리힐스 등 대륙을 넘나드는 시적 공간과 미도리, 미찌꼬, 깁슨, 애디, 루쏘, 이사벨, 후루미, 카와이, 채터틴 등 외국 인명으로 등장하는 화자들이 마치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시인은 또 일본 만화, 마니아용 영화, 서양의 고전 소설 등의 한 대목을 인용하거나 소재로 삼는다. 다양한 장를의 인용에서 시인의 폭넓고 다채로운 문화적 섭렵과 색다른 취향을 읽을 수 있다.
박형준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주하림은 자신의 삶을 무대에 올리고 그것을 연기로 만들려는, 길들여지지 않는 다중적인 욕망을 우리 시단에 생생한 자기의 드라마로 만들어 내놓았다"고 했다.
주 시인은 "쓰기의 운명은 어떤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것에만 있으며 비극을 써내려가는 동안 아름다운 입맞춤을 기억해내고 다시 원하게 될 것이다"고 시집 말미에 '시인의 말'로 남겼다.
출처 : 전북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