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 길 비봉산의 강이식 장군 (8)
고구려로 귀화한 강이식장군
강이식은 전쟁 전부터 수양제의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장차 난리를 일으켜
수나라를 패망하게 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강이식은 수양제의 무모한 야욕이 불러일으킨 전쟁과
그의 행실에 그는 살수에 이르러 고구려로 귀화하게 되는데,
그가 귀화한 이후 수나라는 그가 예견한 대로 난리에 휩싸이게 된다.
그의 예견이 적중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실제로 수나라에는 병역과 노역으로
고통받았던 백성들이 크고 작은 폭동을 계속해서 일으켰다.
그런데도 양제는 전쟁의 패배를 시인치 않고 군사를 재정비하여
613년에 2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치닫자,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원정에서는 급기야 후방에서 병참(兵站)을 맡은 양현감(楊玄感)이 양제의 방자함과 포악함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는 명목아래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통치 집단 내 일차 대분열이기도 하였다.
물론 양현감의 쿠데타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양제를 정점으로 하던 수 왕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이 때문에 양제는 2차 고구려 원정에서도 도중에 귀환해야만 했다.
이처럼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농민들의 크고 작은 폭동이 도화선이 되어
군사집단 내 쿠데타로까지 이어지는 등
양제의 무모한 야욕은 수나라를 점점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그런데도 수양제는 끝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614년에 또다시 3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다.
한편 양제가 3차 고구려 정벌을 감행할 때,
고구려에는 과거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침공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강이식 장군이 이번에는 고구려군의 병마원수가 되어 수양제와 맞서 싸웠다.
이 사실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권문해(權文海)가 1589년에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고구려 때 강이식은 병마원수로 수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高句麗時姜以式爲兵馬元帥以禦隋師)는 기록과 강이식의 묘가 고구려 군영 안에 호화롭게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증명가능하다.
강이식의 묘가 있다고 알려진 마을은 ‘중국 요녕성 무순시 장당향 고려영자촌 원수림’인데, 고려영이란 고구려 군영이라는 뜻이고, 원수림이라는 명칭은 강이식의 직책인 병마원수와도 일치한다. 현재 ‘강이식의 묘소는 중국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누구의 묘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1930년 강씨 문중에서 그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묘비에 ‘고구려병마원수강공지총(高句麗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고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족보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고, 또한 일제강점기 때 그곳의 보장(군수)이었던 강보환(姜寶煥)이 그 묘소가 강씨의 시조 묘라 하여 극진히 보살폈으며 죽을 때 묘를 부탁하는 편지까지 남겼다고 한다.
이런 정황에 따르면 강이식은 수나라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이후 고구려군의 장수가 되어 수나라의 공격을 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기록과 강씨 문중에서 기록한 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부분에는 다음에 다시 쓰기로 하자.
천륜을 어기면 반드시 하늘이 그를 멸하게 되어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늘의 뜻을 따라 행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천륜을 어겨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인간이 행하는 인간의 역사라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신다는 이 한 가지만 이라도 안다면
그는 복있는 사람일 것이다.
(시 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