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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읽어내기
이 홍사
수박을 먹는다.
잘 익은 수박이라 당도가 짙어 맛이 그만이다.
수박을 미얀마 말로 퍼예디라고 한다.
퍼예디. 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예는 물이다. 미얀마 말로 디는 과일이나 열매라는 뜻이다. 모든 과일은 디나 띠로 끝이 난다. 빵디(사과) 씨디(대추) 에요디(고추) 자빗띠(포도) 넷뾰디(바나나) 이런 식이다. 예가 물이니 미얀마 말에도 수박은 물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수박을 서양에서는 워터멜론이라고 하며 물을 뜻 하는 말이 먼저 들어간다. 그렇다면 수박의 수가 물수 자 ‘水’ 임이 자명해졌다. 물로 된 박이라는 뜻이다. 박의 뿌리에 접을 붙여서 수박을 만들었나? 박을 얘기하니 느닷없이 흥부가 생각나는데 흥부전이 아니더라도 수박은 박에 그 기원을 둔다.
그대! 박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고개를 흔들거나 아주 오래된 옛날이라 기억을 되짚을 것이다. 지금은 박나물이 귀해졌다. 우리가 자랄 적에는 초가집 지붕마다 박 넝쿨이 드리워져 있었던 게 시골마을 풍경의 일색이었다. 초등학교시절 미술시간에 크레용으로 집을 그리면 항상 지붕위의 박을 크게 그렸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랬다. 그 시절엔 달밤이면 박꽃이 피고 지붕위에 박이 달려있던 서정적인풍경이 낯설지가 않았다. 흥부네 집은 아무래도 배가 덜 고팠던 모양이다. 그런 박을 일찌감치 따 먹지 않고 켤 때까지 달아두었으니까, 박이 다 커서 껍질이 단단해져야지만 톱으로 켜서 바가지를 만들었다. 흥부는 바가지를 여럿 만들어서 자식들 바가지 쥐어주고 동냥 보내려고 아껴두었던 것인가.
아무래도 요즘 아이들이 즐겨하는 말의 ‘대박 났다’ ‘대박 터졌다’는 말의 어원은 흥부전의 박에서 기인된 게 아닌가 싶다. 대박을 얘기하니 정말 대박 터트리고 싶은데....... 나는 기어이 이 땅에서 대박을 터트릴 것이다.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그런 다짐을 하니 흥부가 켜던 박 속에서 뭐가 나왔나? 구체적으로 뭐가 나왔는지 궁금해진다. 금은보화는 물론이고 비키니차림의 쭉쭉 빵빵한 팔등신 하녀는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 요염한 게 농염한 포즈를 취하고 나왔으면 흥부 마누라가 두 번째 박을 켜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또 엇길로 샌다.
나는 늘 이 모양이다.
아무튼, 박이 어릴 적에 따서 나물을 무쳐먹으면 그런 맛이 없다. 박나물을 말려서 정월 대보름날 고사리와 같이 무쳐서 먹곤 했는데 지금은 일부러 재배한 박이 아니면 박을 볼 수가 없어서 박나물이 귀해졌다. 내 기억으로는 박나물은 몇 해 전 절에서 먹어본 게 마지막이다. 아내를 따라서 무슨 일로 절에 갔다가 점심공양에서 나물 중에서 유독 혀에 감기고 맛있는 나물이 있어서 무엇인가 물어보았더니 박나물이라고 했다. 가끔 재래시장에 나온단다. 옛날에는 지천에 늘려있던 박이 시대가 바뀌어 수박보다 귀해졌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박을 강변 뽕밭의 밭둑에 심었었다. 밭둑 반은 호박, 반은 박을 심었는데 호박은 거름을 많이 주어야 하지만 박은 심어만 두면 저절로 자리를 잡고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호박은 늙어도 먹을 수가 있지만 박은 적절한 시기에 수확을 해야지만 식용으로 가능하다.
카톡!
흥부네 집 지붕의 박을 생각하며 수박을 먹고 있는데 카톡이 날아왔다.
열어보니 사무실을 지키는 여동생이 날린 것이다. 여동생과는 실시간 카톡을 주고받는다. 매일매일 배차 상황을 보고 받고 또 잘못된 부분은 바로 지적하고 고치라고 지시한다. 오늘은 배차노트를 사진으로 찍어서 날렸다. 내일 배차 상황이다. 수박을 우물거리며 사진을 확대시켜서 훑어보니 배차가 적절하게 되었다.
잘했다. 수고~
답장을 날렸다. 문자를 날리자 금세 또 문자가 날아왔다.
여기는 지금 엄청 추워요. 내일은 더 춥다고 해요.
동생이 날린 문자를 보고 생각하니 추울 때가 되었다.
야~ 여기는 엄청 더운데 수박을 먹으니 엄청 달고 시원하다.
답장을 장난삼아 날렸다. 금세 카톡이 다시 날아왔다.
푸 하하하. 하마터면 우물거리던 수박 파편이 튈 뻔했다.
아이고~ 라고 적혀있고 반복적으로 땅을 치며 엎드려 통곡하는 만화 이모티콘이 날아온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실시간 카톡이 날아오니 외국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실시간 카톡이 날리는 이는 여동생뿐만이 아니다. 아내도 툭하면 카톡이 날아온다. 화장실에 전구가 나가도 카톡이 날아오고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가 뭘 잘못 처먹고 토해도 카톡이 날아온다. 여기서 한국을 내다보는 유일한 창구가 카톡이다.
노트북이 놓여있는 책상위에는 휴대폰이 세 대나 놓여 있다. 하나는 한국에서 쓰던 휴대폰인데 여기 와서 켜면 자동로밍이 된다. 다른 데이트는 다 차단시켰다. 그렇지만 문자 메시지는 무료로 들어온다. 혹여 그 전화로 전화가 오면 받지 않는다. 통화료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끝까지 울리도록 내버려두었다가 미얀마의 전화로 그 번호로 국제전화를 다시 건다. 그게 훨씬 싸게 먹힌다. 한참을 통화해도 고작 몇 백 원 빠져나간다. 한국전화로 그렇게 통화했다가는 요금폭탄이다. 그렇게 싸게 거는 전화가 미얀마의 MPT이다. 다른 하나도 미얀마 전화인데 텔리너telenor다. 이건 지금 숙소에서 인터넷이 기가 막히게 잘된다. 휴대폰의 무선 네트워크를 켜서 노트북 옆에 두면 노트북이 무선인터넷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카톡이 깔려있는 것이라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라 미얀마 휴대폰은 선불카드를 사서 요금을 넣는 시스템이라 쓰는 만큼만 나간다.
버르마, 버마를 두고 할아버지께선 항상 버르마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도 일제강점기에 동경 유학을 가셨다가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총을 메고 이곳을 다녀가셨다. 이곳에서 조국해방을 맞으셨다고 하셨는데 항상 버르마라고 하셨다. 그 얘긴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이곳 버르마 사람들은 거의가 휴대폰을 두 개씩 들고 다닌다. 어느 곳에 가면 MPT가 잘 터지고 어느 곳에 가면 텔리너가 잘 터지기 때문인데 다른 말로 하면 어디에 가면 MPT가 먹통이 되고 또 어디에 가면 텔리너가 먹통이 되기 때문이다. 기지국이 드물어서 그런 모양인데 양곤 시내에서도 그런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가 있다.
선불카드로 쓰니 기본요금 같은 건 아예 없다. 단말기만 있으면 열 개를 들고 다녀도 무방하다. 번호가 있는 유심은 시내에 나가면 길거리에서 파는 것을 단 돈 천 원에 번호를 골라잡을 수가 있다. 하여 이 나라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찾을 방법이 없다. 유심만 빼면 바로 다른 번호로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서 쓰는 휴대폰은 모두 한국에서 중고를 사 온 것이다. 그 동안 들여온 중고 휴대폰으로 말하자면 스무 개도 넘는다. 쓰다가 한국으로 들어갈 때 유심 칩만 빼고 눈독을 들이며 탐내는 사람에게 준 것도 있고 웃돈을 얹어 팔아먹은 것도 있다. 여기선 한국의 휴대폰이 인기가 있다.
어쩌다 보니 흥부네 집, 지붕위의 박을 얘기하다가 휴대폰 이야기로 빠졌다. 항상 인간은 이야기를 할 때 주관을 갖고 엇길로 들어가지 않게 뼈대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늘 이 모양이다.
흥부네 집 지붕위에 박이 아니라 수박이 달렸으면 어땠을까? 제비가 물고 온 것이 수박씨라면 어땠을까? 대박이 아니라 대수박 나는 것일 터인데....... 수박이라면 익기도 전에 흥부네 아이들이 다 따먹고 없었을 것인가? 수박으로 묘사해도 이야기는 될 터인데 왜 하필 박이었을까? 흥부전을 집필할 당시에는 수박이 귀했던지 아예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박이 수박보다 먼저이지 싶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수박이나 호박은 넝쿨이 뻗어나가서 열매가 열리는 박과의 식물이지 싶다. 넝쿨이 뻗어나가서 열매가 열리는 것으로 말하자면 참외도 있다. 참외가 박과의 식물인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건 오이와 함께 외과식물이지 싶다. 오이라는 말을 줄이면 외가 된다. 우리 고향에서는 오이를 두고 물외라고 했다. 참외와 물외 그렇게 구분을 했다.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면서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서 담아온 수박 한 접시를 다 먹었다.
-예다나!
아래층에서 마른빨래 다림질을 하고 있는 예다나를 부른다. 예다나라는 이름의 예도 물을 얘기하는 것인가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말만한 계집애가 조신하지 못하게 껑충거리며 계단을 뛰어서 올라온다.
예, 아부지.
아부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빈 수박접시를 내밀었고 그리고 커피 한잔을 가져오라고 했다.
예. 아부지.
예다나는 접시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계단 입구 벽에 걸린 만다라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림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한 게 아니라 걸어놓은 방법이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하는 모양새였다. 그림을 마름모꼴로 붙여놓았다.
그림은 산 건 어제였다.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으니 갑갑해서 바람을 쐬러 재래시장이 있는 골목으로 나갔었다. 늘 그렇게 나갈 적에는 현관입구에 있는 헌 골프채를 하나 들고 나간다. 집 앞에서 헛스윙을 하며 몸을 풀고 시장을 한 바퀴 돈다. 이 골목 사람들은 내가 나가면 다 안다. 어느 집에 살며 무엇을 하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고 인사들을 한다.
늘 나다니는 곳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헌데, 내 발목을 잡은 건 액자가게의 추녀 밑에 걸린 그림이었다. 추녀 밑에 그림이 든 액자가 여러 개 나란히 걸려있었는데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못 보던 그림이었다. 이곳 버르마의 그림은 한결같다. 폭포가 귀한 나라라 폭포수의 그림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아웅산 수지의 초상화. 아웅산 장군의 초상화, 부처, 파고다의 원형 불탑. 그리고 조개껍질을 소재로 붙인 새우모양이나 잉어 등속인데 어디서나 쉽게 볼 수가 있다. 헌데, 만다라 같이 생긴 그림을 파는 곳은 이 버르마에서는 처음이었다. 그 그림을 보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진열된 모든 그림을 훑었지만 다르게 생긴 만다라는 없었다.
가게에서 오직 유일한 그 만다라를 샀다. 담배 세 갑 값에 해당하는 아주 싼 값이었다. 가게 아줌마는 계산을 하며 조개껍질을 붙여 새우모양을 만든 모자이크를 권했지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게 아줌마는 팔긴 팔지만 알 수가 없는 그림을 사는 이방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숙소에 가져와 그림을 보니 좌우상하 대칭이었다. 정사각형 안에 정팔각형을 그려 넣고 그 안에 원을 그려 놓고 원 안에 정삼각형 두 개를 포개서 육각형으로 그려 넣었으니 어디로 보나 대칭이다. 그게 큰 구도이고 여백이 없이 코끼리와 단청, 꽃모양 같은 그림을 새겨 넣었다.
책상위에 얹어 놓고 그림을 보고 있으니 액자가 아니면 어디가 위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액자를 잘못 넣었을 수도 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이것을 직접 그린 것인지 인쇄한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하여 싸구려 플라스틱 액자를 제거했다. 뒤에서부터 빼내서 그림을 살려보니 종이에 그린 것이 아니라 헝겊이었다. 액자는 버리고 그림을 보다가 그림을 반으로 접어서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인쇄한 것이 아니라 그린 것이다. 손톱으로 물감을 긁어보니 손톱에 묻어나는 것이 분명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잘 그린 만다라인데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보고 있으면 한 며칠은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다가 이 층 계단을 올라오는 입구, 벽시계 밑에 테이프로 마름모꼴로 붙였다. 어디가 위인지 알 수가 없어 마름모꼴로 붙여놓은 것이다.
예다나가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그림에 눈길을 주고 있으니 예다나가 그림을 본다.
-까웅라?
그림이 좋으냐고 예다나에게 묻는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겅둥겅둥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그림, 아니 만다라 그윽하게 바라본다. 만다라가 점점 커진다. 나는 그림 속으로 성큼 발을 들려놓고 만다. 온통 벽이다. 나는 금세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다.
읽어내기에 난해한 그림이다.
만다라가 무엇이냐?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부처가 증험證驗한 것을 그린 불화를 말한다. 그럼 증험은 또 뭐냐? 사전적인 의미로 실지 사실을 체험하고 증거로 삼을 만한 경험을 얘기한다. 그게 만다라인데 읽어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만다라를 보면 가끔 그림 속에 갇혀 길을 잃고 만다.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했다. 몇 년 전 티베트를 여행할 적에 길거리 가판에 파는 헝겊에 그린 만다라에 빠져 있다가 일행을 놓친 적이 있다. 그때도 만다라 속에 들어가 미로 같은 길을 헤매다가 일행을 놓쳤다.
누군가 그랬다. 그림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난해한 그림을 볼 적에는 보이는 만큼, 아는 만큼만 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림을 보면 한 눈에 그 전체를 보고 읽어내려고 한다. 만다라는 결코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하나하나 색깔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음양오행의 섭리와 이치가 존재하고 선을 하나 그어도 팔괘의 엄격한 계율을 따라야 한다. 우주의 법계를 통달해야지만 읽어낼 수 있는 그림이 만다라이지 싶다.
담배를 한 대 물고 그림을 다시 바라본다. 가급적이면 그림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단청은 나에게 있어서 공포다. 일단 무섭다.
내가 단청을 처음 접한 것은 예닐곱 살 시절이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집이 창성이네 집이었다. 조무래기 몇이서 창성이네 집에서 숨바꼭질을 했던 모양이다. 창성이네 집은 농사를 짓는 농가가 아니라 창성이 아버지는 근동에서 알아주는 대목이었다. 늘 절이나 사당, 제실을 짓는 공사 현장에 다니고 있었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내가 숨은 곳이 창성이네 아버지의 목공 작업장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연장이 있고 단청을 하다가 둔 목상여가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두컴컴한 작업장 구석에서 나는 상여 뒤에 숨었던 것이다. 급한 김에 그리로 들어가 숨어 있다가 단청이 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가위가 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는데 술래가 나를 찾아내지 못하고 몇 판이 흘러간 모양이고, 그곳으로 숨어들은 창성이가 나를 보고는 너 집에 가지 않았었느냐고 물으며 내 손을 끌고 나왔을 적에 나는 사지가 반쯤 굳어 있었다.
너 오줌 쌌냐?
누군가 그렇게 백지장이 되어 나온 나를 보고 물었다. 한쪽 바짓가랑이가 흥건하게 젖어있었지만 오줌을 싼 기억은 없다. 몸서리 쳐지는 두려움과 공포에서 빠져 나오니 몽롱했다. 그곳에서는 오줌을 쌀만큼 몸이 풀리지 않았고 창성이 손에 이끌려 나와서 싼 모양이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서도 가위에 눌려 며칠을 앓아누웠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곤 다음부터 그 창성이네 외딴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그 집 앞으로 지나갈 일이 있으면 들길로 돌아서 다녔다.
단청은 내 머리 속에 공포와 심장을 누르는 가위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지금도 단청을 보면 선과 색의 아름다움보다는 섬뜩함이 앞선다.
담배가 쓰다.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끄고는 책상 앞에서 일어선다. 아무래도 저걸 고쳐야겠다. 책상머리를 돌아 계단 쪽으로 가서 벽에 걸린 만다라를 떼어낸다. 그리고 서랍의 종이테이프를 찾아서 마름모꼴로 붙여진 만다라를 바로 붙였다. 바로 붙였다고 하지만 어느 쪽이 바로인지 모르겠다. 몇 번을 돌려서 보다가 일단 평면으로 붙였다. 마름모로 붙일 적에는 테이프 한 조각이면 되었지만 평면으로 붙이니 테이프 두 조각이 들었다.
이 만다라를 그린 이가 표현하고 싶었고 여러 대중에게 시사하고 싶었던 바가 뭘까?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냥 걸어놓고 복을 기원하는 기복사상의 한 갈래라고 보기는 보는 입장에서 너무 무성의한 게 아닐까. 극락? 아니면 해탈? 그렇게 생각하니 만다라가 숨은그림찾기의 문제지 같이 여겨졌다. 뭔가는 있겠지만 모르겠다. 아! 이 무지의 중생이여.
그림을 다시 붙이고는 책상 앞에 돌아와 앉아 팔로 턱을 고인다.
그리고 그림을 쳐다본다.
저 소름끼치도록 미묘하고 난해한 그림.
불교미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런 걸 간략하게 정의해놓은 책이 있을까? 저 만다라를 한마디의 아포리즘으로 정의한다면 무엇이라 할까?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섭리를 다 담은 그림인 모양인데 어렵다.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자면 어렵다. 어렵다? 이게 정답인가? 요즘은 만다라 그리기로 심리치료, 미술치료를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치료목적으로 그리는 만다라와는 내가 보기에도 다른 성격이다.
저걸 해체하면 무슨 답이 나올까?
나는 그림을 해체하는 상상을 한다. 먼저 가장자리에 테두리로 되어있는 팔각형을 해체하는 상상을 한다. 하나를 떼어내고 또 한 면을 떼어내고 그리고 나니 안에 있는 원이 굴러 나올 것 같다. 원은 지구를 표현한 것일 것 같다. 그럼 해체하고 있는 팔각형은 우주를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왜 우주를 팔각형으로 표현했을까? 또 한 면을 떼어내는 상상을 한다. 그러고 나니 우주의 문이 열렸다. 안에 원 둘레에 그려져 있는 여덟 마리의 코끼리가 걸어서 나오는 상상을 한다. 코끼리가 다 나가고 나니 여백이 좀 생긴다. 원 안의 정삼각형 두 개를 포개 놓은 것은 삼합오행을 얘기하는 것일 것이다. 우주 안에는 삼합오행이 존재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원을 먼저 들어내야 할지 삼각형을 먼저 들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느 것을 먼저 그렸는지 알아야 그 역순대로 들어낼 터인데 난해하다. 그러다 그림을 다시 보니 해체하던 상상을 잊어버렸다. 만다라는 온전하다. 낭패감을 느낀다. 그렇다. 그린 순서를 모르고는 해체 또한 불가능하다.
그림을 해체한다는 자체가 부질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 보자.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쭉 훑어보고 말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 나는 그림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만다라를 떠올린다.
그림 속은 미로다. 금세 미로에 갇힌다. 혜안을 지니지 못한 까닭으로 부처처럼 길을 찾아서 나갈 수가 없다. 이 미로를 부처가 증험을 했다는 말인가. 만다라 속에서 나는 길을 찾는다. 혹여 지나간 것, 훑어본 것에 출구가 있으면 어쩌나. 뒤를 돌아본다. 뒤에는 온통 벽이다. 앞으로도 나갈 수가 없고 뒤에도 벽이다. 나는 포기한다. 출구 찾기를 포기하고 움직이지 않고 모든 욕망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숨을 고른다.
하나. 둘. 셋.
숫자를 헤아리며 숨을 고르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나가려고 하지도 않고 만다라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또 숨을 고른다.
하나. 둘. 셋.
나는 없다. 만다라 안에도, 만다라 밖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른하고 몽롱하다. 나는 없다.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모든 욕망을 다 내려놓는다. 그래. 욕망은 부질없다. 다 버리자. 그런데 인간은 왜 사는가? 원론적인 질문에 사로잡힌다. 욕망을 벗어버리려고 사는 게 아닐까. 그래 벗어버리자.
가수면 상태다.
내가 쉬는 숨소리가 고르다.
잠시 평온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구름 위에 앉은 기분이다. 그러다 불현듯 강한 흡연욕구를 느꼈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 인간은 이런 욕구라도 있어야 살지.
번쩍 눈을 뜬다.
해탈을 경지.
무욕의 경지.
그 경지를 맛보았다면 건방진 소리고. 잠시 욕구를 버렸었다. 버린 게 아니라 피해 있었다.
무욕이면 인간은 살지 못한다.
먹고 싶은 욕망, 알고 싶은 욕망. 무엇을 하고 싶은 욕구, 심지어 그것마저도 없으면 살고 싶은 욕망이라도 있어야 한다.
식욕도 없고, 가지고 싶은 욕망도 없고, 성욕도 없고, 자유롭고 싶은 욕망마저 없으면 결코 살지 못한다. 적당한 욕구를 가지고 해탈의 경지, 무욕의 경지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 것이 없으면 오로지 살고 싶은 욕구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오를 곳이 있어야 인간은 그것을 쳐다보면서 산다. 완벽하게 오르고 나면 너무 허망하여 살지 못한다. 결국 모든 욕구를 남김없이 다 내려놓으면 살아야할 가치를 잃고 만다는 얘기다.
다시 만다라를 쳐다본다. 그 자리에 온전하게 그대로 걸려있다. 저 만다라역시 만다라를 알고 싶은 욕구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지극히 사소한 욕구 때문에 깨어난 것이지만 살만하다. 그렇다. 생의 좌표는 욕구가 있을 적에 비로소 존재한다.
나는 외치고 싶다. 인간들아! 절대로 욕심을 버리지 마라. 무욕의 세계는 살 곳이 못된다. 무욕, 해탈의 경지. 그건 외치고 갈망해야 할 구호에 불과하다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욕이다. 그건 권태이자 나태고 욕구를 향한 게으른 핑계에 불과하다.
담배를 문다. 한 모금 빨고는 식은 커피로 입을 축인다.
입 안이 쓰다. 담배를 끄고는 아래층을 행해 소리친다.
-예다나!
이 인간들은 내가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올라오는 법이 없다. 이층의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독하며 차디찬 고뇌에 차 있는지 안중에도 없다. 청소할 시간에만 올라오고 나머지는 꼭 내가 불러야 올라온다.
-예, 아부지.
또 겅둥겅둥 뛰어올라온다.
-아부지 발래? 바필로?
왜 불렀느냐고 묻는다. 글쎄 내가 왜 불렀지?
-좀 조신하게 다녀라. 이놈아!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남은 커피를 홀짝이고 빈 잔을 내민다. 잔과 받침을 들고 돌아서는 아이에게 만다라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좋으냐고 물었다.
-까웅라?
-아부지 무띠부.
아이가 만다라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뭇 진지하게 모르겠단다. 내려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무래도 만다라를 떼어야겠다. 잘 보이는 저 곳에 붙여두었다가는 아무 일도 못하겠다. 그림을 떼어내려고 만다라 앞으로 갔다. 가서 떼다가 생각하니 이렇게 떼어버리기에는 비싼 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붙인다. 한 번 떼었다 붙이니 종이테이프의 접착력이 약해져서 잘 붙지 않는다. 서랍의 테이프 한 조각을 떼어다가 다시 붙인다. 그리고 만다라를 가까이서 본다. 코끼리 등 부근에 둥글게 그려 단청을 해놓은 것은 얼른 보기에 해바라기의 꽃그림 같다. 그게 여덟 개, 같은 구도로 배치를 해놓았다. 그 작은 부분도 나누어서 제각각 다른 색으로 칠을 해놓았다. 이것도 작은 우주를 표현한 것이겠지. 작은 우주라면 인간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천인지天人地에서 음양陰陽의 조화를 확실히 지닌 것은 인간이라고 했다. 하늘은 양陽이요 땅은 음陰이라고 했다. 겨우 엄지손톱만한 꽃그림에도 음양을 표현했으니 어지간히 정성을 들인 그림이다. 이걸 나누어서 단청을 했으니 어지간히 작은 붓을 사용했으며 어지간히 손을 떨었을 것이다. 왜 하필 여덟 개일까? 좌우상하 대칭이 완벽하게 되도록 그린다고 여덟 개를 배치한 것일까? 아니면, 건곤감이 진손태간. 우주의 팔괘를 다시 축소 표현한 것인가? 혹시 불교계에서 가장 큰 숫자 팔만사천을 표현한 게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모르겠지만, 이렇게 정성을 들인 것을 그냥 떼어서 책상 서랍에 처박아 두기에는 무성의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더 많은 만다라가 있겠지.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갑자기 만다라에 대한 갈증이 일었다.
책상 앞으로 돌아와 재바르게 휴대폰 네트워크를 켜서 인터넷을 검색한다. 만다라를 치고 검색을 하니 만다라 도안부터 만다라 색칠하기까지 여러 개의 만다라에 관한 검색어가 나온다. 아무거나 클릭을 했다. 클릭을 하고 들어가니 색칠을 하지 않은 만다라가 여러 개 뜬다. 전부가 둥근모양인데 자세히 보니 모두가 좌우상하 대칭이 되는 구도다. 상하가 없다는 것은 평등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좌우가 없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색칠을 하지 않은 만다라를 한참 보고 있으니 죽은 생명체의 뼈대처럼 여겨졌다. 만다라는 밑그림을 이렇게 그려놓고 색칠을 해서 생명을 불어넣는 모양이다. 뼈대만 그려진 모니터의 만다라와 벽에 걸린 만다라를 번갈아 본다. 확실히 벽에 붙은 만다라는 숨을 쉰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색칠을 한 만다라에 숨결이 느껴진 것이다.
인터넷의 죽은 만다라는 금세 실증이 난다.
죽은 만다라가 있는 인터넷을 종료시키고 벽에 걸린, 숨 쉬는 만다라를 본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본다. 만다라는 흡인력이 강한 그림이라 자칫 방심하면 빨려 들어간다. 티베트에서는 짧은 기간 여행을 하는 동안 참 많은 만다라를 보았는데 이 버르마에서는 귀하다. 실제 만다라보다는 젊은 아이들이 입고 다니는 티셔츠에 인쇄된 만다라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이 버르마에서 불교 예술품은 거바예 파고다 앞에 있는 상가에 가면,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있다. 거기에 가서 만다라를 한번 찾아볼까. 혹시 있으려나. 남방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중하게 여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티베트의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처럼 고행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춥고 배고파 본 적이 없는 민족이라 불교국가지만 종교가 절실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어떤가. 야크의 젖과 고기를 먹으며 그 척박하고 추운 땅에서 매달릴 곳이라고는 종교밖에 없었다. 오로지 불교가 전부인, 춥고 배고픈 그 땅에서는 불화 하나에도 온갖 정성과 염원을 담았으리라.
벽에 걸린 만다라를 다시 본다.
완벽하게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만다라에 허기를 느낀다.
아무래도 거바예 파고다 상가에 한 번 나가보아야겠다. 거기에 없으면 골동품 가게가 많은, 시내의 보족시장에라도 한 번 둘러보아야겠다. 만다라를 그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까짓 발품이야 못 팔겠는가. 오체투지를 행하는 마음가짐으로 나가도 좋을 일이다. 보족시장 어디엔가 있을 만다라가 나를 부르는 기분이다.
시계를 본다.
한낮, 한 더위는 지났을 시간이지만 시내는 차가 엄청 밀릴 것이다.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나가면 좋을 듯하다.
교통지옥에 오체투지의 기분으로 나가 내가 읽어내지 못하더라도 더 복잡하고 난해한 만다라를 만났으면 좋겠다. 어차피 만다라는 그 불화를 그린 사람 외에는 완벽하게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미술평론가들에게 같은 그림을 보여주면 각각 다른 해석과 평이 나올 것이다. 나 역시 만다라를 읽는데 있어서 볼 때마다 그 해석이 다를 것이고, 얻어내는 감성과 느낌, 떠오르는 영감이 다를 것이다.
벽에 붙은 저 만다라는 오늘 떼었다가 며칠 후에 다시 붙여야겠다. 그러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편안히 감상을 할 수가 있겠지. 만다라를 자꾸 보다보면 만다라를 읽어내는 혜안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책상머리에서 일어나 만다라 앞으로 갔다. 그림을 떼어내려다가 도리어 그림에 홀려 내가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항상 만다라를 읽어내기는 이렇다. 그림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겨우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림을 본다.
아! 이 소름이 돋도록 난해한 그림.
정말 환장하도록 읽어내고 싶은 만다라 뒤의 숨겨진 비화秘話.
이런 욕구가 있기에 만다라를 읽어내기는 난해할수록 즐거운 모양이다.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오로지 즐기기 위하여 나는 만다라를 구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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