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최양업 신부 선교의 첫 거점 - 홍산 도앙골 성지
<도앙골 성지 노천 성전>
“--- 우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를 실천할 자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사방에 궁핍 투성이요 사방에 투쟁뿐입니다.
우리는 마치 지극히 큰 죄나 저지르는 듯이 항상 전전긍긍 떨고 있으며,
사람들은 공연히 우리를 미워하고 마치 우리를 흥악범들처럼 멸시합니다.
만일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사람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공격하고
그를 인간 중에 가장 부도덕한 자로 여겨 저주를 합니다.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괴롭혀 결국은 그를 멀리 쫓아내고
다시는 자기 동족들 가운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양반들은 그들 중에 누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을 더욱 격렬하게 핍박합니다.
가족 중의 어떤 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의 가문 전체가 불명예로 낙인이 찍히고,
그 집안의 모든 영광과 모든 희망이 걸려 있는 양반 칭호를 박탈당합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크나큰 악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회가 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치욕 속에서 영광을 찾기보다는
헛된 칭호를 누리기를 더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스가
1850년 10월 1일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의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국내 첫 사업보고서에 씌어 있는 글이다.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 순교자 자료실>
최 토마스는 이 보고서를 충남 홍산(鴻山)의 교우촌 도앙골에서 썼다.
“저는 험악한 길을 개척해 나가면서 철통같이 굳게 닫힌 관문으로,
----- 관문 경비 초소에 다가갔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고
광풍이 거세게 불어 혹독한 추위에 경비병들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우리는 관문 한복판을 들키지 않고 통과하여 서울까지 갔습니다.
먼저 중병을 앓고 계시는 다블뤼 신부님께 가서
병자성사를 집전해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님께로 가니 주교님도 열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하루 동안 주교님과 담화를 나눈 후 잠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전라도에서부터 공소 순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850년 1월(혹 1849년 말) 이었고
그 해 가을 첫 번째 보고서에 발신지를 도앙골이라고 명기한 것이다.
<도앙골 성지 입구>
도앙골을 비롯한 하부 내포 지역은 '내포의 사도' 단원(端源) 이존창 루도비코 성인이
홍산 지역에 피신해 살며 선교를 시작한 1790년대부터 교우촌을 이룬
'믿음의 땅'이자 '거룩한 땅'이다.
공주본당이 설립된 1897년 이전에 작성된 1880~1890년대 공소 사목 자료에는
도앙골 신자수가 43명으로 기록될 정도로 이 지역에는 신자들이 많이 살았다.
<대전일보 2014. 08.21.>
내대, 도앙골, 삽티, 서짓골, 거칠 등 여러 교우촌이 서로 인접해 있고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어서
최양업 신부는 도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도앙골에서는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요한, 오 시몬 등
다섯 분이 공주감영으로 잡혀가 순교했다.
이때 갈매못에서 순교한 분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사람들 가운데
‘홍산 도앙골 신자가 아주 적극적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우선 모신 장소가 도앙골 고개 넘어 삽티인 것으로 보아
도앙골이 이곳 신앙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산속에 사는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으로 잘 지키고 사는 열심한 신자”라고 서술했다.
<평화신문>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현재의 행정 명칭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은
오래 전부터 도앙골이라고 일컬어왔다.
‘금지리(金池里)’라는 이름은 그 계곡이 시작되는 월명산 정상부 아래에
금지사(金池寺)라는 고찰이 소재한데서 연유한다.
금지사 본전의 뒤편 바위 밑에 특이한 효험으로 알려진 약수가 있는데,
그 샘에서 흘러내리는 계류(溪流) 양편에 산복사(개복숭아) 나무가 많이 자라
봄철에는 붉은 복사꽃이 굽이쳐 피고 산골 가득 그 향기가 채워진다 하여
이곳을 도원곡(桃園谷) 또는 도화곡(桃花谷)이라 부르다가
‘도왕골’ 또는 ‘도앙골’로 변천되었다.
<대전교구 홈페이지>
‘최양업 신부는 신자였던 친척 경주최씨 집에서
첫 번째 사목보고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도앙골에 1970년대까지 가난한 5~6가구가 살았는데
그들 가운데 경주 최 씨가 누대에 걸쳐 살았던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잠시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은
바로 최 씨가 살던 '뗏집'<茅屋-뗏장으로 지은 오두막>이 분명합니다.’
<2014년 8월, 부여 만수리 성당 윤종관 주임신부 인터뷰-대전일보>
대전교구에서는 2011년 이곳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에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鐸德 崔良業 諡聖 祈願碑)를 세웠다.
당시 해미성지 주임 백성수 신부가 글씨를 쓴 이 비석은
높이 약 7.5m(비석 머리 포함)로 비신(碑身), 비석 머리, 비석 받침 등을
모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했다.
<탁덕 : 덕을 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예전에는 신부(神父)를 이렇게도 불렀다 - 표준국어대사전>
<야외 성전 제단>
2011년 여름 대전교구 이범배 신부가
30평 규모의 기도하는 '우애의 집'을 지었다.
우애의 집 왼편에는 상선당(上善堂)이라는 별채가 붙어있다.
도덕경(道德經)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 뛰어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네이버 지식백과>
기독교 기도의 집에 웬 도교의 경문인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타교의 진리도 포용하라는 가톨릭 정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기도의 집> <상선당>
최양업 신부의 보고서는 이어진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와 가족,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깊은 신앙심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