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백 할머니의 우정
정동식
장모님 모시고 시골 가는 길. 오천읍을 지나 장승백이 고개로 들어서니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아내가 다녔다는 초등학교는 극기훈련 체험장이 되어 옛 모습이 전혀 없고, 검문소 삼거리는 지금은 텅 빈 축사만 덩그러니 남았다. 여기서 해안가 방면으로 걸어서 10분, 차로 1분만 가면 학계리 자그만 농촌 마을이 나온다.
애마의 고삐를 늦추며 창문을 열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동풍이 이마에 와닿는다. 농부를 움직이게 하는 봄바람은 언제나 부지런하다. 길섶에 유채꽃이 드문드문 예쁘게 피었다. 제주에 가야만 보던 귀한 유채꽃, 지금은 처가 마을 논둑 주변에, 가녀린 허리를 간들바람에 맡긴 채 너울대고 있다. 나는 쾌활한 유채꽃이 좋다. 사교적이고 기쁨과 희망을 주는 빛과 닮은 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채꽃을 볼만한 장소가 많다. 장모님의 친정인 호미곶 주변,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창녕 남지에도 매년 유채꽃 단지를 조성하여 상춘객을 유혹한다.
한 종류의 꽃만 흐드러지게 피는 광경도 멋있지만 다른 화초들과 함께 있거나 잡초 위에 군계일학처럼 피어도 품격이 달라 보인다. 소나무 군락지의 낙락장송보다 참나무 등 혼합림과 같이 있는 잘생긴 소나무가 더 위풍당당하다. 개나리와 진달래, 유채꽃도 그렇다. 이 마을 유채꽃은 예전에 못 보던 꽃이다. 필경 개나리 없는 동네에 누군가 노란 기운을 채우려고 심었거나 지난봄 이맘때, 산마을 유채꽃씨가 순풍을 타고 날아와 예쁘게 터 잡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마을은 10 여호 정도만 사는 소박한 마을이다. 심심산골도 아니고 어촌도 아닌 스페인의 인터불고 같은 느낌을 준다. 작은 동네라 그런지 이 마을은 예전부터 둥구나무가 없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둥구나무의 부존재는 상당한 유감으로 다가온다. 만일 장인어른이 살아 계셨다면 마을회관 앞에 당장이라도 심자고 말씀드렸을 것 같다. 그 당시 둥치 큰 느티나무 한 그루라도 심었더라면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듬직한 나무 아래 지어진 기품 있는 정자와 더불어 마을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는 버팀목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일말의 마련이 남는 것이다. 내가 소싯적, 대도시 달동네에서 자주 보았던 그 흔한 개나리와 웬만한 동네에는 다 있는 둥구나무조차 없는 이 겸손한 마을에 올봄에는 유채꽃이라도 피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이모작을 하지 않는 논은 어딘지 모르게 심심하다. 뭐니 뭐니 해도 봄의 들판은 벼가 심어져야 안정감이 느껴진다. 며칠 후 모내기를 하려는지 갈아엎은 논바닥은 포근한 하늘을 상념 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일하는 농부는 보이지 않는다. 이 시기에 농부는 무얼 준비하고 있을까?
며칠 전 K 방송국 아침프로에 출연한 청년가수 H군의 말이 떠올랐다. ‘벚꽃 피기 전에는 감자를 심고, 벚꽃이 지고 나면 못자리를 준비한다. ’ 이 간결한 경험적 멘트가 농사일에 문외한인 나의 귀에 착 달라붙었다.
도시로 전학 간 시골 학생이 첫 시간에 테스트당했던 ‘사다리꼴 면적 구하기’ 공식을, 팔순이 된 사부님께서 아직 기억하시듯, 나도 청년 농부의 그 말을 평생 잊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우리의 시골 나들이는 장모님과 둘도 없는 친한 친구를 만나게 해드리고 싶어서다. 이 세상에 딱 한 분 남은 장모님의 유일한 친구 남정댁 어르신! 영덕 남정이 고향이라 택호가 남정이다. 노경에 접어들어 봄바람 타고 유채꽃처럼 이리 오셨다고 한다. 장모님보다 한 살 위인데 친구처럼 다정하다. 두 분은 만나면 서로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남정댁은 장모님의 안부를 처남을 통해 알게 된다. 약속이 정해지면 아침부터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지팡이를 오른손 턱에 괴고 고샅으로 차가 당도하기를 손꼽아 기다리신다. 그러다가 차 소리만 들리면 언제라도 달려 나올 기세로 장모님을 기다리시곤 했다.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얼싸안고 기쁨을 표한다. 마치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듯 얼굴을 비비며 스킨십을 하는 게 예사롭지 않다.
10 여년전 남정댁이 여기로 이사 올 당시 장모님께서 남정댁을 따뜻하게 대해 주신 모양이다.
맛있는 음식도 나눠 드시고, 농사일도 많이 챙겨드리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정겨운 인사나 감정표현을 남정댁이 훨씬 잘하신다. 아직 정신건강이 살아있고 인정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반가운 분위기는 얘기하다 보면 이내 어정쩡해진다. 장모님께서 치매로 엮어낸 단편 소설 신작이 금방 들통이 나기 때문이다. 남정댁 어르신은 아직 생각이 맑고, 육체적 건강도 과히 나쁘지 않다. 그래서 장모님의 상황을 설명해 드리면 금방 이해를 하신다.
우리는 남정댁 어르신을 모시고 양포 아귀찜 맛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늘따라 만석이라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다 식탁에 앉았다. 남정댁께서는 장모님이 상황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시자, “아이고, 상동댁! 예전에 논둑에 난 풀은 물론이고, 골목길에 있던 잡초까지 다 뽑더니만 우야다가 이리 됐노!”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장모님은 치매가 오기 전까지 평생 농사를 지으셨다.
워낙 깔끔하셔서 당신 논이나 논두렁에 잡초가 자라고 있으면 남들이 욕한다며 8월 뙤약볕에도 낫을 들고나가신 분이다. ‘서 있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부지런한 장모님은 미수의 연세까지 농사에 직접 관여하셨다. 투잡 하는 둘째 아들을 감독까지 하며 말이다. 아들이 어설프게 일 처리를 하면 장모님이 항상 가르치시곤 했단다.
식사 후 신창 일출암 주변, 처제의 단골 카페에 들렀다. 실내는 빈티지한 분위기였다. 동그란 창밖으로 분꽃나무, 수선화, 진달래 등 봄의 정원이 주인의 성품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지 한 명씩 앉는 의자를 제쳐 두고 굳이 좁은 통나무의자에 나란히 앉으셔서 정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웃으신다. 대화가 설령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도 친구라서 편안하다. 남정댁이 얼른 길을 돌려 방향을 유지한다. 금방 또 장난을 치며 까르르 웃으시니 같이 계시는 자체가 행복이다. 백세를 바라보는 할머니들이 소녀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시다.
시골집으로 돌아와서 아내는 텃밭에서 딴 머위와 두릅, 오가피순을 다듬고 있었다. 그새 남정댁은 정을 담뿍 담은 쪽파 세 단을 가지고 오셨다. 지난 늦가을에도 고운 팥 한 되를 주시며 ‘엄마에게 팥밥 맛있게 해 드려라’고 하신 기억이 난다. 저렇게 많은 연세에도 그저 대접만 받으려 하지 않고 뭔가를 베푸시는 마음이 너무 예쁘시다.
자식에게 기대려 하지 않고 힘이 있는 한 보행기를 끌며 동네를 몇 바퀴씩 돈다고 하신다. 그래야 근력도 좋아지고 기분 전환이 된다는 건전한 생각을 하고 계시니 참 대단하신 분이다.
90 평생을 살아왔는데 왜 가슴 아린 사연이 없겠는가? 남정댁도 자식을 먼저 앞세웠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가장 머리 좋고 장래가 촉망되던 아들을 하늘로 보낸 슬픈 사연이 있다면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장모님께서 정신이 맑으시다면, 밤새도록 사연을 들어주련만, 막상 친구가 곁에 없으니 많이 외로우실 것 같다.
괜히 오늘, 우리가 장모님을 모시고 왔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내가 어르신 댁으로 가서 하직 인사를 드리고 왔다. 준비를 끝내고 처가를 나서려는데, 어느새 차 옆으로 오셔서 창문을 보며 손을 흔드신다.
“상동댁! 가시데이, 두어 달 지나면 또 오시게~~”
“그래, 잘 있으소 남정댁! 또 오겠니더~~”
두 할머니의 티 없는 우정은 애잔했다.
노인네의 건강은 언제 어떻게 될지 자신할 수 없다. 그래도 사정이 허락하면 서너 달에 한 번이라도 남정댁을 찾아뵙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상동댁과 남정댁, 두 어르신에게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정서적 결합이 유채꽃처럼 피고 있었다.
가끔 작은아들이 주말에 온다고는 하지만, 친구를 보내는 남정댁 어르신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고 있었다.
(2023.4.13.)
첫댓글 효도했습니다. 효는 나의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에게 베푸는 것이 전부 효라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제일의 효도입니다. 수려한 문장 잘 읽었습니다.
글 속에 글쓴이가 심어 놓은 둥구나무가 보이고, 바다와 들판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정겨운 삶이 보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 보입니다. 문향이 풍기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