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6코스는 진도구간의 첫 출발지이며
녹진관광단지에서 출발하여 망금산자락의 진도타워,
울돌목 무궁화동산을 지나 해안도로를 걸어 진도갯벌습지보호구역과 둔전방조제,
벽파정류장 앞의 충무공전첩비표지석으로 진입하여 충무공전첩비를 돌아보고,
전망이 수려한 벽파정으로 내려가서 고군연동마을의 끝에서
선황산 임도길을 거쳐 용장제에서 배중손 사당을 거쳐
용장성까지 15.5km의 거리를 걷는 둘레길이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2001년 10월 30일 진도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1597년(선조 30) 9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거둔 명량대첩(鳴梁大捷) 승첩을 기념하고,
해전에서 순절한 진도 출신 참전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1956년 11월 29일 건립한 비석이다.
비신 높이 3.8m·폭 1.2m·두께 58cm 크기로, 비문(碑文)은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썼다.
벽파진(碧波津)은 명량해협의 길목으로,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나루터를 말한다
만금산 진도 타워를 올라 명량해안과 진도대교 울돌목과 대교 건너 우수영까지
보고 타워를 내려와 진도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벽파진 전첩비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기념비를 둘러 보고 이제 오늘의 난코스인 선황산을 넘어
용장성까지 약 4Km의 산길을 넘어야 한다 산의 높이야 150m도 안되니 힘을 내 본다
고려의 장군 배종손님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삼별초를 이끌고 항쟁을 하던 곳이다
꿀을 발라 놓았는지 좁아 터진 이 나라를 탐내는 나라가 얼마나 많았는지....
잠시 선조들의 희생에 감사함을 느낀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없는 용장성 주차장 끝에 종점 표식 보인다
진도 동안 넙섬을 마주하고 굽 도는 군내면 해안을 따라 둔전 방조제를 건너고,
고군면 오류리 긴 곶(長串) 해안을 따라 벽파진을 찾았다.
진도대교가 진도의 육로길 관문이라면, 벽파진은 진도 바닷길 관문이다.
목포와 완도를 거쳐 제주를 오가는 뱃길은 지금도 벽파진을 거친다.
벽파진은 명량대첩을 이룬 전승지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 때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남은 열두 척의 수군을 이끌고
이곳에서 보름간 머물며 명량대첩을 이뤄냈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를 찾았다.
창송 울울한 기반암 구릉 위의 장척(長尺) 전첩비가 거북등을 타고 올라 남해를 주시하고 있었다.
"벽파진 푸른바다여 너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졌도다.
민족의 성웅 충무공이 가장 외롭고 어려운 고비에 빛나고 우뚝한 공을 세우신곳이 여기 이러니라."고
한 노산 이은상 선생의 비문이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발치의 10칸 벽파정도 기반암 언덕에 단아하게 서 있었다.
화려한 단청이 없어 소박한 모습이 더 중후하게 보이고,
난간을 찾아드는 갯바람은 의구(依舊)하지만 옛
찾던 인걸들이 없으니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다시 용장성(龍藏城)을 찾았다.
벽파항을 뒤로하고 벽파 방조제를 지나 연동마을을 가로질러 선황산을 넘어간다.
벽파진에서 용장성으로 가는 이 길은 삼별초(三別草)의 호국역사 탐방길과 겹친다.
서해랑길에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 탐방로다. 지금부터 750여 년 전인 서기 1270년에
강화도에 있던 삼별초 군이 이곳 벽파진으로 와 용장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삼별초군은 당시 고려의 원종이 무신정권을 물리치고 고려에 투항해 개경으로 환도하며
정부군이었던 삼별초군을 해체하려 하자 이에 반기를 든 배중손 장군이 왕손(王孫)인
승화 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옹립해 강화도를 떠나 이곳
벽파진으로 입도해 용장산 아래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항전을 이어갔었다.
용장성 입구엔 자귀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서 있고,
옛 우물가의 잡초 밭엔 용장산성을 알리는 갈석(碣石)이 700년의 슬픈 역사를 지키며 서 있었다.
용장산과 선황산을 잇는 능선에는 아직도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고 전하나 찾아보지는 못했다.
용장사 고각(龍藏寺 鼓閣) 너머로 선황산 석두마루가 염천 석양에 졸고 있었다.
서해랑길 6코스는 그렇게 진도의 문화와 역사 지를 찾아 걷는 호국역사탐방길이었다
진도 금골산
금골산은 군내면 둔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개골산이라는 다른 이름이 말해주듯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돼 "진도의 금강"이라고 불리우는 명산으로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에 세개의 굴이 있고
5층석탑(보물 제 529호)과 산 중턱의 굴에
마애여래좌상(전남 문화재자료 제 110호)이 음각되어 있으며
해언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최근에 복원되었다.
1498년 정언벼슬을 지낸 이주(李胄)가 무오사화때 이곳에 유배되어
금골산의 아름다움에 감탄,『금골산록』을 지어 서거정의
동문선에 실려 오늘에 전 해오고 있다.
산에 올라보면 바위벼랑을 깍아 들어간3개의 석굴을 보게되며
맨 왼쪽굴 북쪽벽에는 1470년께 조각한 것으로 알려진
좌우 3.5m 크기의 미륵불이 있다.
이산은 해발 193m에 불과하지만,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우뚝 솟은 기이한 산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일일이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십 길 절벽에는 층층바위를 이룬 곳 구멍이 숭숭 뚫린 곳이 있는가
하면 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 또는 짐승으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산 전체를 수놓고 있다.
금골산의 유래
금골산이란 이름의 유래는 따로 전해지지 않으나
쇠 금(金)자에 뼈 골(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산 전체가 철분함량이
높은 화산암과 누런 금빛의 응회암으로 이루어졌고
뼈처럼 골격미가 드러나 있는 산지 모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골산 마애여래좌상
조선 전기 1469년부터 약 3년 동안 진도군수를
역호지(柳好池)의 발원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