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흔한 일상적인 일입니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 앞에 여러 개의 택배가 와 있습니다. 양손 가득 들고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내와 딸아이가 상자를 반기죠. 그러고는 하나씩 열어 봅니다. 심심해하던 차에 잘된 일이죠. 갑자기 집안에 생기가 돕니다. 하지만 이 시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쇼핑 중독인 것 같아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네요. 택배를 받고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로 방치했다가 눈에 띄면 하나씩 열어봅니다. 이력서를 보내면 인사담당자들은 열어보지도 않고 방치하겠죠. 상자들은 열리기만 기다리는데 말이죠.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화자에게 선택된 상자는 드디어 눈을 떴다고 생각하겠지만, 착각입니다. 우리는 선택된 상자일까요? 아니면 그냥 버려지는 상자일까요? 요즘은 어디든지 합격하기가 어렵고 눈에 띄기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합격한다고 끝일까요?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그렇습니다. 선택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세계는, 세상은 먼저 선택된 사람들이 있지요. 빛과 같은 사람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앞에는 늘 빛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부신 성공을 이뤄나가는 사람들이지요.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시인은 이제서야 상자 안의 내용물에 관심이 가나 봅니다. 그렇죠, 각자가 가진 개성이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다릅니다. 그러나 상자를 열기 전엔 모르는 일이잖아요. 상자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아, 안타깝습니다. 열리자마자 필요한 것, 필요 없는 것으로 양분됩니다. '저 인간은 꼭 필요해, 저 인간은 필요 없어!' 이제 겨우 열렸는데 필요 없는 존재가 된 니트가 있군요. 새로 산 화분에 넝쿨을 옮겨 심어요. 손은 흙투성이가 되는 평범한 일입니다. 자, 우리는 빛을 따라가야 합니다.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은 빛의 방향이니까요.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우리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라는 식물입니다. 빛을 잘 따라간다면 우리는 자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지 못한 삶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군요. 다음 연을 보면 선택받지 못한 상자들의 삶이 있습니다.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선택받지 못한 상자들은 이삿짐처럼 이리저리 밀쳐지고 종내에는 유품처럼 남습니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세상에서 선택받지 못한 것들은 도태되고 사라집니다. 이 방은 거대한 인력 시장입니다. 선택되지 못한 것과 선택된 것. 시인은 이 세상을 하나의 상자로 보고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최고의 상상력입니다. 어떤 이들은 만두를 하나의 세상으로 보기도 하고요, 아파트를 하나의 상자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하나의 사물을 또 다른 이미지로 창조하는 발견이 필요합니다. 그런 발견을 잘 하는 이들이 시인들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내가 상자를 선택하는 듯 보이지만, 나도 상자가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고 물리는 우로보로스의 삶인 거죠.
이 글은 그저 저의 감상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견해를 달리하실 수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냥 읽으시고 그럴 수도 있겠군, 저 부분은 나와는 다르군, 하시면 됩니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