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신발장에서 당신이 고르는 신발을 보면 어림짐작할 수 있다. 오늘 당신이 어떤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구두를 신고 나서는 발의 표정은 규범적이다. 그 표정은 '안전한' 동선과 몸짓 안에 있다. 구두를 신은 발은 격정적인 연애 순간조차도 가(이)드라인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운동화는 가벼운 유희적 에너지로 충전되어 있다. 꼭 운동장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소녀들 운동화가 아니더라도 그 동선은 밑창의 '에어쿠션'처럼 살짝 들떠 있다.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외부에 노출하고 있는 슬리퍼는 어떠한가. 노출된 발가락이 어울리는 만남은 뭐니 뭐니 해도 '동네 친구'다. 신발은 바닥에 끌린다. 시간은 '또각또각' 가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흘러간다. 그렇다 한들 슬리퍼 세계에서라면 무엇이 문제랴.
'장화'라는 사물은 좀 다른 분류법에 속한다. 이 사물이 지시하는 것은 '사람들 간 사교'가 아니다. 순전한 '자연' 그 자체, 예컨대 '비'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어가는 천진한 꼬마나, '자연-도구-땀'이 뒤섞인 '노동'의 세계가 그 사물이 속하는 곳이다. 물이 가득 고인 논두렁에 종일 발을 들여 놓는 농부, 하수도관을 묻고 맨홀 속으로 들어가는 인부, 회색빛 질퍽한 갯벌에서 꼬막을 캐는 아낙네, 쏟아져 흘러내리는 장마철 토사 위에서 야간 도로작업을 하는 군인들의 검은 신발, 그것이 바로 장화다.
'장화'가 패션에 민감한 도시 여성들의 여름 머스트 아이템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이들이 기억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어린 시절 꼬마 장화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화를 신고 사교 자리에 선뜻 나가기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사교' 세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화는 괴상한 형상을 하고 있다. 신발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발과 다리의 일부처럼 보인다. 발바닥부터 무릎 아래까지 깊숙이 고무에 감싸인 맨발의 피부는 자연물도 인공물도 아닌 어떤 것으로 자기 신체가 변하는 묘한 흥분에 휩싸인다. 신어 본 사람은 안다. 이 사물 속으로 들어간 발에 촉감으로나 형상으로나 '트랜스포머'적인 원초적 쾌락이 발생한다는 은밀한 사실을. 그래서일까. 장화는 단호하게 정직한 표정을 하고 있기도 하다. "내가 막을 수 있는 물의 수위는 장화가 올라온 여기까지야." 이때 이 사물은 상대에게 '패를 깐' 신발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