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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불교의 근본 교리.
일체의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범어(梵語)로는 아니탸(Anitya),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니짜(Anicca)로 인도 힌두교사상의 집약서인 『우파니샤드(Upaniṣad)』에서 강조되었던 상주설(常住說)의 반대개념으로서 현상계를 시간적으로 파악한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다.
연기설(緣起說)은 이와 같은 무상관(無常觀)을 바탕으로 성립되었으며, 초기 불교의 근본교리인 삼법인(三法印: 諸行無常 · 諸法無我 · 涅槃寂靜)의 하나가 되었다.
무상이란 만물은 항상 변하며, 영원한 실체로 존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만물의 실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것이 불규칙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련을 맺는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코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연기설로써 천명하고 있다. 즉, 인(因)과 연(緣)이 서로 결합하여 생겨난 모든 현상은 무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상관은 단순한 비관적(悲觀的) · 허무적(虛無的)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하기 때문에 항상 변화가 있고,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려야 함을 깨닫게 되며, 귀중한 생명을 방일(放逸)하게 사용하는 일 없이 정진(精進)하고 노력(努力)하려는 적극적인 생활과 연결된다. 이것이 불교가 가르친 무상의 참 뜻이다.
무상에는 염념무상(念念無常)과 상속무상(相續無常)의 두 종류가 있다. 염념무상은 찰나 사이에도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4상(相)이 있어 잠시도 정지하지 않는 것을 지칭하고, 상속무상은 사람의 목숨과 같이 만물이 일정 기간에 걸쳐서 생주이멸하는 변화를 말한다. 또 무상을 체득하는 느낌과 빠름은 흔히 말에 비유되는데, 이를 사마유(四馬喩)라고 하여 특히 우리나라 선종에서 많이 인용하였다.
사마유란 첫째,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놀라는 말은 다른 마을에 누가 죽었다는 말만 듣고 놀라는 사람과 같고, 둘째, 채찍이 털에 닿고야 놀라는 말은 자기 마을에 죽은 사람이 있음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며, 셋째, 채찍을 살갗에 맞고야 놀라는 말은 자기의 친척이 죽은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며, 넷째, 채찍에 맞아 뼈에 사무치도록 아파야만 놀라는 말은 자기가 병들어 앓고야 비로소 놀라는 사람과 같다고 한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빨리 무상을 느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무상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어떠한 종파에서도 이 무상에 대해서는 공통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불교사상의 근원은 인간의 현실생활을 고(苦)라고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고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면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규정하고, 이 괴로움의 원인을 더욱 논리적으로 규명해 가면 무상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그 밖의 모든 괴로움도 무상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으며,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의 제일 앞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무상은 생겨난 일체의 존재가 갖는 필연적인 상태로 이 무상을 체득하는 것이 해탈에의 첫걸음으로 연결된다. 또 불교의 여러 문헌 속에서는 무상과 멸(滅)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미혹과 번뇌를 잠재우고 제거한다는 실천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 이상 한민족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기독교에서 갖는 무상의 개념
무(無)라는 말은 기독교적 용어가 아닌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기독교의 창조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무(無-공허함:Emptiness)와 혼돈과 흑암가운데서 유(有), 곧 천하 만물을 존재하게 하였다. 기독교의 가난한 마음이나 겸손은 있는 그 자체를 없애버리는 무의 개념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다른 것, 곧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다시 입고, 채우는 충만한 삶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도대체 세상의 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생의 지혜는 크고, 많고, 높고, 넓은데 있지 않다. 그래서 고려시대 송도삼절의 한 사람이었던 황진이도 당대의 실력자인 벽계수(碧溪水)에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쉬어가는 것’은 바로 인생의 지혜이다. 성경 시편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90:12) 라고 말씀한다. 인생의 쉼은 단지 여행이나 휴가가 아니라 우리위에 또 다른 존재, 곧 인생보다 더 영원하신 분, 이름하여 ‘무상(無上)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만큼 인생의 가장 큰 지식과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그 무상(無上)의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에게 무상(無償)으로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면 감사할 뿐이다. 땅바닥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며 가소로이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가소롭게 보실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한번 입기운을 발하시면 그 어느 누구도 이 땅에 남아 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자기의 손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바벨탑을 쌓아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으나 결국 그 탑은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현재 시가로 비교할 때 1억의 채무를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만원의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는 사람을 비유하면서 우리 사람들이 그렇게 옹졸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꾸짖으셨다. 이민 생활하면서 이 사람, 그리고 저 교회에서 받은 마음의 아픔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서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가를 생각하며 미움과 아픔, 그리고 다툼과 허영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면 결국 무상(無常)의 단계에 오르게 된다. 이 무상(無常)은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라고 하신 그 ‘헛됨“이 무상(無常)이다. 그렇다고 이 헛됨은 단지 의미가 없고, 소망이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헛됨은 결국 사람이나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잠깐이고,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만이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무상(無常)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자살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염세주의로 빠지게 된다. 진정한 무상(無常)은 나를 찾고, 이웃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가게 된다. 이것이 사울이 바울이 되었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가 된 커다란 변화를 갖게 하는 것이다.
무상(無常)을 알면 마지막으로 무상(無想)의 단계에 이른다. 이 무상(無想)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필요한 생각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4:31) 욕심을 버리면 자기를 찾게 되고, 자기를 찾으면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무상(無想)이다. 무상(無想)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기쁨을 낳고, 기쁨은 행복을 누리게 한다.
무상(無上)의 하나님을 믿고, 무상(無償)의 은혜에 감사하고, 무상(無常)의 삶으로 만족하고, 무상(無想)의 생각으로 인격을 만들어 갈 때 안보이던 하나님, 무(無) 하나님이 유(有)의 하나님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고 잃었던 자기를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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