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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와 응답 사이에서 /
기도 후 응답을 기다리되, 생각을 멈추지 말라.
- 주님의 섭리 안에서 생각하고 깨닫는다는 것
우리는 기도할 때 때때로 이렇게 묻는다.
‘주님, 왜 이것을 보여 주십니까?’
특히 자신의 안에서
어떤 악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욕망이나 집착, 분노나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어느 순간 선명하게 드러나면
단순히 ‘내가 이런 악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왜 지금 이것을 보여 주시는가?’라고 묻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한 뒤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을 멈추려고 한다.
혹시 떠오르는 생각이 주님의 응답을 방해하는
잡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 질문을 드린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주님께서 어떤 생각이나 깨달음을
직접 넣어 주시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물론 조용히 주님을 기다리는 기도는 중요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욕망과 판단을 내려놓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의 생각을 중단하고 특별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기다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베덴보리의 사상에서 인간에게는 이성과 자유가 있으며,
이 두 능력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
‘사람에게는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하는 능력이 있으며,
이 두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 DP 73
이것은 기도와 응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된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일을 판단하기 위한 능력만 주셨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여
진리를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고,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따라서 기도한 뒤 생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의 응답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주님께 질문을 드린 후에는 그 질문을 마음에 품고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살피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
‘이 악은 왜 지금 드러났을까?’
‘이것은 언제부터 내 안에 있었을까?’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늘 이렇게 반응할까?’
‘내가 이 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악의 배후에는 어떤 사랑이 있는 것일까?’
‘나는 무엇을 잃을까 봐 이것을 붙들고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는 왜 하필 지금 이것을 보게 하시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진리 안에서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 주님께 묻고, 주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
사람이 자기 생각을 사용하는 것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자기 지혜를 절대화한다는 것은
‘내가 반드시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내가 분석해서 나를 고쳐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겉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살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최종적인 판단자와 치료자로 세우게 된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여 주셨으니, 제가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게 해 주십시오.’
이런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경우 모두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각의 출발점과 방향이 다르다.
한쪽에서는 내가 답의 근원이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님을 진리의 근원으로 인정하면서
내가 가진 이해를 사용한다.
이 차이는 중생에서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이성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 구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진리를 보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비추어 보도록 하신다.
따라서 기도 후에 생각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실 자리를 빼앗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이해의 능력을
주님 앞에서 사용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와도 연결된다.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과 판단과 선택의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스스로 하는 것처럼 행하지만,
그 생명과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DP 73 연산
그러므로 기도 후에 해야 할 일은
생각을 완전히 멈추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자기 생각을 마음껏 믿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 마음을 열어 놓은 채 진리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 이미 받은 진리가 현재의 삶에서 살아나는 과정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주님의 응답은 반드시 새로운 정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형태로 주어질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미 말씀을 통해 진리를 주셨고,
인간에게 그 진리를 이해하고 기억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님께서 이미 배운 진리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말씀을
새로운 상황에 연결하여 깨닫게 하실 수 있다.
예전에 읽었던 성경 구절이 갑자기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오랫동안 알고 있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어느 날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비추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과거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던 자신의 행동이
이제는 어떤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일 수도 있다.
서로 관계없어 보이던 여러 기억과 경험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이해가 생길 수도 있다.
이때 새롭게 얻은 깨달음은
반드시 새로운 계시라고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미 주어진 진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새롭게 살아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다.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를 전혀 주시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계시와 말씀을 통한 진리의 전달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개인의 일상적인 영적 인도라는 차원에서는
주님께서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진리와 이성을 통하여
현재에 필요한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중생 역시 이러한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
스베덴보리는 개혁과 중생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바라보고 그 진리를 이해하며,
그 진리가 삶 안으로 들어가면서 점차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질서를 보여 준다. TCR 571
따라서 중생은 사람이 자기 영혼의 모든 것을
스스로 분석하여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다.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고,
그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악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체 과정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주님이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지만,
그 이해를 밝혀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살피지만,
무엇을 언제 보게 하실지는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
인간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을 행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이미 알고 있던 진리가
어느 순간 현재의 삶을 비추는 빛으로 살아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 환경 속에서 발견되는 주님의 섭리
주님의 응답을 생각과 기억 속에서만 찾을 필요도 없다.
때로는 삶의 환경 자체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자리가 된다.
어떤 사람이 한마디를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흔든다.
화가 치밀고, 억울하고,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고,
상대방에게 강하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바라본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말했을까?’
‘저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물론 상대방에게 실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모든 사건을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질문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말에 이렇게 크게 흔들렸을까?’
‘왜 이 말이 내 안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환경은 자신의 내면을 보여 주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 사건 자체를 곧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특별한 메시지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모든 우연한 사건에 숨은 계시를 찾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드러났는지를 살피는 것은
신성한 섭리의 관점에서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환경이 나를 반복해서 흔든다면,
그 환경 자체만 바라보지 않고
그 환경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자신 안에 있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랑일 수도 있다.
자존심일 수도 있다. 소유하려는 사랑일 수도 있다.
통제하려는 사랑일 수도 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사랑일 수도 있다.
이처럼 환경은 그 자체가 계시라기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드러남을 통해
주님께서 내가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실 수 있다.
- 악의 뿌리를 찾되 자기분석에 머물지 않는 것
그러므로 자신의 악을 살피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경계가 있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내 안의 모든 악의 뿌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끝없이 파고드는 것 자체가 중생은 아니다.
인간이 자기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모두 분석하여
스스로 치료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지금 보여 주시는 악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주님께서 어떤 악을 보여 주셨다면,
그 악을 악이라고 인정하면 된다.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고 거부하면 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선을 선택하면 된다.
모든 악의 가장 깊은 원인을 지금 당장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오늘 보여 주신 만큼 보고,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응답하면 된다.
그 다음에 무엇을 보여 주실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자기분석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자기 성찰은 필요하지만 자기 성찰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보고
주님께 응답하기 위해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주님께 열어 놓는 것
이제 기도 후의 응답을 받기 위한 침묵도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침묵은 반드시 생각의 정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은 자기 생각을
주님의 진리 앞에 내려놓는 것일 수 있다.
‘주님, 왜 이것을 보여 주셨습니까?’라고 물었다면,
그 다음에는 그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수 있다.
생각이 떠오르면 무조건 붙잡을 필요도 없고,
무조건 버릴 필요도 없다.
그 생각을 진리 앞에 가져가면 된다.
‘이 생각은 진리에 맞는가?’
‘이것은 나의 악을 정당화하려는 생각인가?’
‘아니면 내가 보지 못했던 악을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이 생각은 나를 자기중심적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주님께 의지하게 하는가?’
이렇게 분별하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도와 생각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기도가 주님께 질문을 드리는 것이라면, 그 후의 생각은
그 질문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말씀을 읽고, 과거에 배운 진리를 떠올리고,
현재의 환경을 경험하고, 자신의 반응을 살피면서
여러 조각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어느 순간 하나의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
‘아, 내가 이것 때문에 그랬구나.’
‘내가 놓지 못하고 있던 것은 이것이었구나.’
‘주님께서 지금 이것을 보여 주신 이유가 조금 보이는구나.’
이런 깨달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새로운 정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랫동안 알고 있던 진리가
지금의 삶 속에서 비로소 살아난 것일 수도 있다.
- 모든 떠오르는 생각을 주님의 응답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도 후에 생각을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모든 떠오르는 생각을 주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각에는 자기욕망도 들어오고, 자기합리화도 들어오며,
자신의 편견과 두려움도 들어온다.
그러므로 ‘기도한 뒤 떠오른 생각이니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생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
그 생각이 악을 선이라고 부르게 하는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게 하는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하는가?
자기 의로움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악을 더 정직하게 인정하게 하는가?
선과 진리를 더 사랑하게 하는가?
주님께 의지하게 하는가?
회개와 변화로 이끄는가?
이러한 분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간의 이해를 사용하는 것과
인간 자신의 지혜를 따르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스베덴보리에게 이성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지만, 인간은 그 이성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진리라고 믿을 수는 없다.
이성은 진리의 빛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기도의 질서
이 모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 사이의 관계와 연결된다.
사람은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판단해야 한다.
사람은 악을 거부해야 한다.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한다.
그것을 주님께서 대신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수동적인 자기포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구원도 아니다.
사람은 마치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원리를 기도에 적용하면 매우 깊은 의미가 생긴다.
기도할 때 주님께 질문한다.
그리고 기도한 후에는 인간으로서 생각한다.
진리를 기억하고, 말씀을 읽고, 자신의 반응을 살피고,
환경을 돌아보고, 악을 분별하고, 선한 길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나보다 먼저 일하고 계심을 믿는다.
내가 찾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찾도록 인도하신다.
내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내가 깨닫는 것 같지만, 진리를 밝히는 빛은 주님에게서 온다.
내가 악을 거부하는 것 같지만,
악을 거부할 수 있는 생명 역시 주님께 있다.
이것이 인간의 협력과 주님의 역사 사이의 균형이다.
- 기도의 응답은 함께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보면 기도의 응답은
‘내가 묻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단순한 구조보다
훨씬 깊은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도는 주님께 질문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사용한다.
이미 배운 말씀을 떠올린다.
기억 속의 진리를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본다.
자신의 반응을 살핀다.
환경 속에서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다.
때로는 아무런 깨달음도 즉시 오지 않는다.
때로는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한다.
때로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기도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원하는 순간에
모든 답을 알려 주는 방식으로만 역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보고,
그만큼 응답하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해하려 할 필요가 없다.
오늘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보고, 그 악을 인정하고,
그 악을 거부하고, 그 반대편의 선을 선택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더 깊이 드러날지는 주님께 맡길 수 있다.
중생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완성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질서 있게 재창조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생각하는 것
결국 기도 후의 삶에는 특별한 균형이 필요하다.
생각을 멈추는 것만이 기다림은 아니다.
반대로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밀고 가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 맡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도 주님께 맡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 인간의 이성은 주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된다.
인간의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저장소가 아니다.
이미 배운 진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새롭게 연결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환경을 주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볼 수 있지만,
그 환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반드시 특별한 계시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환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드러나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성찰은 자기 영혼의 치료가 아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에 응답하기 위한 통로다.
그리고 깨달음은 인간이 주님을 대신하여 발견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스스로 찾는 것처럼 걷게 하시면서,
알맞은 때에 보게 하신 빛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기도 후에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잡념으로 취급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모든 생각을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생각을 진리 안에서 살펴보면 된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살피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시 분별하고,
삶 속에서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바라보면 된다.
그 과정 전체를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의 이성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성과 자유를 보존하심으로써
인간이 진리를 스스로 보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살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근원은 주님이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은
반드시 귀에 들리는 음성일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던 진리가 새롭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말씀의 의미가 갑자기 깊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반응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삶의 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어느 날 하나의 빛으로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조차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지금 보여 주시는 것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늘 보여 주신 악을 인정하고, 오늘 거부해야 할 것을 거부하고,
오늘 행해야 할 선을 행하면서,
아직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의 생각은
주님의 섭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섭리 안에서 사용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뒤돌아보며 알게 될 수 있다
내가 혼자 답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질문하고,
살피고, 고민하고, 선택하며 걸어오는 동안에도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나를 인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그것이 신성한 섭리가 인간의 자유와 이성 안에서 역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맺으며
기도의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주님의 음성으로 착각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진리 안에서 생각하고 살피면서, 그 생각과 깨달음의 근원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이성을 대신하여 생각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이다.
우리는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깨닫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 생각하고 깨닫는 생명 자체는 주님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기도한 뒤에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기다림일 필요는 없다.
주님 앞에서 생각하고, 말씀을 살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환경 속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반응을 바라보면서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당장 알아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주님께서 지금 보여 주시는 악에 충실히 응답하면 된다.
주님께서 아직 보여 주지 않으신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진리를 보게 하시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다음의 빛을 준비하신다.
이 글을 읽고 느끼는 가장 깊은 감동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와 함께 생각하도록 이끄신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과 이해와 자유를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들을 보존하시면서,
이미 주신 진리가 필요한 때에 살아나도록 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걷는 것처럼 걸어가지만,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주님의 섭리는
이미 질서 있게 일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보여 주신 것에 충실히 응답하면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은 주님께 맡길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모든 것을
선한 목적을 향해 이끄시는 신성한 섭리를 신뢰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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