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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발로 왕궁을 떠난 왕자
어린 왕자를 볼 때마다 옥까까 대왕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눈치 챈 젊은 왕비는 기회를 살펴 수시로 맹세를 상기시키며 어린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때마다 옥까까 대왕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 자리를 모면하곤 했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어린 왕자를 예뻐하는 모습을 들킬 때마다 옥까까 대왕은 장성한 왕자들을 보기가 민망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옥까까 대왕과 장성한 왕자들의 사이는 서먹해졌고 왕자들의 지위는 위태로워졌다.
결국 갈등하던 옥까까 대왕은 세상을 떠난 왕비가 낳은 왕자들은 떠나보내기로 결심하였다.
눈에 밟히는 어린 왕자와 젊은 왕비를 버리는 것보다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왕자들을 버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왕자들을 떠나보내려고 하니 가슴이 너무나 아파왔다.
결국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린 왕자들이 스스로 나라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였다.
왕실의 권력 다툼에 밀려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자발적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왕자들은 ‘추방’이 아니라 옥까까 대왕은 환송을 받으며 왕궁을 나설 수 있었다.
옥까까 대왕은 왕자들을 떠나보내면서 많은 보물들을 하사하였고 왕자들이 억울하게 쫓겨나는 것을 아는 많은 사람들과 대신들도 뒤따랐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왕자들에게 힘이 된 것은 공주들이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다섯 명의 공주들도 왕자들과 함께 길을 떠난 것이다.
왕자들과 달리 왕위를 두고 권력다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주들은 왕궁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대신 고생을 하더라도 피를 나눈 형제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공주들의 합류로 왕자들의 행렬은 그나마 덜 초라할 수 있었다.
왕자들은 길을 떠나면서 한 가지 맹세를 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되 다른 왕이 통치하는 지역을 침범하거나 다른 왕의 지위를 힘으로 빼앗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어떤 왕이나 그 어떤 나라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있는 지역을 찾으려다 보니 어느덧 왕자들의 행렬은 인도 북쪽의 히말라야 산자락에 이르렀다.
왕자들과 공주들의 행렬이 히말라야 부근에 도착했을 때 그 근처에는 ‘카필라’라는 이름의 대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신통력으로 왕자들이 나라를 세울 땅을 찾고 있는 것을 알았고,
어떤 땅이 적합한지를 단번에 알아냈다.
그곳은 바로 자신이 수행을 하고 있는 히말라야 중턱이었다.
대수행자 카필라는 왕자들을 자신의 초막으로 인도한 후 그곳에 도시를 세우라고 권했다.
그리하여 왕자들과 공주들은 길고 힘들었던 여정을 끝내고 대수행자 ‘카필라’의 초막이 있던 곳에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카필라의 도시’ 즉 ‘카필라바스투(카필라왓투)’라고 지었다.
혈통의 신성을 위해 공주들과…
남쪽으로는 로히니 강이 흐르고 토양은 기름지고 비옥하며 숲이 우거져 온갖 동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카필라는 실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수행자 카필라의 도움으로 좋은 땅을 찾아낸 왕자들이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찾아와 백성이 되기를 청했다.
나라의 기본이 조금씩 갖춰지자 신하들은 주변의 나라들과 왕족들,
귀족가문들을 꼼꼼히 살피며 혼인 적령기의 왕자들과 짝을 이룰 만한 훌륭한 가문의 처녀들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어질고 아름다운 처녀들을 찾은 신하들은 왕자들에게 이제 결혼을 하라고 권했다.
나라가 안정을 찾고 탄탄해지려면 나라를 세운 왕자들이 가족을 이루고 번성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혼인을 통해 주변의 유력한 가문이나 왕실과 인연을 맺는 것도 카필라의 번창을 위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거론한 신부 후보들의 이야기를 들은 왕자들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는 우리와 종족이 비슷하고 혈통이 훌륭한 공주들을 찾기가 힘들다.
그것은 우리의 여동생인 공주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만약 종족과 혈통이 훌륭하지 않은 여인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면,
혈통의 깨끗함이 무너질 것이다.
이는 우리의 여동생인 공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여동생인 공주들과 결혼하기를 원한다.”
오, 샤키야(석가)!
왕자들이 혈통을 잘 지키는구나!
친 여동생과 친 오빠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자와 공주들이 혈통의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 근친결혼을 하는 것은 왕실의 오랜 전통이다.
이는 고대인도 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신라나 중세의 유럽의 왕실에서도 흔히 있던 관습이었다.
왕족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여동생인 공주들과 결혼하겠다는 왕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신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였다.
한편 왕자들이 떠난 후 옥까까 대왕은 그들이 무사히 좋은 땅을 찾아 나라를 세우고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그러던 중 마침내 왕자들이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비옥한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공주들과 혼인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옥까까 대왕은 비로소 안심하고 기뻐하며 외쳤다.
“오, 샤키야(석가)! 우리 왕자들이 종족의 혈통을 무너뜨리지 않고 잘 이끌어 가는구나!”
옥까까 대왕의 기쁨에 찬 탄성은 새로운 나라 ‘카필라’를 건설한 왕자와 공주들의 종족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종족, ‘샤키야(석가)’ 족의 탄생이다.
[불교신문3170호]
< 걷기명상, 행선중인 자비팀 포교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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