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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제나 시거(여송연)를 입에 물고있다.
현대극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서사극, 소외효과가 그를 설명하는 중요 단어들이다.
그는 극작가이기 전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브레히트 자신의 생가 앞에서 포즈
인류를 발전시킨 창조적인 원동력은 노동이며,
노동은 개인을 위한 땀방울이 아니라 인류라는 씨, 종(種)을 위해 쏟아 붇는 노력이라고 믿는
그는 마르크스주의1자다.
연극적 환상을 일으키는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서사극(敍事劇)2을 통해
나치를 조롱하고 반나치주의에 앞장 섰다.
그는 드라마를 좌익운동을 위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토론장으로 발전시켰다.

언제나 그의 손가락에는 시가가 있다.
시가가 없는 시간에는 펜이 쥐어 있든지.
내 방 벽에는 일본제 목제품인
황금색 칠을 한 악마의 가면이 걸려 있다.
그 불거져 나온 이마의 핏줄을 보고 있노라면
악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 <악한 자의 가면>3이라는 시다.

물질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생산이 그 원동력이고 노동은 인간을 이상사회로 운반해가는 도구일 것이다.
이 창조적인 노동 에너지의 땀과 눈물에 의한 소작을
하찮은 임금을 주고 도둑질하는 부루주아지 계급을 경계했다.
세계는 자본가 계급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
노동력에 참여하지 않은 그들은 임금이라는 장치로 착취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현실적인 모순을 '소외'라고 표현했다.
브레히트도 그의 소외효과에서 ‘소격’ 대신 헤겔의 ‘소외’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소외 (疏外, alienation)4란
자신의 주변으로 부터, 노동이나 노동의 산물들이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된 감정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다.
그가 연극에서 처음으로 주창한 소외효과(疎外效果)라는 것은
말하자면 마르크스적 사고의 환경에서 시작 되었다.
‘소격 효과' 혹은 이화효과(異化效果)’5는
간단히 말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상스럽고 낯설게 보이도록 거리를 만드는 수단이다.
관객이 스토리에 빠져들면 연극에 <동화(同化)>되자만, 그렇게 되면 비판을 잃어버린다. 적당한 거리를 만들어 연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론이며 기술이다. 브레히트의 장치들은 이 목적에 부합된다. 브레히트는 자주 관객에게 회상에 젖거나 연극에 빠져들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밤 장면조차 강한 조명을 썼다. 무대를 낯설게 함으로써 객석과 거리를 두기를 희망했다. “희곡의 묘사는 내용과 사건을 하나의 소외 과정에 종속시켰다”고 했다.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무대 위에 도덕 문제와 현대의 사회현실을 재현하여 관객의 지성에 호소하려 했다.
그는 관객의 감정적인 반응을 차단하고자 했으며 관객이 등장인물과의 감정이입을 통하여 연기에 사로잡히는 경향을 방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그는 '소외효과(이화효과)'를 사용하여 관객들이 연극에 공감하는 것을 막고,
연극에 대하여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연극의 주제를 심사숙고하게 하여
그것을 이해하며 그 주제에 대해 지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다.

초기의 희곡에는 표현주의적인 경향도 남아 있었다. 처녀작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세추안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의 브레히트,
의사가 되기 위해 뮌헨대학 의학부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이 무렵 그는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아우구스부르크 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일하면서 첫 희곡 <바알신Baal>과 첫 성공작 〈밤의 북소리 Trommeln in der Nacht〉(1922, 클라이스트 문학상 수상), 시와 노래 모음 〈가정용 설교집 Die Hauspostille〉(1927), 최초의 본격 희곡 〈에드워드 2세 Edward Ⅱ〉(1924) 등을 썼으며, 이 당시에는 베데킨트, 랭보, 비용, 키플링과 같은 작가들을 숭배했다.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그의 아내인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이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자의 날) 퍼레이드에 참가하고있다.
브레히트 부부가 평생 일구었던 베를린 베르너 앙상블 극단 (Berliner Ensemble)6표지가 보인다.
브레히트는 1922년 처음으로 결혼한 뒤 1924년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배우인 바이겔을 만나게 된다. 브레히트는 1927년 첫 아내와 이혼한 뒤 1929년 바이겔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 브레히트는 히틀러에 격렬하게 맞서며 오랜 기간 망명과 도피를 거듭했는데 바이겔은 평생 브레히트의 동반자 역할을 했다. 부부는 1949년 베를린에 '베를리너 앙상블(Berliner Ensemble)'이라는 극단을 함께 세웠다.

서푼짜리 오페라 The Threepenny Opera (Die Dreigroschenoper) 1928년 초연 포스터
대본은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이 번역한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를 각색한 것이다. 서막과 8개 장면으로 구성되었으며 1928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원작의 줄거리를 따르되 배경을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슬럼가로 바꾸었고, 1920년대 베를린의 사회적 상황을 풍자했다.

1980년 서푼짜리 오페라의 무대
브레히트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함께 성공을 거둔 풍자적인 민속 오페라 〈서푼짜리 오페라 Die Dreigroschenoper〉(1928)와 〈마하고니 시(市)의 흥망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1930)을 썼다.

1950년 브레히트 자신이 연출했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1941)의 무대
30년전쟁을 배경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세 아이를 차례로 잃어버린 억척어멈의 운명을 통해 무의미한 파괴력을 지닌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참혹한 전쟁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억척어멈의 모습을 보며 관객이 도리어 교훈을 얻게 되는 내용으로, 교훈극을 강조한 브레히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브레히트 바이겔 기념관7은 바로 이 베를리너 앙상블 인근에 자리를 잡고 있다.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무덤 표석.
기념관의 전시공간은 실제 부부가 1953년부터 살았던 거주지였으며 두 사람이 1956년과 1971년 각각 생을 마감한 장소이기도 하다. 기념관 안에는 부부가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 용품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브레히트의 소장 도서 4000권도 보관돼 있다.

1923년 칼 발렌틴이 공연한
이발소의 미스터리

에드워드 2 세
The Life of Edward II of England
1982년 리버사이드 세익스피어 극단의 뉴욕공연 포스터
에드워드 2세 (Edward II)8는 16세기 크리스토퍼 말로의 역사비극을 브레히트가 각색한 작품

리버사이드 셰익스피어 극단은 1977년 뉴욕에서 찰립된
셰익스피어 레퍼토리 전문 극단이다.
브레히트는 우선 많은 양식과 서법(敍法)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극작가로서는 아주 강도 높은 연구자로, 잠시 떠오른 착상이라도 끊임없이 엮어갔는데 이러한 그의 착상은 항상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서푼짜리 오페라〉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에, 〈에드워드 2세〉는 말로의 〈에드워드 2세〉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냉소적인 유머와 아울러 드물게 음악적·시각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동적인 성격을 창조한다거나 극에 긴장과 구체적 형식을 부여하는 데는 종종 실패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밝고 분명하고, 단단하게 짜여진 서사적 구성을 좋아했으며, 독일 연극을 그 본성에 반하여 소극적으로 연기하게 한 완벽주의자였고, 자신이 선호하는 것뿐 아니라 결점에서도 원칙들을 이끌어낸 이론가였다.
베를린의 베를리너 앙상블 극장 야외에
브레히트의 기념 동상

1988년 독일연방정부가 발행한 브레히트 기념 우표

브레히트의 연극미학- 변증법적 연극 9
이재진 (단국대학교 독문과 교수, 극단 우리극장 대표)의 글 하나를 비망록에 올려둔다.
베르톨드 브레히트 (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 생애10에 관한
가장 야무진 설명을 아래 미방록에 주석으로 달아 놓는다.
041 베르톨트 브레히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