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음악감독과 작업을 하다가 잠깐 쉬는 틈이 생기자, 분위기도 전환할 겸해서 얼마 전 구매한 최신 사양의 TV 모니터를 켰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꿀 때마다 각종 요리 프로그램과 맛집 추천 프로그램이 나왔다. 프로그램마다 셰프들은 어쩌면 그렇게 맛깔나게 요리를 잘하는지, MC들은 왜 또 그렇게 야무지고 탐스럽게 잘 먹는지 '먹방이 대세'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커피로 대충 마무리하려던 휴식시간이 야식 타임으로 바뀌고 흥분한 침샘을 진정시켜줄 치킨 요리를 주문했다. 치킨은 다양한 맛과 부담 없는 가격으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국민 대표야식이며 회사원도 공무원도 선생님도 예술가도 마지막은 치킨 프랜차이즈로 마감되는 대한민국 퇴직자 창업의 종착역이다. 그 얼마나 넓고 다양한 선택의 폭인가. '기승전…치킨', 치킨 아래 우리는 하나가 되고 치킨 뼈를 뱉으며 백골난망을 경험한다. 이보다 쉽고 빠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혹시 더 맛있는 프로그램은 없는지 습관처럼 채널 버튼을 누르다가 건강 프로그램에 발목이 잡혔다.
얼마 전 체중 감량에 성공해 연일 포털사이트 검색순위에 올랐던 화제의 개그맨이 출연해 자신의 다이어트 식단과 운동 방법 등을 소개했다. 그의 비대한 몸은 음식에 집착하는 비만인의 캐릭터로 확실한 개그 소재가 되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다이어트를 감행했다고 한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 그가 섭취한 고열량 음식은 일반인에게 다섯 끼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 감량 전 그가 즐겨먹는 음식과 그의 다이어트식을 친절한 화면 분할로 비추자, 그 차이가 더욱 확연해 보였다. 한쪽에는 방울토마토, 삶은 계란, 닭 가슴살 등 다이어터에게 일반적인 메뉴들. 다른 한쪽에는 일반적으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자장면, 감자탕, 떡볶이, 삼겹살에 오늘의 야식 메뉴인 치킨, 치킨, 치킨.
패널과 방청객은 카메라가 두 식단을 교차하며 보여주자 탄성을 질렀고 화면 밖의 방청객인 음악감독과 나는 반대로 입을 꽉 다물고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같은 메뉴인데, 전 채널에서 그렇게 맛있게 보이던 음식이 빛을 잃고 영혼 없는 모형 음식처럼 보였다. 우리가 정녕 저 플라스틱 덩어리를 주문한 건가?
마치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하나의 대상을 전혀 다른 존재처럼 담아내는 최신 사양 모니터에 의문이 생겼다. 만약 모니터의 잘못이 아니라면 카메라의 문제거나, 조명의 색감과 조도 조절이 문제였거나, 더 직접적으로는 부적절한 디스플레이, 플레이팅 때문일 수도 있다. 음악감독은 식욕을 떨어뜨리는 BGM(배경음악)으로 우리의 무의식이 조종당한 것뿐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했지만, 그 역시 갈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벽 2시의 치킨은 옳은 선택이었는가?
앱을 통한 휴대전화 결제는 주문 취소가 되지 않았다. 된다고 해도 꽤 복잡하고 오류도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치킨을 수령해야 하지만 콜라만이라도 먹지 말아야겠다 결심했다. 음악감독은 치킨을 받고 나서 안 먹으면 되지 않느냐며 제법 호기롭게 제안했다. 선뜻 동의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 배달원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음악감독이 냉큼 받아온 치킨박스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인 냄새가 났다. 우리는 확인해보고 싶었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었는가? 혹은 어떤 마음이 진짜인가? 어린 시절 마시멜로 테스트를 받았다면 절대 통과하지 못했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콜라로 건배하면서 TV 프로그램들의 이율배반적 태도에 다시는 희생당하지 말자고 결의했다.
간밤의 활발한 위 운동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생각해본다. 그 수많은 '먹방'이 꼭 밤에도 방송되어야 하는 것일까. 폐암 경고 사진이 붙은 담배나 지나친 음주에 대한 경고 문구가 실린 술처럼 치킨, 햄버거, 피자, 라면 등 야식으로 먹으면 위장 장애를 일으키는 음식에도 경고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다음 날 아침의 통증을 떠올리며 '주문'을 클릭하기 전에 세 번 정도는 더 고민하지 않았을까. 음악감독이라면 '결과 동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나는 웬일인지 우리의 선택이 꼭 우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항변하고 싶어진다. 자신과의 지독한 싸움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개그맨에게 박수를 보내면서도 말이다.
그나저나 그는 앞으로 어떤 개그를 펼쳐낼까. 전례를 보여준 개그우먼들보다는 오래 버텼으면 좋겠다.
첫댓글 한 때 밤 10시 전후엔 라면광고
(더구나 멋있는 젊은스타, 후후 불어먹는 그 장면에 유혹당하지않을 재간이 없었던 저도 심적으로 포함)
하지말아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더군요.
치맥...자정이어도 거부할 수 없는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