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중파 3사의 영화계 진출이 활발하다. 부분적인 투자에서 벗어나 콘텐츠 제공, 나아가 직접 제작에 까지 나서고 있다. 과연 왜 지금 방송사들은 영화를 탐하고 있는 걸까.
지난 6월 초 여의도 KBS 본관 로비에선 수상한 풍경이 연출됐다. 지난해 이미 종영을 한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설날이나 추석특집용도 아니면서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현장이 재현된 건 왜였을까? 시트콤의 연출가였던 김석윤 PD가 촬영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지만 가만히 보니 이건 시트콤 촬영이 아니었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그 시트콤이 똑같은 연출자의 손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석윤 PD는 이 현장에서 PD가 아닌 감독이었다. KBS가 자사 방송용 프로그램이 아닌 외부 영상물로는 처음으로 시설물 사용을 허락한 작품이 바로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다. KBS 시트콤을 소재로 싸이더스FNH와 청년필름에서 공동 제작하는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연출을 비롯한 방송 인력과 로케이션 장소, 시설물 이용 등에서 KBS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방송 3사 영화제작 현황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방송사가 제작을 지원하고 있는 대표적인 영화 중 하나다. 소재에서부터 연출인력, 그리고 시설까지 방송과 관련돼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만남일 뿐이다. 충무로와의 공동 제작을 넘어 방송사 단독 제작 작품이 곧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공중파 방송 3사 중 영화 부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곳은 MBC다. MBC는 자회사 MBC프로덕션에 영화기획부를 두고 1997년 자사 출신 PD 황인뢰 감독이 연출한 <꽃을 든 남자>를 제작하면서 방송사로선 처음으로 직접 영화제작에 나섰다. 2002년엔 임경수 감독의 <도둑맞곤 못살아>를 제작했고, 그 후로 지난해까진 주로 부분 투자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다시 제작에 뛰어 들어 올 상반기 싸이더스FNH와 공동 제작한 <달콤, 살벌한 연인>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성공을 거뒀다. 이에 MBC는 황석영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을 단독 제작해 9월 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역시 싸이더스FNH와 공동으로 제작한 <무도리>도 후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영화사가 아닌 방송사의 한 개 부서에서 무려 1년에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영화제작사의 1년 평균 제작편수를 상회하는 것이다.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디 아더스> <생활의 발견> <주먹이 운다> 등의 영화에 부분 투자만 해온 MBC프로덕션이 그 방향을 제작 쪽으로 선회한 셈이다. MBC는 현재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과 2001년부터 KBS미디어를 통해 <봄날은 간다> <챔피언> <올드보이> <어린 신부> <주홍글씨> 등 20여 편의 영화에 투자를 해온 KBS는 올해부터 자사 콘텐츠를 이용한 영화기획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올드미스 다이어리> 외에도 드라마 <겨울연가>와 <가을동화>가 컬처캡미디어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다. 예능 프로그램도 예외가 아니다. 스탠딩 개그쇼 <개그콘서트>를 소재로 한 <개그콘서트 대작전>이 휴먼픽처스와 컬처캡미디어 공동제작으로 진행 중이며, 엔터테인먼트인과는 <전국노래자랑>을 소재로 영화를 기획중이다. 이밖에 <말아톤>과 <맨발의 기봉이>의 소재를 제공했던 <인간극장> 중 <두 여자>와 <우리는 연인>도 컬처캡미디어와 함께 영화로 기획되고 있다. 또, 단막극인 <드라마 시티>에서 방영됐던 에피소드 중 SBS는 MBC와 KBS에 비해 영화 부문에 비교적 늦게 뛰어들었다. 지난해 CJ엔터테인먼트와 공동으로 진행한 HD 프로젝트 <어느 날 갑자기>를 제작한 후 지난해 말 조직을 정비했다. 이전까지 SBS프로덕션과 SBSi로 이원화돼 있던 영화사업 부문을 SBSi 내 영화사업팀으로 통합해 자사 콘텐츠를 비롯한 판권개발과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아직 직접적인 영화제작을 하고 있진 않지만, 최근 KM컬처의 지분 40%를 인수해 자회사 형태로 간접적인 영화제작을 하고 있다. 현재 촬영 중인 <미녀는 괴로워>에는 SBS사옥과 등촌동 공개홀 등의 시설을 지원하기도 했다.
경제, 기술 논리
방송사들이 영화제작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뛰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현실적인 이유를 따져본다면, 무엇보다 영화판권 구매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현재 방송사들은 주말 영화 방영 프로그램이나 공휴일 혹은 명절 때 특집 편성식으로 영화를 내보낸다. 중요한 건 이때 방영되는 영화들이 방송사의 시청률이나 광고 수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KBS미디어 김형진 PD는 “주말에 영화가 상영되는 시간대의 광고는 여전히 특A급 시간대다. 특집 영화의 경우도 대부분의 영화는 광고 면에서 특A로 취급된다. 게다가 영화는 방영시간이 길어 1,2부로 나누어 광고를 붙일 수도 있기 때문에 영화 프로그램의 시청률이나 광고 수입은 드라마 시청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선 보다 좋은 영화의 판권을 먼저 사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2000년대 이후 공동 투자, 혹은 부분 투자 형식으로 방송사가 투자하는 영화들이 늘어난 것도 영화가 극장 상영된 후 판권에 대한 우선권을 갖기 위한 사전투자적인 면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에 투자에서 직접 제작 쪽으로 방송사들이 눈을 돌리는 것은, 여러 방송사가 한 영화에 투자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투자만으로는 안정적인 판권을 획득하기 힘든 경우가 많 아졌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김형진 PD는 “투자를 했을 경우 갖는 우선권이란, 똑같은 가격을 제시했을 경우 투자사에 판권을 준다는 정도뿐이다. 요즘처럼 영화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많아진 시점에서 보다 좋은 영화 콘텐츠를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제작이 필요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SBSi 영화사업팀 김창현 팀장 역시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화에 보다 깊숙이 발을 담가야 양질의 콘텐츠를 조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최근 영화에 HD기술이 도입됐다는 점이 결합된다. 이제 막 영화에 도입되기 시작한 HD 카메라는 방송가에선 이미 수년 전부터 사용됐던 기술이다. 요즘엔 대부분의 드라마가 HD 카메라로 제작될 정도로 방송에선 익숙해진 기술 중 하나다. 영화사 입장에선 이 같은 방송의 기술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SBS와 CJ엔터테인먼트가 함께 제작한 <어느 날 갑자기>가 대표적인 예다. 이 프로젝트는 HD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CJ엔터테인먼트가 SBS 측에 먼저 의뢰해 진행됐다. 방송사로서는 콘텐츠의 안정적인 확보를, 영화사로서는 방송사의 앞선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윈-윈 전략이 되는 셈이다. KBS와 <인간극장> 등에서 콘텐츠 제휴를 하고 있는 컬처캡미디어 최광호 이사는 “방송사와 공동 제작을 할 경우, 영화사 입장에서는 방송사의 HD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면”이라고 말한다.
대안으로서의 영화
좀 더 멀리 내다보면 방송사의 영화제작은 다매체 시대의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공중파 방송에 집중됐던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의 눈이 케이블 TV, 나아가 DMB와 인터넷으로까지 넓어지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기득권을 갖고 있던 공중파 방송사로선 보다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확보하는 것만이 후발 주자들과의 차별성을 유지하는 길이 된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제작은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방송사 입지를 굳혀주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MBC 프로덕션 영화기획부 김정호 부장은 “방송사를 산업적인 면에서 채널 사업자로 규정하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다. 창조력을 가지고 콘텐츠를 생산하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에 따라 수익을 얻는 집단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강하다"고 말한다. 덧붙여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이 외주 프로덕션에서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요즘,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영화제작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즉,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외주 제작 프로그램들의 틈바구니에서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방송사의 위치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영화라는 것이다. 그는 “방송사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영화제작 등을 통해 생산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보다 양질의 콘텐츠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넘쳐나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그동안 공들여놓은 콘텐츠를 활용한다는 측면에서도 방송사의 영화제작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현재 방송사에서 기획 중인 대부분의 영화들은 자사 인기 프로그램들을 활용하는 것들이 많다. 자사 프로그램의 원소스 멀티유즈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소재에 보다 친근하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방송사들의 이 같은 전략에 가속도를 붙여준 것이 바로 영화와 방송의 기술적 접근이다. TV 수상기의 대형화는 TV 프로그램에 영화적 효과들을 사용하게 했다. 스토리 위주에서 벗어나 TV 화면에도 영상의 미학이 적 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홈시어터, DMB 등 1인 미디어의 등장은 영화를 안방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영화는 극장에 걸린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TV 수상기나 홈시어터, 심지어 DMB폰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영화와 TV 두 매체 간의 기술적, 형식적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매체끼리의 넘나듦에 대해 김형진 PD는 “영화와 방송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엔 영화감독과 TV 연출의 경계가 명확했지만, HD 영화 제작이 많아지는 요즘엔 텔레비전 연출자들도 영화 연출을 보다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방송과 영화제작 인력 간 교류를 설명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방송사의 영화제작은 미디어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지금,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영화사가 드라마 제작에 나서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방송과 영화의 조우, 과연 멀지 않은 미래에 지금 이들의 첫 만남은 어떤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인가.도 유성시네마와, <귀휴>는 태원엔터테인먼트와 각 각 영화화를 전제로 판권계약을 체결했다. KBS의 이 같은 자사 콘텐츠 활용은 <말아톤>과 <맨발의 기봉이>의 흥행에 자극받아 저작권의 중요성을 인지했기 때문.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화제작 노하우를 쌓는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KBS는 내년 봄 크랭크인을 목표로 알토미디어와 함께 첫 공동 제작 영화 <복씨네 복터졌네>도 준비 중이다. <인간극장>에서 방영됐던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영화로, KBS미디어 김형진 PD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다.
송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