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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자루 짚고 남행 길 오르니
외로운 신하 한 번 죽음이 가볍구나
남산과 한강수를
뒤돌아 보니 유정하구나
- 학봉 선생의 한강유별(漢江留別)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혼란이 심했던 16세기를 살았다. 의성 김씨 청계공 김진(金璡, 1500~1580)과 여흥 민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영특해 6세에는 효경을 배웠고, 21세가 되던 해부터는 퇴계 선생의 제자로 들어가 스승의 학풍을 이어 나갔다. 학봉 선생은 1568년(선조 1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라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역임하였고, 39세가 되던 1577년에는 사은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선생은 강직한 성품과 행동으로 조정과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일도 서슴지 않아 ‘조정의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1590년(선조23년) 선생이 53세가 되던 해 상사 황윤길(黃允吉), 서장관 허성(許筬)과 함께 통신부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황윤길과 선생의 귀국보고서는 우리에게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황윤길은 “왜가 쳐들어 올 것 같은 조짐이 있으며, 풍신수길의 인물됨이 담략이 크고 눈은 빛이 났다”고 한 반면에 선생은 “황상사가 아뢰는 것 같은 정황은 보지 못했으며, 풍신수길의 눈은 쥐 눈 같아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1년 뒤에 임진왜란은 일어나고 선생은 체포를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곧 선조는 동서분당이 더 심해지고 학풍이 문란해지는 것을 보고 명망 있는 학자를 내세워 국학을 권장하고자 선생을 복명해 홍문관부제학으로 제수했다. 1592년 선생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후에 경상우도 초유사에 제수되어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여 큰 공을 세우고, 이듬해 4월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이한 선비였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로 나와 안동방향으로 5분 남짓 달리다보면 봉정사 이정표가 나온다. 검재, 금계의 순 우리말인 검재마을은 학가산, 천등산의 산줄기를 따라 내려온 야트막한 동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완만하게 흐르는 물길이 있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16세기 향토지인 '영가지(永嘉誌)'에도 검재는 천 년 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명당이다. 바로 이곳에 학봉종택이 있다. 안동 의성김씨 학봉 종택(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은 조선 중기 문신 학봉 선생의 종가로 1995년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학봉 선생이 살았던 이 집은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어 학봉의 8대손인 광찬이 지금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종택을 건립했다. 그 후 1964년 종택을 현 위치로 다시 이건할 당시에는 안채만 옮겨오고 사랑채는 소계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했다. 솟을대문이 있는 5칸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잘 가꿔진 정원을 마주하고 익랑채, 사랑채, 운장각, 풍뢰헌이 단아하게 서 있다. 원래 ‘ㅁ’자형 배치를 가진 종택은 근래에 들어와서 왼쪽으로 아래채를 달아내어 ‘日’형이라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왼쪽 2칸은 사랑방, 오른쪽 2칸은 사랑 마루방이 있으며, 정면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두었다. 뒤편으로 사랑방 왼쪽은 작은 사랑방과 1칸의 책방이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안채의 우익사와 연결되어 안채와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랑채 뒤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안채는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은 대청, 왼쪽으로는 2칸 규모의 안방과 부엌이 있고, 그 앞으로 좌익사가 연결되어 있다. 대청 오른쪽으로 우익사를 두었고, 쪽마루를 통해 사랑채로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했다.
풍뢰헌(風雷軒)은 학봉 선생의 장손인 단곡 김시추(金是樞, 1580~1640)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을 하기 위해 세운 강학지소(講學支所)이다. 1990년 후손들에 의해 중건된 이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1칸씩 각각 두고 있다. 사랑채 오른쪽에 위치한 구(舊) 운장각(雲章閣)이 있고, 지난 2011년 새로 개관한 운장각은 종택 바로 옆에 개관을 했다. 학봉 선생의 유품과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과 문서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기위해 세운 건물인 운장각에는 보물 제905, 906호로 지정된 경연일기(經筵日記)와 해사록(海?錄)을 비롯해 선생의 친필 원고와 사기(史記) 등 운장각 소장 전적과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고, 그밖에도 선생의 안경, 벼루 등 유품과 후손들의 서적, 고문서가 수장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 뒤로 3칸 규모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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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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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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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고향집으로 내려오신 의성 김씨 15대 종손 김종길(1941년생) 선생과 마주하고 앉았다. 선생은 서울에서 삼보컴퓨터를 비롯해 나래이동통신, 두루넷 등 최첨단 산업의 CEO를 역임하셨던 분이다. 그래서일까. 모시 한복을 입고 인자한 모습으로 웃고 계신 모습 뒤엔 어딘지 모를 위엄이 느껴진다. 지난 2008년 작고한 부친 김시인은 29세, 이미 결혼해 아들 둘을 둔 상황에서 학봉종가로 ‘둥지리’ 양자를 들어왔다. 보통 양자는 10세 전후에 오는 것이 상례이지만 부인과 자식까지 데리고 오는 둥지리(안동지역에서 일컫는 말) 양자를 하였다.
김종길 선생은 김시인의 장남으로 안동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문중의 도움으로 대학을 마칠 수 있던 선생의 머릿속에는 항상 문중 종손이라는 중책감이 가득했고, 방학이면 고향으로 내려와 맡은 바 소임을 다해 노력했다고 하신다. 집안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학봉종가의 종손으로서, 회사에선 첨단산업을 이끌어야하는 사업가로서 서로 상반되는 삶을 살아야했던 선생은 속내를 다 털어놓진 않았지만 아마 수많은 갈등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서울에서 바쁘게 생활하시면서도 늘 종손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1년에 절반이상은 고향으로 내려와 종가의 대소사를 치러냈다고 하신다. 고향으로 내려오신 선생은 안동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을 비롯해 인성교육사업을 펼치는 박약회, 영남종손회 등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앞으로도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먼저 문중의 종손으로서 봉제사와 접빈객 봉사에 한 치의 소홀함 없이 그 역할을 다할 것이며, 종가를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해 종택체험을 통해 점점 혼탁해져가는 우리 사회에 앞장서서 도덕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선비정신을 가르쳐주고 싶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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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정성스레 차려진 다과상이 들어오자 김종길 선생은 종부 이점숙(1940년생) 여사의 솜씨라며 은근히 자랑을 하신다. “뭘 그런 것 가지고”라며 눈 흘기는 모습이 아직도 새색시 같다. 초례상에서 처음 얼굴을 보고 지금까지 45년을 함께 한 부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렇게 수 백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는 우리 옛집에는 오늘도 종가의 전통을 이어가는 종손과 종부가 있다. 그리고 우린 그곳에서 위안을 받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