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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성지순례 5일차
(2023.3.20)
33. 양주순교성지
양주 순교성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이 순교한 치명지를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 뒤에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를 진행하고 있는 성지입니다.
이 땅에서 순교하신 다섯 분에 대한 “치명일기”의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용인에서 살다가 양주관아로 잡혀온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 성 김대건 신부님께서 부제로 조선에 왔다가 중국으로 갈 때 함께 간 사람으로 추정되는
최 프란치스코의 아내인 “김 마리아”
* 홍주에서 순교한 박사행 부부의 아버지인 “박 서방”
* 양주 일담리 출신이면서 아버지(홍몽노 베드로)와 삼형제가 함께 순교한 가족의
둘째 아들인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또한 양주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며 이룬 교우촌들이 있습니다.
우고리, 신암리, 갈곡리(파주)로 이어지는 외딴 곳에 형성된 교우촌의 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한 것과 같은 또 다른 모습의 순교자들입니다.
34. 의정부주교좌성당
의정부 성당은 의정부교구 주교좌 본당으로 1945년 12월 덕정리 본당을 이전하며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설립되었고,
1980년 의정부 4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의정부 2동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주교좌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하였다.
주보는 하자 없으신 성모 성심이다.
2002년 1월 22일 성당 건물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이 사적지 성당 건물은 의정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을 전후한 시기의 성당 건축은
열주가 사라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의정부 성당도 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수직 종탑과 정면 양식 그리고 앱스(성전 뒷부분) 등 세부 모양은
고전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성당이 당시 성당 건축과 다른 점은 단단한 석재를 사용하고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폭격 등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단단한 석재를 재료로 삼았고
높이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성당 건물 자체가 한국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의정부 본당 50년사”에 의하면 “성전을 지을 당시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로
모든 신자들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젊은 신자들을 중심으로 공사 현장에서
미군들과 함께 땀을 흘려 일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35. 성남종삼요한과가족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鐘三)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南尙敎), 전주로 유배되어 순교한
장자 남규희(南揆熙) 등 삼대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서울대교구 길음동 성당 울대리 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표지석을 따라
10여 분 걸어 올라가면 ‘성 남종삼(요한) 묘역’에 이르게 된다.
나의 신앙의 멘토인 조 도미니코 형제님의 묘소가 울대리 공원묘원에 있다는 것을
오늘 저녁 길음동교우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찾아가 참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아쉽다.
묘소에 와서 혹시 여기에 계시면 하고 생각은 했지만
그분의 고향에 묻혔으리라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그분 고향 공소출신 사제 수녀도 많고, 친척중에도 많기에
매년 고향의 모임에 가시곤 했기 때문이다.
도밍고 형제님은 항상 '나는 가방 끈이 짧다' 며 겸손한 태도로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주고 솔선수범을 보였다.
같은 레지오팀에서 봉사하면서 1년에 1명 입교시키기도 힘든데
그분은 매년 5명 이상을 입교시켰다.
쌀가게를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늘 신앙이야기를 하고
퇴근해서는 아파트 놀이터등을 돌며 입교를 권했다.
그리고 한 두번 거절당해도 승락할 때까지 몇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도 1년 이상 끈질기게 권유하는 바람에 레지오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
그분이 자전거로 쌀 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로 바꾸었는데
여주에 살 때는 야외행사로 우리집을 여러번 방문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한참 지난 다음에야 듣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신앙생활이 나태할 때면 도밍고 형제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36. 황사영묘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名門) 출신이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이를 계기로 결국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
1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자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몰락하고
그 여파로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 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에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치열한 당쟁이었음을 피력한 다음
세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어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시 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37. 삼성산성지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가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묏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 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동(현 서원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본당은 성지 녹화사업을 추진하고 매주일 성지에서
순례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38. 절두산순교성지(切頭山殉敎聖地)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 사적지.
절두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 세워졌으며, 순교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 서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39. 새남터순교성지
조선교회 첫 미사 봉헌한 주문모 신부 순교터
서소문이 ‘평신도의 성지’라면, 새남터는 ‘성직자의 성지’다.
조선의 공식 처형장이던 두 곳의 성격은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판이하다.
103위 성인 가운데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선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 41위와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3위 등 44위가 순교했는데
정하상(바오로, 1795∼1839) 등 모두가 평신도였다.
44위 중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9년 기묘박해 순교자 2위
(조숙ㆍ권천례 동정부부는 공식 순교지가 서울로 기록돼 있지만
서소문 순교자로 추정) 등 27위에 이른다.
반면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한 14위 가운데 11위가 앵베르(1797∼1839) 주교와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 등 성직자이고, 11위 중 성인이 8위나 된다.
새남터 대성전은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해인
198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87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성당의 전체적인 외형은 한복의 도련선을 본 따 치마를 겹쳐이은
겹치마를 두른 형태를 구현하였습니다.
새남터성지는 모래땅 위의 군사훈련장이자 사형집행장이었습니다.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고, 기쁘게 모래알로 승화하였던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자
이 자리에 모래터와 조형물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제단의 103위 성인벽화(방오석 말가리다 화백 작품)는
예수를 조선시대 임금의 모습으로 나타냈습니다.
감실은 사람의 심장 모형을 본떠 제작되었고,
대성당 내부 십자가의 길은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습니다.
대성전 안에는 새남터 성지에서 순교하신 9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대 왼쪽은 8위 성인의 유해가
오른쪽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40. 왜고개성지
서울 국군중앙성당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41. 당고개성지
당고개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9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며,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고 거룩한 순교 성지다.
이곳 순교자 10명 중에서 갓난아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던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한 9명이 모두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이로써 당고개는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 의미 깊은 순교 성지가 되었다.
42. 용산성심신학교
지금은 성심 여고 교정 안에 속하게 된 옛 용산 신학교 성당과
예수 성심 수녀회 관구 사무실로 쓰이고 있는 신학교 건물은
성소의 못자리였던 당시의 자취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02년에 축성된 건물이다.
여기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방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축성 당시부터 1958년까지 모셔져 있었고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소 브뤼기에르 주교와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유해가 거쳐 갔던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그 이전의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이미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서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폐교됐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고,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다.
용산 신학교 성당은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후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의 신학교가 생겨났고
서울, 대구, 광주, 부산, 수원, 대전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43. 용산성직자묘지
현재 용산 성당 내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는 주교 4위, 신부 64위,
신학생 2위, 치명자 1위 등 모두 71위가 안장되어 있다.
특히 초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끝내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1931년 10월10일 이곳으로 이장함으로써
성직자 묘지로서 의미가 더 깊어졌다.
44. 광희문성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중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은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방인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45. 가회동성당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가회동성당은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첫미사를 집전한 곳입니다.
한옥과 양옥이 어울어진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계동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으로, 천주교회 창설 초기,
조선 신자들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고,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주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1794년 12월 24일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1765∼1795)의 집에 머물렀는데
주 신부는 여기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46.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젊은이들 특유의 생기와 활기가 넘쳐흐르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뒤편, 야트막한 산등성이 위에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 신학도들의 못자리가 있다.
소란하고 화려한 카페와 레스토랑, 온갖 화려한 네온등을 뒤로하고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성소(聖召)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가톨릭대학교.
지금은 서초동의 성의 교정(의학대학),
그리고 부천의 성심 교정과 함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신학대학)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1887~1942)
경성천주공교신학교 (1945-1947)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예수성심 신학교가 폐교된뒤
1945년 광복이 되자 천주공교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개교한 신학교이다.
개칭과 동시에 대구 성유스띠노신 학교도 통합시켰고,
1947년 성신대학으로 다시 개칭함과 아울러
문고 제 31호에 의해 승격 설립되었다.(초대학장에 장금신부)
성신대학(1947~1959)
5일차 성지순례는 의정부교구에서 시작하여 숨가쁘게 달렸다.
내일 마지막날 점심약속도 있고 저녁 비행기를 타야하기에
한 곳이라도 더 순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의 광야생활을 거쳐 새롭게 갈릴래아로 들어선 장소인
길음동 성당 교우 몇 명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대자는 회사 출장관계로 참석치 못하고, 아내는 대녀와 따로 약속을 했다.
일찍 숙소에 도착하여 잠시 쉬다가 숙소 바로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
1차로 복집에서 복지리, 복껍질, 그리고 복껍질을 태워서 울궈낸
특이한 소주를 먹었다. 복냄새가 나고 부드러웠다.
일생에 처음 먹어본 술이다.
함께 했던 지난날 이야기와 헤어져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쉬움이 남아서 자리를 횟집으로 옮겨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맥주로 입가심을 하자고하여 생맥주로 마무리 지었다.
성신여대앞은 젊은이들로 북적여 젊음의 숨결을 느낌과 동시에
우리들이 함께 하기에는 방해가 될 듯하여 맥주집도 전전하다가
어렵게 선택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함께 해
더욱 알찬 순례여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