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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와이 이민과 한시대 가족
한시대(韓始大, 1889.9.18.∼1981.5.7.)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3년 부모를 따라 노동 이민자로 하와이로 건너 왔다. 부친은 한준상(韓俊相, 1859∼?)이고 모친은 문성선(文聖善, 1862.4.∼1950)이다. 부인은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에서 공부한 박영숙(朴瑛淑, 1892∼1965)이다. 하나 뿐인 동생 한영대(韓永大, 1896.3.10.∼1953.4.18.)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한시대는 1917년 9월 흥사단에 입단한 후 평생 충성스런 흥사단원으로 살았다.
한시대 가족은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아들·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독립운동 가족이다. 부친 한준상은 국민회 창립 직후인 1910년 2월 10일 김홍균(회장), 신달율(부회장) 등과 함께 새크라멘토지방회를 설립해 총무로 활동한 인물이고,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에 앞장서며 가족들 모두를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만들었다. 그는 1916년 10월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해 회장이 되어 동포 중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패려한 행동을 하는 자를 교정하는 등 정의감도 남달랐다. 1930년 7월 딜레노에 국어학교인 태극학교를 개설해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에 힘썼고, 「독립전쟁론」(『신한민보』 1920.9.9.), 「예비와 통일」(『신한민보』 1921.12.8.), 「정부를 불신함도 못할 일 민권도 무시함도 못할 일」(『신한민보』 1922.11.2.), 「우리 민족도 부활하려면 사람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신한민보』 1924.5.1.), 「각방 국어학교 교사에게 향하여」(『신한민보』 1924.7.10.) 등 많은 글을 써서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노력하였다.
모친 문성선은 자부인 박영숙(미국명: 한영숙)과 함께 1919년 3월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8월 북미지역 여성단체를 통합해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할 때 신한부인회를 대표해 합동 발기자로 참여하였고 창립 후 총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에 취임하여 자부인 박영숙(재무)과 함께 미주지역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부인 박영숙은 호놀룰루에서 한시대와 함께 한인기숙학교를 다닌 후배로 1913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다녔다. 미국 본토로 동반 유학할 때 하와이에서 이미 한시대와 약혼을 한 상태였고 1914년 9월 4일 결혼하였다. 1919년 3월 시모인 문성선과 함께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를 결성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동년 8월 북미지역 여성단체들을 통합해 결성한 대한여자애국단 창설 요원으로 초대 단장 김혜원과 함께 서기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3월 시모인 문성선이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에 취임할 때 재무가 되어 시모의 활동을 도왔다. 이후 대한여자애국단 딜레노지부에서 단장과 재무 등으로 활약하는 등 여성으로서 미주지역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시대의 자녀들은 할아버지 한준상이 딜레노에 설립한 태극학교에서 한글 교육을 받고 남다른 민족의식을 소유한 모범적인 자녀였다. 장남 한유선은 1934년 딜레노에서 한인 2세 청년들과 함께 조직한 태극클럽(태극회)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2세 한인들의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둘째 아들 한유범은 대한민국임시정부후원금, 3·1성금, 한국광복군후원금, 독립금 등 각종 명목의 의연금을 납부하며 한국독립운동을 도왔고 1945년 12월에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인국민회 딜레노지방회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셋째 아들 한유반은 1942년 2월 미국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술을 배웠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이 참전할 때 자원입대하여 탱크부대에서 활동하다 부상으로 귀환하였다. 딸 한유희는 딜레노지역 중학교 연합웅변대회에서 우등으로 입선할 정도로 활달하였고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고 대한인국민회의 주요 기념 및 축하 행사 때 부모와 함께 참석해 전공한 피아노 연주를 통해 행사를 빛낸 인물이었다.
동생 한영대는 각종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후원하는데 앞장섰다. 이처럼 한시대와 그 가족은 부모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물려받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모범적인 가족이었다. 때문에 한시대의 부친 한준상을 두고 미주한인들은 미주한인사회에 제일 복이 많으신 어른으로 추앙할 정도였고 모친 문성선의 생신 때는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해 북미한인사회가 주목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한시대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06년 9월 한인기숙학교가 개교할 때 입학한 후 1909년 9월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밀스(Mills)학교로 옮겼다. 그의 한인기숙학교 성적은 매우 우수해 2학년 졸업 시험 때 김수권과 함께 우등생으로 뽑힐 정도였다.1) 뛰어난 학교 성적 때문에 국민회의 도움을 받아 중학 과정인 밀스학교로 옮긴 것 같다.2) 한인기숙학교는 송헌주·박윤섭 등 하와이 한인들의 노력과 하와이 감리사 와드맨의 지원 등으로 1906년 9월 개교해 학교 이름을 한인기숙학교라 하였다. 6년 과정의 초등 교육을 실시하였고, 초대 교장 와드맨 부인(Mame H. Wadman), 3명의 미국인 교사와 2명의 한국인 교사, 그리고 사감으로 구성되었고 1913년 9월 이승만이 교장에 부임하면서 학교명이 한인중앙학원으로 바뀌었다. 한인기숙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로 진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한시대가 다닌 밀스학교는 1892년 중국 남학생들을 위해 호놀룰루 시내에 설립된 학교이다. 당시 밀스학교는 한인기숙학교에 기숙하며 다닐 만큼 한인 학생들이 많았다. 『신한민보』의 기사(1913.7.25.)에 따르면 한시대가 하와이 태평양학원에서 수학했다고 했는데 아마 밀스학교를 말하는 것 같다. 한시대는 약혼한 박영숙과 함께 1913년 7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생 한영대가 다닌 공립학교 로웰고등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가 그 해 12월 동생과 함께 졸업하였다.3)
한시대가 샌프란시스코로 이거한 데는 부친 한준상 때문으로 보인다. 한준상은 1909년경 하와이에서 북미로 건너가 새크라멘토의 농장과 캘리포니아주의 수은광산 등지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 후 남은 가족들을 북미로 불러들일 때 한시대도 샌프란시스코로 오게 한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14년 9월 4일 박영숙과 결혼하고 멘티카에서 사탕무 농장을 경영하였다. 농장 규모가 150에이커로 1916년 당시 멘티카에서 농사짓던 한인들 가운데 두 번째로 넓은 땅이었다.4)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농사일에 뛰어들어 시작한지 2년도 못되어 대농장을 경영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농사일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한시대는 처음 멘티카에서 사탕무 농장을 시작으로 다뉴바와 딜레노에서 포도농사와 채소 농장을 경영하여 마침내 한가(韓家)회사를 일군 성공한 농업인이 되었다.
(3) 대한인국민회 초기 활동한시대는 멘티카에서 사탕무 농장을 경영하면서 부친 한준상을 도와 1916년 4월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민족독립을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멘티카지방회는 부친 한준상이 초대 회장에, 한시대는 법무원에 선임되어 부자(父子)가 동시에 지방회에 참여하였다. 이런 부자의 활동 모습은 이후 한시대의 가족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가족 전체가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 해 6월경 다뉴바로 옮김으로써 멘티카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뉴바에서 그는 농장 경영과 함께 노동주선인으로 생활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는 1916년 10월 7일 통상회를 개최하고 다뉴바로 온 한시대를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1917년도에는 다뉴바지방회 회장 이순기와 함께 다뉴바의 대의원으로 선발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1918.1.2.∼5.)에 참석하였다. 홍언과 함께 의안존발위원으로 활동하며 처음으로 북미지방총회의 일에 관여해 1918년도 새해 사업 10개조를 입안하였다. 이 때 결의한 주요 사안은 『신한민보』의 식자 기계를 신식 인터타입으로 바꾸고, 재미한인의 유학을 장려하되 버클리에 새로 한인학생양성소를 설치하고, 북미총회 산하 각 지방에 국어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강화하며, 총회와 지방회 간의 모든 공문을 순 한글로 사용하는 것 등을 결의하였다. 대체로 민족교육을 강화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1) 독립의연금 후원활동국내 3·1운동의 발발은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때는 현순의 전보가 1919년 3월 9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전달되면서부터다. 안창호는 3월 13일 향후 독립운동으로 선전외교활동과 재정모금활동에 주력할 것임을 천명하고 미주한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부터 재정모금활동을 전개하였는데 3·1운동이 발발하면서부터 이를 더욱 본격화하였다. 모금활동의 성과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독립운동 의연록」(이하 ‘「의연록」’)에 잘 정리되었다. 「의연록」은 1918년 11월 24일부터 1919년 12월 15일까지의 1차 의연자와 1920년 6월말까지 2차 의연자로 이루어져 있다. 의연금의 종류는 대표의연, 독립의연, 21례, 애국금, 공채금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의연록」에 나타난 수입금 중 제1차 의연금은 87,355달러 84센트이고 제2차 의연금은 20,436달러 77센트로, 총액 107,792달러 61센트였다. 이러한 수입은 1918년 당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1년 예산 1만 달러와 비교할 때 실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의연록」에 기록된 의연자의 수는 1,652명인데, 이는 당시 미주한인 전체 인구 중 노동 가능한 인구의 절반가량이 참여한 숫자였다. 북미 한인의 경우 농장 노동이나 철도 노동을 비롯한 임금 수준이 월 30∼60달러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1인당 65달러 이상의 의연금을 낸 셈 이었다. 즉 자신이 받는 한 달치 또는 약 두 달치 이상의 월급을 통째로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으로 헌금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독립의연금을 모금할 때 한시대는 자신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참여하였다. 의연금 납부 상황을 보면 부친 한준상 20달러, 모친 문성선 20달러, 한시대 550.85달러, 부인 박영숙 20달러, 큰아들 한유선 15달러, 둘째 아들 한유범 15달러, 동생 한영대 25달러 등 총 665.85달러였다. 이는 천 달러 이상을 납부한 사람이 4명(김종림, 임준기, 신광희, 김승길)이고 500달러 이상 납부한 사람이 6명(한시대, 한성준, 최성곤, 윤징오, 임성택, 김홍균)임을 비교할 때 최상위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많은 금액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1914년 농장 일을 착수한 뒤 5년 만에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음을 나타내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전 가족이 한 마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시대의 독립의연금 지원활동은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위해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을 돕기 위해 1921년 2월 27일 김정진(이후 ‘김호’로 개명), 사병순과 함께 구미위원부 다뉴바지방위원으로 선임되어 1,750달러를 모금해 구미위원부에 전달하였다.5) 1921년 5월 현순의 후임으로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에 선임된 서재필의 제안으로 동년 11월에 있을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외교활동비를 모금할 때도 자녀를 제외한 한시대 부부와 부모 형제 모두 특별외교비를 지원하였다.6)
(2) 국민대표회 지지활동과 민족교육한시대는 구미위원부를 위해 독립공채 구입과 외교비 지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21년 11월 25일 다뉴바 한인들이 국민대표회기성회를 결성할 때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각계 독립운동 단체 대표 125여 명이 모여 각계의 세력을 결집해 강력한 독립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개최된 대회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1921년 5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어서 동년 8월 상해, 북경, 천진에서 국민대표회주비회로 확대되었다. 미주한인사회에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일어날 때 다뉴바 한인들은 국민대표회 개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결성하였다.
다뉴바에 국민대표회기성회를 결성하기 위해 32명이 참가할 때 한시대뿐만 아니라 부모(한준상, 문성선)와 부인(박영숙)도 참가하였다. 한시대는 다뉴바에 국민대표회기성회가 조직될 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7) 1922년 7월 31일 다뉴바의 국민대표회기성회는 자체의 이름을 북미국민대표회기성회라 정하고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장을 역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건너간 천세헌을 동년 8월 1일자로 전권대표원으로 위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북미국민대표회기성회의 이름으로 18개항의 「제의안」을 작성해 전권대표원 천세헌에게 보냈다. 18개항의 「제의안」은 장차 국민대표회에서 논의할 안건을 정리한 것으로 임정과 임시의정원의 기능과 역할을 개혁하고 정비해 임정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실효성 있게 만들기 위한 북미 한인들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북미국민대표회기성회의 전권대표원으로 선정된 천세헌이 돌연 미국으로 돌아와 사면을 청원하면서 동년 10월 8일 안창호를 전권대표로 위임하였다.
한시대는 다뉴바에서 포도농장을 경영하며 1922년 11월 북미실업회사의 감찰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경에는 다뉴바 한인국어학교의 교장이 되어 한인 2세의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민족교육을 위한 그의 노력은 1925~26년경 다뉴바에서 딜레노로 옮긴 후 1930년 7월 14일 부친 한준상이 국어학교인 태극학교를 설립할 때 재정 지원과 함께 자신의 집을 교사(校舍)로 사용하도록 내 주었다.8) 그리고 부친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교장직을 사임하자 1931년 6월 13일 새로 교장이 된 조울림과 함께 교감이 되어9) 많은 의연금으로 지원하는 등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 대한인국민회 중심의 합동운동딜레노에 정착하여 부친 한준상의 국어학교 설립과 운영을 돕고 있던 중 1930년 9월 21일 다뉴바를 방문한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백일규 환영회 때 한시대는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10) 회장직은 1932년까지 수행하였는데 매년 3·1절과 국치기념일을 거행하며 3·1기념금과 국치기념금을 모금하였고, 만주사변 발발 직후에는 재만동포동정금과 중국군인위로금을 모금해 만주의 한인과 중국의 항일전쟁을 적극 후원하였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딜레노 대의원 자격으로 대한인국민회 대의원회에 참가하며 대한인국민회 총회 본부와 적극 교류하고 한인사회의 현안 과제 해결에 동참하였다. 당시 재미한인사회는 내부 분열로 구심점을 잃고 있었는데 1935년 3월 최진하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취임한 이후 2세 한인 청년 문제와 한인사회의 통일 및 발전책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 1936년 5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각 단체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간담회를 개최하고 노인구제, 2세 청년교양, 임시정부 후원을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재미한인사회 발전책실행위원 15명을 선정하였다. 한시대는 김정진, 송태은과 함께 중가주를 대표해 발전책실행위원에 선임되어,11) 딜레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인사회의 통일과 국민회 중심의 합동운동을 역설하여 만장일치의 찬동을 받아냈다.12)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국민회 중심의 합동운동이 전개되자 각 지역 한인들은 이에 호응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재건하거나 신설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대한인국민회는 1937년 7월 4일과 5일 특별대의회를 개최해 자체 역량을 강화하고 유능한 인재들이 모일 수 있도록 회장제에서 위원장제로 헌장을 개정하고 2세 청년을 위한 국어학교를 설립하며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새로 개정된 헌장에 따라 1937년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호가 선임되었고 한시대는 송종익, 송헌주, 최진하, 신두식, 김형순, 정몽룡, 임정구, 황사선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 1월 1일과 2일 대한인국민회는 LA에서 제2차 대표대회를 개최할 때 한시대는 대회 의장이 되어 9개조의 입안을 의결하고 합동운동을 전개한 지난 1년을 결산하였다. 지난 1년 동안 대한인국민회는 회원과 인구세를 3배로 증가시켰고 각지의 지방회를 16곳으로 확장시켰다.13)
한시대는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 신축을 준비할 때 건축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새로 결성한 건축준비위원회는 위원장 송헌주, 서기 김창만, 김병연, 재무 송종익, 김정진이었고 한시대는 황사용과 함께 검사원에 선임되어 총회관 신축을 위해 큰 역할을 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의연록을 보면 한시대는 송헌주와 함께 200달러를 의연하였다.14) 이것은 당시 의연자 중 최고 금액으로 1938년 4월 17일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낙성식 때 그의 남다른 감회와 포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즉,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하자는 결의에 찬 포부를 밝혔다. 총회관 신축 낙성식 때 한시대의 부인 박영숙은 딜레노지방회를 대표해 참석하였다.
1939년 4월 6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상무위원회는 한인 청년 교양을 위한 방안으로 국어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시대는 편찬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총무로는 김탁이 김호와 이살음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15) 편찬위원장으로서 그는 각 지역에 교과서 편찬을 위한 경비 모금을 전개하고 새 위원을 추가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후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찍이 부친 한준상을 도와 국어학교인 태극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볼 때 나름의 큰 결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시대는 1940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의 새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 외 서기 홍언, 중앙상무위원회 총무 김병연, 교육부장 송헌주 등이고 동생 한영대가 구제부장으로 선출되어 형제가 나란히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한시대는 『신한민보』의 식자 기계를 새로 구입해 신문 발간을 원활히 하였고,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며 적극 후원하였다. 예컨대 1940년 10월 26일 딜레노에서 가진 한국광복군 축하식 행사 때 그는 “해외에 있는 일반 애국 노동자는 우리 국민회를 통하여 우리 최고 기관 임시정부를 봉대하자. 최고 기관에서 조직한 독립 광복군의 후원자가 되자”는 취지로 연설하여 큰 감동을 주었고 당일 광복군 후원금으로 1,525달러라는 거금을 모았다.16)
(2) 한인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한시대가 집행위원장으로서 수행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를 결집해 1940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한 일이다. 해외한족대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로 미주 9개 단체 대표가 모인 대규모 한인 대회이다. 공식 회의는 4월 20일 개회를 선언한 날부터 4월 29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선포할 때까지 진행되었다. 1940년 3월 9일 대한인국민회는 임시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한시대, 김호, 송종익을 북미 국민회 대표로 선정해 하와이로 파송하였다. 한시대는 해외한족대회 의장 안원규와 함께 부의장에 선출되어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이끌어냈다.17)공포된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의 주요 내용은 독립 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군사운동, 외교운동을 위한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미국 국방공작의 원조, 독립금으로의 재정통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 일곱 가지이다. 이로써 미주한인사회는 하와이와 북미의 모든 한인 단체들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한시대는 중앙집행위원장의 이름으로 12월 11일 「특별 포고」를 발표하였다. 「특별 포고」에서 미일전쟁에서 미국은 반드시 일제을 이길 것이고 이렇게 되면 한국 광복의 기회가 도래할 것이므로 미국의 승전을 돕는데 미주한인들이 분투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18)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 직후 미일전쟁의 발발로 광복의 서광이 밝아오자 중앙집행위원장 한시대의 역할은 더욱 막중해졌다.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독립운동을 적극 돕는 한편 한인사회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1942년 1월 한시대는 미국방공작봉사원으로 임명된 한길수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해결하고 향후 외교활동의 방향을 수립하기 위해 송헌주와 함께 워싱턴DC로 건너갔다. 두 사람은 한길수의 과장된 행동을 조사하였고,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정부와 교섭하되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경유해 선전 및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을 당부하였다.19) 그리고 워싱턴DC 주재 중국대사 호적(胡適)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에 감사의 예를 표했다.
한시대는 1943년에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3년 연속 위원장직을 수행하였고 1944년부터 1945년까지는 김호의 후임으로 집행부위원장에 선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다. 요컨대 그는 한국 독립문제가 국제 열강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중경 임정을 중심으로 가장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인 1940년대 전반기 내내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장이 되어 재미한인사회를 주도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는 1943년 6월 신한민보사 사장에도 취임하여 언론 발전도 도모하였다.
(3)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시도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장 한시대는 이승만과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논쟁이 일자 중경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1944년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재미한인 전체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 목적은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해 향후 외교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고 참가 대표는 북미에서 4개, 하와이에서 8개 단체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한시대는 대회 주석으로서 전체대표대회를 주관하여 주미외교위원부를 위원장 김원용, 총서기 전경무 등 총 15명의 새 위원으로 재조직하였다. 한시대는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한시대는 대회 결과를 중경 임정에 통보하여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임정은 동지회 불참을 이유로 결과를 인정할 수 없음을 통보하고 대신 임정에서 직접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을 인선해 하달하였다. 임정의 인선은 기존 위원장인 이승만을 그대로 둔 채 국민회와 동지회, 기타 각계 단체에서 위원을 선발하였다. 전체대표대회를 주관한 한시대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한인 대표 70% 이상이 참여해 결정한 것을 임정이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임정의 조치에 반발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1943년부터 이승만의 입장만을 두둔해 온 임정에 비판적이었는데 전체대표대회의 결과마저 무시되자 마침내 임정과 결별하였다. 그리하여 한시대는 임정의 공식 외교기관인 주미외교위원부와 별도로 1944년 6월 개소한 워싱턴사무소를 외교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독자노선을 추진하였다.
(4) 해외한족대표단의 결성과 선전외교활동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의(일명 ‘상항회의’ 또는 ‘국제연합창설대회’ : 1945.4.25.∼6.26.)가 개최되자 집행부위원장 한시대는 국제회의를 대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동년 4월 1일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다. 해외한족대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14개 지역 대표 19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는데 대회 결과 해외한족대표단을 결성하였다. 한시대는 해외한족대표단의 단장이 되어 샌프란시스코회의를 향한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해외한족대표단은 1945년 3월 중경 임정의 훈령으로 조직된 임시정부대표단(단장 이승만)과 서로 대립하는 모양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미주한인사회는 두 대표단을 통합해 외교활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샌프란시스코회의가 개막되는 4월 25일부터 임정대표단 이승만과 해외한족대표단 한시대는 대외활동만이라도 통일해서 수행하자는 명분하에 상호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두 대표단은 새 대표단의 이름을 ‘한인대표단(Korean Delegation)’으로 정하고 공동실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마침내 5월 9일 공동실행위원회는 이승만과 한시대의 이름으로 식민지 민족의 자유와 국권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조직의 창설을 지지한다는 공동 「성명서」를 대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5월 10일 이승만이 공동실행위원장에서 사면하고 이후 얄타밀약설을 주장하며 단독행동에 나서자 두 대표단의 공동 활동은 무산되었다.
한시대는 미주 한인의 공식입장을 정리한 「비망록(Statement of Faith)」을 작성해 6월 2일자로 연합국 주요 외교대표들과 언론사에 발송하였다.20)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비망록」에는 카이로선언을 신뢰하며 대서양헌장의 원칙과 샌프란시스코회의의 목적을 지지한다고 하였고, 미, 영, 중, 소의 지도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국이 될 것임을 믿으며, 한국 국민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최후 승리를 촉진시키는데 앞장설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것을 통해 한국의 독립과 자유는 어떤 선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의지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며 일제을 패배시키는데 한인들이 최선을 다 할 것임을 밝혔다. 해외한족대표단의 활동에 대해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가한 중국, 프랑스, 영국, 소련, 캐나다의 대표단과 미국 국무부는 감사하다는 회신을 보내 주었다.21) 또 「비망록」을 발표한 그 날 한시대는 해외한족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언론기자들을 포함하여 각국의 주요 통신기자 20여 명을 초청해 만찬회를 개최하고 한국독립을 위한 동정과 지지를 구하였다.22)
(1) 광복 후 국내파견대표단의 결성과 입국일제의 패망으로 마침내 광복이 되자 한시대는 국내로 들어가 국가건설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국내 파견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24일 14명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대표단(이하 ‘국내파견대표단’ 또는 ‘연합회 대표단’)을 결성하였다. 대표단의 구성은 단장 한시대, 부단장 김원용, 서기 도진호· 김병연, 재무 송종익· 최두욱, 외교원 전경무· 조제언, 대언인 김호, 사교원 정두옥· 안창호· 김성락· 안정송· 박금우로 편성되었다.23)
연합회 대표단은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누어 국내로 들어갔다. 단장 한시대는 김호· 전경무· 송종익· 김병연· 김성락과 함께 미국 육군부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1945년 11월 4일 제1진으로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듬해인 2월 12일 8명의 제2진은 호놀룰루에서 미국 육군부에 제공한 군용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내 도착 후 대표단은 정치부· 경제부· 문화부로 나누었는데 한시대는 김원용· 전경무· 정두옥· 김병연· 안정송과 함께 정치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연합회 대표단은 도착 직후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국내 제 상황을 조사하고 1945년 12월 21일 정치· 경제· 사회· 군정 등 4개 방면에 대한 「조선의 자주독립 촉성」 건의안을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다.24)
(2) 중간세력의 결집과 통일정부 수립활동한시대를 중심으로 한 연합회 대표단은 중립적 입장에서 중간세력들과의 통합운동을 전개해 1946년 9월 15일 천도교 청우당에서 8개 정당 및 단체를 통합한 신진당을 결성하였다. 한시대는 김호·유동열 등 105명의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신진당의 강령은 자주독립국가의 완성과 민주주의 정치 실현을 기하고 평등생활을 기반으로 한 경제제도를 확립하며 민족문화를 발양시켜 인류 문화에 공헌하는데 두었다.25) 연합회 대표단은 중간 정당 통합운동의 산물인 신진당을 중심으로 좌우 정당 간의 지속적인 통합활동과 통일정부수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연합회 대표단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실인 임시정부를 조속히 수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좌우합작운동의 성공과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를 선결 과제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지원과 지지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는 인사들과 1946년 7월 12일 좌우합작촉성회(또는 ‘좌우합작촉성위원회’)를 결성하였다.26)
1946년 7월 15일자로 보낸 「재미동포에게 고합니다」라는 글에서 한시대는 국내정세의 급선무는 ‘민족 일치의 합작’이라고 역설하였다.27) 해방된 조국에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제1단계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하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전민족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가 중요하며, 특히 미군정도 후원하는 좌우합작운동은 민족적 단결을 위한 출발점이므로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연합회 대표단은 좌우합작을 성공시키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 단장 한시대는 7월 18일자와 8월 1일자 라디오방송을 통해, 좌우합작에 의한 단결만이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역설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파당적 논쟁을 버리고 운동의 통합과 정당과 민중 사이의 협동을 재촉하자고 주장하였다.28) 7월 23일에는 서울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최로 대중 강연회를 개최하였다.29) 약 1,000여 명이 참석한 강연회에서 한시대는 「합작 공작의 필요」를 연설하였고, 안정송은 「통일과 여성의 사명」, 김호는 「재미동포의 운동 개략」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발표자 모두가 좌우합작과 민족 통일을 호소하였다. 연합회 대표단은 “좌우합작”, “통일정부수립”, “민중생활의 안정”을 신국가 건설을 위한 3대 원칙으로 삼고 8·15 해방 1주년을 맞이하여 미 군용 비행기 6대를 이용해 전단지 50만 장을 공중 살포하였다.30) 이렇게 해서라도 연합회 대표단은 좌우합작으로 민족적 단결을 이루고 공전된 미소공위를 재개해 임시정부 수립과 민생생활의 안정을 도모해 통일된 독립국가를 앞당길 수 있다고 보았다.
한시대는 중간 정당 통합운동의 산물인 신진당을 결성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한 직후인 1946년 9월 초 전경무, 안정송와 함께 선편으로 서울을 떠나 9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관선의원으로 임명된 김호와 김원용을 제외한 나머지 대표단 일원도 한시대가 한국을 떠나는 전후에 모두 돌아갔다.
이처럼 한시대를 중심으로 한 연합회 대표단은 아무 국내 기반도 없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1∼2년의 기간 동안 국내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처음 가졌던 원대한 포부에 비해 그 성과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중간 및 중도 세력을 통합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는데 진력한 것은 나름 큰 의미가 있었다.
한시대는 연합회 대표단 단장으로 한국에서의 활동을 마친 후 농장 사업과 흥사단 활동에 전념하였다. 한시대는 해방 직후 딜레노에서 포도농장 140에이커, 수박 및 참회 농장 140에이커 등 대농장으로 발전시켜 한형제회사를 조직하였고, 남가주 잉글우드에 한가(韓家)회사를 설립해 건물 임대 사업도 전개하는 등 성공한 대사업가가 되었다. 자신이 번 돈으로 지역 한인사회를 비롯해 한인 학생들을 후원하였고,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을 역임하며 흥사단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한시대는 농업인으로 성공한 사업가였을 뿐만 아니라 한인사회를 통합해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미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