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행위처벌법의 생과 사
<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의 방해 >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헌법 제101조에 의하여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고, 그해 9월 22일 법률 제3호로서 제정되었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1948년 10월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시작으로 의욕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 정부의 방해,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친일경찰의 6.6 특경대습격사건, 백범 김구의 암살, 그리고 반민특위법의 개정으로 1949년 10월에 해체되었다.
배 경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
1946년 10월에 발발한 10월 인민항쟁을 계기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1월 중도 좌익세력의 주도로 친일파 처리를 위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조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46년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로 친일파로 지목되는 상당수가 입법의원으로 당선되자 이들의 의원자격 및 향후 선거에서 입후보자격을 박탈하고 10월 인민항쟁에서 나타난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의 초안이 1947년 3월 13일 상정되었다.
당시, 초안은 일제하의 독립운동을 참여한 관선의원을 중심으로 마련되었으며 내용은 민족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친일파를 배제하고 처벌의 모든 조항에 최저형을 규정한 이상주의(以上主義))를 채택함과 동시에 반민족행위가 무거운 민족반역자는 국회 동의 없이는 형기를 경감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처벌규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초안은 친일파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규정하였다는 비판과 친일파 처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 입법의원 내에 친일 경력이 있는 의원들의 반대로 4월 22일에 수정안이 상정되었다. 수정안은 부일협력자에는 없던 체형과 재산형이 추가되었지만 친일파의 범위를 모든 일제의 관공리를 당연범으로 하였던 것과는 달리 칙임관 이상에 대해서만 당연범으로 다루었고 초안에는 없던 공소시효를 두어 적용범위가 축소되었다.
또한, 모든 처벌규정에 최저형의 규정이 없는 이하주의(以下主義)가 채택되고 재판관의 판단에 따라 형을 경감하거나 면제할 수 있는 가감례 규정을 두었다. 처벌 규정이 약화된 수정안에 대해서도 전범자와 왕공작을 받은 자 및 의의 처벌 규정을 삭제하자는 친일계열의 민선의원 측의 주장과 '이하주의' 채택과 '가감례' 규정 삽입을 비판하는 중도좌파계열의 관선의원 들의 대립으로 재수정하기로 가결하고 5월 5일 재수정안이 상정되었다. 친일파 처리에 미온적인 재수정의원들에 의해 상정된 재수정안에서는 공소시효가 1년으로 단축되고 전범과 왕공작을 받은 자 및 계승자의 처벌 규정을 삭제되어 처벌 규정 강화를 주장했던 관선의원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재수정안 반대파 의원 5인이 새로 선정되어 법안을 재작성하여 1947년 7월 2일 최종안이 제정되었다. 최종안은 친일파 숙청에 있어 민족반역자도 선택범 규정을 둔 재수정안과 달리 모두 당연범으로 규정하였고 관리에 대한 선택범도 직위로 구분하여 친일파 처벌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특별조례법률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
당시 미군정은 과도입법의원을 군정의 자문기구 성격으로 규정하고 미군정 장관에게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법률의 인준권을 부여하였다. 미군정은 일제하에서 관리로 지낸 조선인을 군정 관리로 기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조례법률의 제정에 초기부터 '선 선거법, 후 친일파 처리'라는 논리로 반대하였고 법안이 제정되고 나자 인준을 거부하였다. 미군정의 거부로 '특별조례'는 시행되지 못 하였다.
친일파의 방해 책동
친일파들은 관선의원에게는 협박 편지를 보내고 민선의원에게는 거액의 뇌물을 제공하는 등 법안의 제정을 반대하는 로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친일파로 지목되던 이종형이 주도하던 민중당은 '특별조례' 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법률 제정을 비난하는 메시지나 결의문을 미군정장관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특별조례법률의 영향으로 1947년 5월 14일 입법의원의원선거법에 선거권.피선거권의 자격조건으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고등경찰을 지낸 자에 대한 피선거권을 박탈하자 전.현직 경찰 간부들이 이를 취소시켜달라는 진정서를 군정청 최고 통치자 존 하지에게 전달하였다. 특별조례법률이 제정된 이후 경찰은 하지에게 법안의 인준이 거부되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들이 법 집행을 반대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반민특위는 조사를 담당하는 특별조사위원회, 기소 및 송치 업무를 담당하는 특별검찰, 재판을 담당하는 특별재판소 등을 국회에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는 당시 친일파가 미군정 이후로 경찰과 재판부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이승만 정권의 기반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조사와 재판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정부기관의 비협조로 조사와 재판이 방해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 정부가 협력할 것을 반민법에 명문화해 두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의 집요한 방해공작, 국회프락치 사건,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친일경찰의 6.6 특경대습격사건, 김구선생의 암살, 그리고 반민특위 법의 개정으로 1949년 10월에 해체되었다.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을 파악하고 1949년 1월 8일부터 검거활동에 나선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여자 60명 포함)이었다. 이 중에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에 이르렀다. 각 도별 송치건수를 보면 중앙서울 282건, 경기 32건, 황해 26건, 충남 25건, 충북 26건, 전남 27건, 전북 35건, 경남 50건, 경북 34건, 강원 19건 등 모두 559건이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의 방해
이승만은 1949년 1월 28일 반민특위가 체포한 친일경찰 노덕술을 정부가 보증을 해서라도 석방하도록 지시했고, 2월 11일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관계자들을 처벌할 것을 지시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
노덕술 등 친일파들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독립운동가 백민태를 고용해 정부 요인들을 암살 시도하였으나 백민태가 자수해 미수로 그친 사건이다.
국회프락치사건
이승만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하여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소장파 의원들을 간첩협의로 몰아 구속하였다.
6.3 반공대회
1949년 6월 3일 국민계몽대 주관으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의원에 대한 석방동의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에 대한 성토대회가 다시 열렸고 3~4백여명의 군중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에 몰려와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는 구회를 외치며 특별조사위원회 정문까지 습격하였다. 특위에서 중부경찰서에 경호 요청을 하였으나 경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특경대(특위 내 사법경찰)가 공포를 쏘며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특위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과 내무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6월 4일 배후로 지목된 서울시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국민계몽회 회장 김정한 등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였다.
6.6 반민특위(특경대) 습격사건
1949년 6월 4일 친일 경찰 최운하가 체포되자 내무차관 장경근과 치안국장 이호는 특위에 최운하를 석방하지 않을 경우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위협하였다. 특위가 석방을 거부하자 이들은 내무차관 장경근, 치안국장 이호, 시경국장 김태선의 주도로 6월 6일 오전 7시에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 하에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경대장 오세윤 등 특경대원 35명을 폭행하고 중부서와 기타 경찰서로 분산 감금하였다. 이날 현장에 있던 특별검찰관 곽상훈은 몸수색을 당하고 권승렬 특별검찰부장은 경찰에게 권총을 압수당하고 반민특위 사무실의 서류와 집기도 탈취 당하였다.
이날 강원도 조사부에서도 특경대원이 춘천경찰서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고 6월 8일에는 충북경찰청이 충청북도조사부의 특경대 해산을 요구하였다. 6월 6일 오후에는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경찰 440명은 반민특위의 간부 교체, 특경대 해산, 그리고 경찰의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하고 6월 7일에는 서울시 경찰국 9천여 명이 6월 6일 결의문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는 총사퇴하겠다고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6월 9일에 경찰에 대한 선처를 약속하고 업무 복귀를 요청하였다.
한편, 사건 발생 직후인 6월 6일 오후 반민특위는 긴급회의를 갖고 국회에 진상 규명을 제안하였고 국회는 반민특위 원상 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6월 9일 AP통신사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반민특위 습격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한 것이라고 밝히고 6월 11일에는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되어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하였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국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국회는 이승만을 압박하기 위하여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추진하였으나 곧 이어 발생한 김구암살사건과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논의를 이어가지 못 하였다.
6.6사건은 반민특위 특경대에 대한 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특경대 뿐만 아니라 특별조사위원과 검찰관의 가택을 수색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사무국과 재판부의 특위관련 서류를 압수하는 등 사전 계획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반민법 제정 당시부터 지속되어오던 특위위원들에 대한 협박에다 이승만 정권의 특위 사무실 습격이 벌어지고 법무부 장관에서 돌아온 이인 의원의 주도로 7월 6일, 반민법 공소시효 단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개정안(반민법 2차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특별조사위원 전원과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 일부가 사임 의사를 밝혔다. 특위활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특위위원들의 사퇴하고 친일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가 구성됨으로써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