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립하고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으로 가톨릭의 입지는 줄어들어가자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나섰다. 한줄기는 신대륙이고 또다른 하나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그 이전의 마르코폴로의 견문록으로 황금의 땅으로 알려졌고 그들은 이땅에 가기 위해 인도로 가는길을 뚫고 남아시아를 거쳐 중국마카오에 상륙했지만 이곳에서 중국내륙으로 들어오는길이 험란하기에 다른길을 찾기로 하였다.
그들은 일본이 중국과 교류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당시 일본은 오랜내전끝에 통일되었고 내부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을 거쳐 중국땅을 점령하려고 했다. 이들은 유럽열강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네델란드의 함대를 맞아 그들과 통상했다.
일본쇼군과 막부는 유럽열강에서 가져온 신문화에 탐이 났고 이들과 함께 온 그리스도문화와 종교를 허용하는듯했는데 사실 이를 부분적으로 허용했는데 주로 규슈지역 나카사끼를 중심으로 한 풍신수길의 소서행장막부지역이었다 조선과 전쟁중에 많은 포로병이 규슈지역으로 끌려와서 네델란드노예상인으로부터 유럽등 세계각지로 팔려갔으나 일부 허용된 가톨릭교회는 노예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들에 속한 조선포로들을 보호하였기에 선교사들의 보호하에 노예로 팔려가는길을 막기위해서 조선포로인들은 대거 세례를 받았고 그지역의 그리스도인은 수십만에 달해 조선인이 독자적인 교회를 세울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일본은 불교국가이고 막부가 거둬들이는 조세가 주로 불교사찰이 많았기에 조선과 전쟁이후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일본군의 도움을 받은 유럽의 선교사들은 전쟁중에 파견한 군종선교사가 있었지만 너무나도 참혹한 전쟁실상을 보고 놀라웠다 그리고 일본조정도 천주교를 내세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교류를 막고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 네델란드만을 교역대상으로 삼았고
나카사끼에서의 대규모 그리스도인의 폭등으로 도꾸가와 조정은 그리스도선교사와 신도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주변 아시아국가로 퍼져나갔지만 양성한 조선인선교사도 있었지만 조선과 전쟁으로 조선땅으로는 가지 않았지만 다른 아시아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된다.
예수님이 부활이후 승천하시고 협조자인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교회공동체를 설립하고 원로단에서 로마제국내에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니 사도바오로와 그의 동력자이다
이들에 의해 가나안땅을 떠난 유대인과 그곳 이방인들이 로마제국의 압제 그리고 유대인들의 독립운동등으로 성지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추방되고 유다땅밖으로 나가게되는데 여전히 박해시대 한가운데였다.
로마제국이 멸망하는데 서로마제국이 먼저 멸망하고 동로마제국멸망은 한참 뒤에 이루어졌지만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 등장했지만 중근동 지역의 이슬람교의 확대로 확장에 제재를 받았지만 서로마제국멸망후 유럽거대가문의 결합한 왕조와 교황청의 협력으로 가톨릭교회가 유지되었지만 그거대가문의 영향력으로 가톨릭교회는 부패에 휘말리고 왕권과 부유상인계급에 많은 권한을 내줌으로서 이들이 아시아와 남미로 가톨릭교회가 진출하게 되었으니
정조의 갑짝스러운 승하로 정적을 몰아내기위해 시작된 대규모의 조선땅에서의 박해로 초기교회때 들어온 중국인신부 주문모와 초기평신도회장들이 순교하였다 주로 내포.호남지역출신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혈연과 혼인관계로 맺어진 관계였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험한 산중 계곡을 찾아 그곳에 마을을 형성하고 숨어 살게되는데 교우촌의 탄생이고 그결과 강원도 충청도 영남의 내륙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게 된다.
교우촌의 대부분이 내포등지에서 피해온이들이었는데 그분들의 영향인지 124복자중의 한분이 박상근 마티아로 문경출신으로 관아의 아전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는 영남일대에 온 빠리외방선교사인 칼레신부의 길안내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묘소는 문경내 마원성지에 있다. 저는 문경에살때 집에서 5km남짓 걸어서 가보았고 그이후 성당봉고차를 얻어타고 안동교구장이 주례하신 성지미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들 어려운시기에 묘한곳에 복음의 씨를 뿌렸던것이다.
내포.호남지역의 교우는 해미관아로 모아 그곳에서 처형했고 영남지역은 각지역에서 상주등으로 이송되어 취조하고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에서 주로 처형되었다고한다. 이들이 잡혀온 감옥의 교우들을 돕기위해서 대구가까운 팔공산자락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나 그들의 수가 많아서인지
종전에는 관아로 끌고와서 취조후에 처형했기에 그 기록이 남아있지만 산기슭에 대거 들어온 포졸들은 달아나는 이들은 다 천주교인으로 여겨 그자리에서처형했기에 이곳은 무명순교자들이 많다 그들을 산기슭에 매장하고 그주위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다고 하니 한티고개이다. 지금 처형지위에 세운 관덕정기념관이 있는데 시내에 있어서 순교자미사도 하고 자료실있어서 미사시간에 맞추어서 방문하며 좋고 그냥 둘러봐도 좋을것같다.
천주교회는 어려운시기에 피를 뿌림으로 성장해왔음입니다. 전쟁이후 굶주림에 시달리는 과정속에서도 관할 교구장은 미국등 선진국에 가서 기부금을 받아와서 전쟁고아와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경우가 별로 없는것 같은데 서울에서 가난한동네인 시흥성당은 늘 재정에 시달렸지만 파푸아뉴기니아에 파견된 선교사를 위해 적은돈 백달러를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곳 원주민은 밀림에 흩어져사는데 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리기위해 선교사들이 먹을것을 차에 싣고 찾아다니면서 자기돈으로 도로를 내면서 다녔다고합니다. 여러곳에 작은돈을 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강원도의 어느 지역에 파견된 수녀님들은 재정이 열악해 일부 신자들이 모은 기부금으로 한지역에 조금씩 지원해주었는데 그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도 그고통을 알기때문이라고 한다.
부산교구의 어떤미국신부는 특이하게 교구신부였는데 그분이 미국등지에 다니면서 모금한일을 책으로 내기도했는데 그책을 읽어보면 다니면서 먹는 식비도 아까워서 간단히 만든 샌드위치와 커피로 떼웠다고 한다
그분은 비행기탈때 소화물무게를 줄이기위해 옷을 여러벌 덧대어 입고 타기도했다 주교님은 웃으시면서 그 비용을 아끼면 아이들에게 해줄수있는데, 하셨다고 하십니다.
목포 산중턱에 사는 어느 수도공동체는 공장에서 근로를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어려움속에서 그들보다 더 어려운이들을 돕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가난한가정의 어린딸은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을 다녔다고합니다.
그딸이 어렵게 받은 적은월급을 아껴 수녀원에와서 어려운이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봉투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증언하는 수녀님의 이야기는 퍽이나 감동스러웠다.
언제가 광주로 이사온 수녀원이라고 소개된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인데 제가 1980년에서 몇년간 대구제일모직공장에서 일하는 수녀님을 만나면서 그 수도공등체를 알게되었고 목포의 이야기는 목포삼학도성당 신부님과 그 공동체를 찾아간것입니다.
하느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가난을 체험한이들을 통해 가난한이를 돕게하는데 성서형제회의 아나윔 정신도 바로 그곳에서 출발한다고 여기기에 부족하지만 모자라지만 그 정신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떤면에서나 기능해보이지 않고 이들 도저히 실행이 가능할것같이 여기지못하지만 이들을 손뗄수없는 것이 우리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