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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조집 [☆그늘의 문장☆]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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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문장◎]
박명숙 시조집 / 한국현대시인선 032 / 주식회사 동학사(2018.09.08)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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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문장
느티나무 긴 팔 내려 첫 소식을 받는다
거미발처럼 몰려들어 일렁이는 푸른 획들
실팍한 그늘의 문장으로 입하가 오고 있다
반납
작은 새가
울컥
작은 혀를 내뱉었다
말랑한
붉은 살점을
세상에 반납했다
노래를
뽑아 던지자
뜰의 앞니도 빠져나갔다
궂은비 읽기
아침부터 주룩주룩 봄비를 읽어간다
세로글 내리닫이로 속도를 높여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세상에 끼워 넣어 가둘 수 없는 신문처럼
띄어읽기도 띄어쓰기도 할 수 없는 봄비를
숨 가뻐 소리를 높여 주룩주룩 읽어간다
혼잣밥
변기 위에 걸터앉아 혼자 밥을 먹는 사람
밥일까 사료일까 그것을 모르지만
물 한 병 김밥 한 줄로 빈창자를 모신다
산목숨에 제 올리듯 받쳐 든 점심 한 끼
외로움 닫아걸고 마른입을 적시면
둘이선 들어갈 수 없는 목구멍도 저 혼자다
구렁 같은 목구멍을 한 모금씩 뚫고 가는
뚫어야만 피가 도는 하루치 목숨 앞에
괜찮다 홀로 나앉아 밥 먹는 일 괜찮다
해당화
흑산에서 보았네
해당화 첫 꽃가지
1693년 궁중 나인
정숙의 해괴한 짓
내몰린 가시 모가지
흑산에서 보았네
해괴한 그 짓으로
세상이 무너졌을까
죗값을 다하지 못해
여태도 선혈 듣는
검은 섬 그물에 걸린
꽃 모가지 보았네
애기똥풀꽃
뱀이다
외치기 전
사라지고 말지만
이미 내게 스며들어
긴 똬리를 틀었다
뱀눈도
솔깃 기우는
애기똥풀꽃 지천이다
염소를 만나다
-무인도
발가벗은 바위도
목자라면 목자겠지만
제 몸 제가 키우면서
염소는 사는 게지
완강한 절벽 사이로
뿔 난 하루 걷는 게지
속 비고 뒤로 잦은
고집도 고집이지만
길 없는 천인단애
바장이며 오르내리며
닥치면 닥치는 대로
외로움도 먹어치우는 게지
우수
마음 질끈 묶어도 밤은 더 팽팽해지지 않고
신발장 속 운동화만 끈이 자꾸 풀린다
주전자 가득 부은 물 설설설 끓는 이월
그늘의 앞섶
솔바람이 마른입만 다셔도 헝클어지고
잔 볕살이 느린 목만 기웃대도 자지러진다
핏줄을 꼬집힌 듯이, 갈기라도 뽑힌 듯이
지금
재잘대는 산새소리 한 됫박쯤 엎지르며 구겨진 옷고름 같은 영주햇살 밟으며 선잠 깬 진달래 들쳐업고 천방지축 산이 온다
허공 한 겹
필름이 벗겨지듯 허공 한 겹 벗겨진 날
날개 얇은 나비가 제 맘인 듯 만져보더니
더듬이 밀어 넣으며 깊은 봄을 빠져 나간다
능소
피고 지는 꽃으로 넝쿨은 북새통인데
밧줄에서 내리거나 밧줄을 올라타려고
꽃들은 꽁무니마다 서로 물고 늘어지는데
발톱 다 빠지도록 한여름을 기어올라
마침내 방호벽 너머 턱을 내건 꽃 한 채
첫울음 길어 올리듯 뙤약볕도 자지러진다
콩 넝쿨과 시
콩 넝쿨 걸쳐 입은 울바자 틈새마다
숯불처럼 한낮을 비어져 나오는 콩꽃 같은
시 한 편, 쓴 환약처럼 익어가는 열매 같은
늦여름 시 한 편이 끝물로 대롱거린다
건드리면 부서질 듯 위태로운 행간마다
치켜든 긴 꼬투리가 전갈꼬리로 말라간다
좋은 시간
생고등어 아랫배처럼 햇살도 탱탱하고
갓 베어낸 보리처럼 고요도 잘 익었다
오늘도 햇살과 고요가 한통속으로 놀고 있다
입춘 저녁
느릿한
불빛들이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구멍가게
처마 밑을
옹색하게 드는 저녁
저만치
눈인 듯 비인 듯
어칠비칠 그가 오나
달빛 그림자
늘어진 내 그림자 관을 끌 듯 끌고 간다
달빛이 쏟아질수록 길은 더욱 멀어지고
늦은 밤 아킬레스건이 터질 듯 타들어간다
긴 탯줄 목에 감고 죽음이 돌아오는 땅
뜨거운 날숨 한 모금 내뿜을 곳이 없다
살아서, 캄캄한 그림자 꽁꽁 묶어 끌고 간다
골목길
동네를 동여매면
두어 번은 묶을 듯
다 삭은 새끼줄 같은
비알진 골목길
한 자락 산길에 닿고
한 자락은 찻길 닿는
골목길 들어서는
밤비조차 성글어서
듬성듬성 얼레빗처럼
훑고 가는 몇 걸음
이 세상 샅샅한 어둠
다 빗길 순 없다는 듯
초가을
초가을 흰 구름은
밑동이 젖어 있다
세상의 이마가
아릿하게 닿는 그곳
바람은 소맷자락을
소슬하니 뻗는다
젖은 그늘 되작이던
풀여치 달아나고
햇살도 천금으로
몸값이 벌어진 날
칡넝쿨 긴 팔 거두며
까슬한 등을 만다
시인
마지막 남은 카드를 여인에게 던진 후
시인이 제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자
세상도 피를 흘리며 비로소 붉어졌다
데드 존
- 현산
산 너머 파도 너머, 이승 너머 이승으로
비바람에 떠밀리며 뒤웅박처럼 가신 그대
하늘 길 세들어 살던 저승보다 먼 그대
탱자울 가시마다 잔명殘命을 내어걸고
우물보다 캄캄한 하루를 긷던 그대
시대를 가로지르던 어긋난 맨발이었으리
와 이라노
홀아비 이목수가
초승달을 끌어안는다
와 이라노
초승달 모가지 숨넘어간다
그렇든
아니 그렇든
바람 분다
여름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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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빈 하늘을 딛고 다니다가
돌아오지 않기도 하는
한 켤레 구름에게
2018년 초가을
박명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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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숙 시조집 [※그늘의 문장※]
[ 작품 해설 ] -
정형적 의장과 서정적 유토피아
송기한. 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서정시의 특성과 시조
박명숙의 『그늘의 문장』은 시인의 세 번째 정형시집이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로 당선된 이후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으니 상당히 과작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을 평가하는데 있어 시집의 양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거니와 이 시인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형시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는 시조 형식이 갖는 양식적 특성에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조란 잘 알려진 대로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서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주변에 머문 양식이다. 그만큼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양식이거니와 그런 역사성이야말로 시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닌가 한다.
일찍이 슈타이거는 서정시를 정의하면서 자아와 세계의 합일, 곧 서정적 활홀의 상태에서 빚어진 양식이라고 한 바 있다. 자아와 세계가 통일되는 극적 순간을 서정적 황홀이라 한 것인데, 실상 서정시에 대한 이런 정의야말로 시조 양식에 꼭 들어맞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유교적 토양을 바탕으로 한 시조 양식이 오늘날까지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게 한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신이 사라진 시대, 자아와 세계의 합일될 수 없는 거리감이 근대성의 한 양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저변에서 이에 대한 안티 담론 또한 끊임없이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구가 서정적 유토피아를 갈망하게끔 했거니와 서정시는 이를 충실히 반영해왔다. 가장 절제되고 세련미가 요구되는 시조는 이런 시대적 요구를 더욱 잘 구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것으로 보인다. 서정적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 한 시조는 더 이상 생명력이 다한 양식으로 기록되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통합하기와 초월하기
서정적 황홀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완전한 통합에서 이루어진다. 자아가 세계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될 때, 자아가 세계화 되는, 그리고 세계가 자아화 되는 합일의 경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슈타이거는 황홀 혹은 회감이라고 했다. 시조가 현 시대에도 가능한가라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자아와 세계의 합일이라는 영원한 꿈은 서정시 뿐만 아니라 시조 양식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이상의 서정적 기능을 시조 양식은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명숙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이 진단이 더 확실해짐을 알 수 있게 된다.
박명숙의 시들은 내러티브를 배제한, 간략한 소재로 시화된다고 평가되어 왔다. 하기야 시조 형식 속에서 그러한 이야기 구조를 끄집어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그의 시들에서는 더욱 그러한 면들이 간취된다는 것이다. 한 권의 전작 시집을 꿰뚫어 볼 경우에도 시인의 작품 세계에서 인과 관계에 바탕을 둔 시의 구조, 서사적 연결성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사회성을 읽어내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서정적 황홀을 위한 여정, 곧 서정적 유토피아를 위한 여정의 시작점, 곧 인식의 준거점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지점을 시작의 출발점으로 할 것이냐, 서정적 황홀에 이르기 위한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 쉽게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을 꼼꼼히 읽어보게 되면, 이 시인의 정신 속에 간직된 서정의 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곧 경계의식이다. 이를 구분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상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떻든 이 시인이 품고 있는 서정의 출발은 경계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조화의 저편에 놓이는 의식이다. 하나의 존재가 정립하게 되면, 또 다른 존재는 이타성으로 남게 된다. 이쪽과 구분되는 이타적 의식이 존재하게 되면, 동일성의 감각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흔히 이야기되는 조화의 상실이며, 서정적 동일성의 와해이다. 여기서 서정적 황홀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것은 구름이라, 한 켤레 먹구름이라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이라
흐르는 만경창파에 사로잡힌 나막신이라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
문수도 잴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섬이라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이라
-「신발이거나 아니거나」 전문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기본 동인은 우선 모호성이다. 작품의 제목부터가 규정적이지 않는데, 구름을 소재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구름이 아니고 신발이다. 뿐만 아니라 신발일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1연에서 시인은 저것을 분명 “구름”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구름 그 자체로 한계 지어지지 않는다. “한 켤레 먹구름”으로 존재 변이를 거치면서 “벗겨진 시간”이 되기도 하고 “나막신”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헌신짝 같은 섬”으로 진화하기도 하고,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한 편의 짧은 시조 양식에서 이미지들이 이렇게 현란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채로운 경우이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이 고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신기할 뿐이다. 이를 두고 말의 화려한 변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의 대상이 고유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하나의 대상이 하나의 시니피에로 굳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무력화시킨다. 이를 위해 부채살 모양으로 다양한 시니피에를 연결시킴으로써 경계나 구분이 만들어지는 현상을 막아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장들은 이번 시집에서 두루 발견되는데 가령, 「방문」도 그러하다.
가난한 김 선생이 더 가난한 내게 와서
옆집 가난을 말하다가 제 가난은 잊어버리고
한숨을 들이쉬더니 한번 웃고 돌아갔다
-「방문」 전문
이 작품에서 서정적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지점이랄까 경계는 바로 가난이다. 현대 사회란 경계로 위계질서화되는 사회이다. 그리하여 소위 경제계층이 생겨나고, 이런 층위가 사회적 갈등 요인을 만들어내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일이다. 경제적 갈등 요인이 경계지어지고 집단화되면, 투쟁의 양상으로 전화하게 된다. 그것이 또 다른 경계와 구분이 되어 화해할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경계와 구분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가 본 것은 나 아닌 타자의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특색은 약간의 서사성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러나 이런 구조가 시조의 간결성과 완결성을 훼손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성을 담아내고도 시조의 유기성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 작품은 세 가지 주체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가난한 김선생과 더 가난한 나, 그리고 옆집의 또 다른 누구이다. 어쩌면 불평불만이 가득했을 가난한 김 선생은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 옆집의 또 다른 누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존재이다. 그 자신을 특징짓는 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라는 영역은 철저히 지워버리고 타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지나치고 내 집을 지나치듯
가끔은 지나치고 싶다 낯익고 오랜 나를
어둠을 눌러쓰고서 석양을 지나치듯
-「모르는 척」 전문
이곳과 저곳을 무화하고자 하는, 그러한 비경계 의식의 정점에 놓여 있는 것이 이 작품일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아이들을 지나치고 내 집을 지나치듯”“낯익고 오랜 나를”“가끔은 지나치고 싶다”고 했다. 마치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가끔은” 지나치고 싶다고 했지만, 이는 단지 역설에 불과할 뿐이다. “가끔은”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시인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자신이게끔 묶어둔 것이 “낯익고 오랜” 관념이다. 그것은 어느 순간이나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자아의 존재성은 석화된 채 오랜 동굴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 서정적 자아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은 벗겨져야 하고, 그를 가두었던 오랜 동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나를 무장해제해야 또 다른 자아, 곧 공동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란 경계나 구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지점에서 성립한다. 나와 타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세계라면 공동체의 이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뿐이다.
벌어진 지퍼들의 이빨을 물고 가듯
바위의 흉ㅌ들을 솔이끼가 기워갑니다
잔걸음 총총대면서 정수리로 몰려갑니다
-「박음질」 전문
그러한 경계가 남긴 것이 “벌어진 지퍼”이고, “바위의 흉터”가 아닐까. 벌어진 지퍼를 물듯이, 혹은 바위의 흉터를 솔이끼가 기워가듯이 상처들은 치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지워지고, 경계가 사라져야 한다. 모든 것을 딛고 하나의 정점에서 거대한 초월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조화의 세 가지 층위
박명숙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전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조화이다. 시인은 그러한 목적에 이르기 위한 전략으로 나를 지우기, 그리하여 상대방의 세계로 틈입해 들어가기로 설정했다. 그것을 초월이라고 했거니와 이것의 궁극적 목적은 서정적 황홀의 상태이다. 「못」은 그러한 시인의 이상을 잘 드러내 보인 수작이다.
내 몸 허물어져
몸터 아주 파내면
하루 또 하루하루
네 마음 흘러들어
마침내
물속에 지은 집 한 채
누구도 모르리
-「못」 전문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핵심 기제 역시 “나”을 지우는 것에 있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가 굳건한 성채로 남아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니 “내 몸”이 “허물어져”야 한다. 내가 기각되어야 비로소 너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틈은 타자가 들어오기 위한 문이다. 내가 무화되었으니, 타자는 곧 나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물 속”의 “집 한 채”이다. 이 집은 나 혼자만의, 혹은 타자만의 고유한 공간이 아니다. 나와 타자가 함께 할 수 있는 공존의 공간, 생존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동체의 꿈, 서정적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조화된 공존이라는 이상이 실현될 때, 비로소 꽃피운다. 그것이 이 시인의 전략적 주제라고 했는데, 시인은 이를 위해 대상에 대한 미세한 관찰을 시도한다. 그런 다음 여기서 다양한 시의 의미를 읽어낸다.
복사꽃 이울어도 한 잎씩 이울 테지
산빛이 짙어가도 하루씩 짙어가고
등 너머 뻐꾸기 소리도 한 굽이씩 여물 테지
꽃 이운 그 자리도 한 나절쯤 어두울 테지
어린 초록 산그늘도 한 발짝씩 내려앉고
가문 날 왜가리 외로움도 한 모금씩 타들 테지
-「복사꽃 이울어도」 전문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주조는 시간적 질서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대,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는, 그 뻔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는 함의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자연이라든가 혹은 조화의 감각을 이야기할 때, 시간의 가역성이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순차적으로 구성될 뿐, 결코 그 질서를 위반하지 않는다. 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시간에 대한 이런 인식만으로도 시인이 사유하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 「착지」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움, 「능소」에서 보이는 자연의 엄청난 질서 역시 그 연장선에 놓이는 것들이다.
이런 시간적 질서와 더불어 또 하나 주목할 것이 바로 공간적 질서 혹은 조화의식이다. 자연에 주목한 기존의 시인 못지 않게 박명숙 시인 또한 자연의 궁극적 가치에 매우 주목하고 있는 경우이다. 과거의 시조양식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의 시조 양식에서도 자연은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소재를 서정화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시인의 역량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채택하고 이를 서정화하는 방식은 매우 색다른 곳에서 찾아진다.
동백이 한 잎씩 제 몸을 열 때마다
파도도 한 자락씩 제 팔을 벌린다
한 구비 붉은 파도가 한 송이 꽃을 받는 섬
핏물 밴 숨비 소리 평생을 길어 올리며
마을의 동백숲이 숯불을 지피는 날
물중중 이랑 헤치며 어머니도 돌아오신다
하늘과 물의 넋이 따로 살지 않아서
천둥도 해일도 한 목숨으로 돌아드는데
위미리 동박낭 강알마디 벽력 같은 꽃이 핀다
-「위미 동백」 전문
이 작품에서 펼쳐지고 있는 자연의 풍광은 개별적 사실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경계를 초월하기 위해서 나를 무화한 것처럼, 이 작품에서 생기하는 자연의 사실들은 모두 타자들과 불가분의 관계성에 놓여 있다. 동백이 “제 몸을 열”게 되면, 파도 역시 “한 자락씩 제 팔을 ” 벌린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동백숲이 숯불을 지피는 날”이면 “물중중 이랑 헤치며 어머니도 돌아오”시는 것이다. 어느 때가 되니까 어떤 것이 일어난다는 우연 혹은 필연의 감각이 아니라 하나의 행동이 다른 행동의 연쇄반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만큼 이 시인의 작품에서 공간은 유기적 연쇄반응이 매우 격하게 일어나는 곳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탈을 위한 반응이 아니라 조화와 질서를 향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다른 경우이다.
그러한 사유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의 3연이다. “하늘과 물의 넋이 따로 살지 않아서/천둥도 해일도 한 목숨으로 돌아드는데”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시인의 작품은 지극히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근대가 요구하는 자연의 의미를 넌지시 그러나 힘차게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모두 형이상학적으로 읽히거나 난해한 것은 아니다. 자연의 섭리를 냉정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자연이 함의하고 있는 조화의 의미를 굳이 제시하거나 섣불리 선언하려 들지 않는다.
시인은 자연의 조화를 시간의 질서 속에서, 공간의 유기적 관계망을 통해서 탁월하게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감각을 자연과의 관계망 속에서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러하다면 시인의 시세계는 협소하다는 비판을 비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상 짧은 시형식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서정적 황홀이라는, 서정시 본연의 임무만 달성하면, 그 임무만으로도 중요한 목적을 달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인의 작품들은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시인이 넓혀나가는 시의 음역은 매우 넓은 곳에 이르기까지 산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은 왕이 다스리는
서라벌로 시집온
하노이댁 홍이는
하노이도 서울이라고
죽은 듯
나뭇잎처럼 누워서
납작하니 생각하다가
손만 대면 부서질 듯
카랑한 몸을 말고
깃들 곳 없는 밤을
뒹굴다가 돌아눕다가
창문가
벌레집처럼 매달려
대롱대롱 별을 보다가
-「홍이」 전문
현재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다문화이다 그 동기야 어떠하든 간에 이제 다문화는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이 되었다.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어떤 이질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 이 작품이 소재로 하고 있는 “홍이”의 처지 또한 그러하다. 그녀는 하노이 출신이고, 서라벌 어느 지역으로 시집온 여성이다.
그러나 서정적 자아인 “홍이”의 정서는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하노이도 서울이라고”하는 공통성을 찾아가기도 하고 “깃들 곳 없는 밤”에 적응하고자 이리저리 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동질성에 대한 확고한 장으로 안내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든 이 시인의 시야에서 “홍이”는 더 이상 이타적 존재가 아니다. 문화적 낙차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감각은「에야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저 산에 아파트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해 지고 밤이 와도 울지 않는 꽃동네
에야호, 앉을 곳 없는 불나방이 날고 있다
두 날개 접히지 않는 낯선 밤을 날고 있다
잠든 산턱 흘러내리는 한 때의 불길 따라
그 몹쓸 그리움인 양 에야호, 날고 있다
-「에야호」 전문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이다. 현재의 우리 시단이나 문학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 관계망이다. 문명과의 대립에서 안타깝게도 적응하지 못한 존재, 곧 타자가 된 불나방의 존재를 통해서 문명의 과도한 횡포를 고발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고발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문명 이전의 자연을 그리워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역시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공간이고, 자연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자연과 문명의 구분된 세계가 아니라 유기적 전체로 통합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이 시의 주제인 것이다.
생명력의 고양과 서정적 황홀
조화에 대한 그리움은 건강한 생명력의 발현에 있을 것이다. 조화가 무너진 일탈의 세계야말로 더 이상 생명이 공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 아련한 공간을 위해서 시인은 시간의 질서가 무엇이고, 공간의 조화 혹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할 수 있는 공존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색해 왔다. 그것은 모두 건강한 생명에 대한 그리움, 공존에 대한 희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튀어오른 고등어, 그 곁의 물살처럼
갓 베어낸 햇보리, 그 곁의 풋내처럼
덩달아 몸을 뒤집는 햇살과 바람처럼
-「동반」 전문
짧은 시형식이긴 하지만,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이렇게 좁은 서정의 공간에서 어찌 이리 많은 함의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일차적인 의미는 조화의 감각이다. 그러나 막연한 조화가 아니라 하늘과 바다, 그리고 땅이 함께 어울리는, 입체적 축제의 조화이다. “고등어”와 “햇보리”, 그리고 덩달아 몸을 뒤집는 “햇살”과 “바람”은 모두 하나의 덩어리이다. 이 네 가지 요소가 모두 갖추어지고 어우러져야 비로소 생이 약동한다.
그러한 생명의 건강성을 시인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극대화시킨다. “고등어”도 그러하거니와 “햇보리”의 풋내는 그러한 생명력을 고양시키는데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이 시는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이미지의 현란한 구사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런 활동성이 생명력과 등가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조화라는 의미, 생명이라는 의미, 동반이라는 의미가 극대화되고 있다.
한 나무가 한 나무를 말없이 어루만질 때
꾀꼬랠루 꾀꼬랠루 먼 산에 새가 우네
진달래 꼬깃한 귀가 온종일 젖고 있네
고개를 주억이며 집 마당 둘러보더니
당신이 날아가네 하얀 새로 날아가네
마른 봄 붉게 젖어서 내 귀에도 움이 튼 날
꾀꼬랠루 새가 되어 고대 따라 나설 것을
다리 건너 고개 넘어 같이 가면 좋을 것을
잘 가라 손을 흔드니 잘 있으라 손 흔드네
-「꾀고랠루 꾀꼬랠루」 전문
서사란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작품을 보면 영락없이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사건의 연쇄성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서정시가 아니고 서사시쯤 되는 것이 아닌가. 서사시에서 서정적 황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어떻든 사건의 연속이긴 하지만, 서사는 아니다. 이를 합창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나의 반응이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오케스트라. 실상 이 작품은 그런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킬 만큼 대합창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이란 이런 대화합의 세계이다. 시인이 꿈꾸어 온 것은 이런 조화의 세계, 대화합의 세계이다. 이런 목적을 향한 시인의 도정은 실로 가열찬 것이었다. 시간의 질서와 조화를 이해하고, 공간의 조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어떤 것을 내포하는지에 대한 장고한 사유의 끝에서 발견한 것이 「꾀꼬랠루 꾀꼬랠루」의 세계이다. 이 소리는 의미의 영역이 아니고 음성세계일 뿐이다. 제목도 그런 것처럼, 이 작품에서는 통사론과 같은, 인간적 의미의 세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자연의 음성, 자연의 합창만이 들려올 뿐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비로소 인간과 자연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건 동일성이야말로 서정양식이 꿈꾸어오는 서정적 황홀의 상태이다.
박명숙의 시들은 간결하고 깔끔하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은 장르의 압축적 성격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짧기는 하되, 꼭 필요한 이 시대의 잠언들이 잘 조직된 얼개처럼 펼쳐져 있다. 이를 짧은 서정 양식에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역량이거니와 우리는 시인이 던지는 그러한 서정의 짜임 속으로 자연스럽게 육박해들어간다. 이 시대에 필요한 서정적 황홀이란 무엇인가. 혹은 서정의 유토피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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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이미지와 기억의 고요한 만남
「서천」은 여성의 내면에 자리 잡은 기억과 욕망의 모티프를 흐르는 물의 이미지에 실어낸 매우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시편이다. 삶의 한 고비를 지니며 떠도는 영혼을 위로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종교의식이 수륙제라면 시인은 빨래라는 일상의 가사 행위로 그 의식을 대신하고 있다. 옷가지를 손으로 치대고 물에 얼룩을 씻으며 과거를 수장(水葬)시키고 있는 것이다. 상처를 갈망하고 흉터를 자원하는 모순의 반복이 사랑이라는 사건이며 그 사랑에의 욕망과 좌절과 상처와 회복으로 삶은 이루어진다.
박명숙 시인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하여 기억이 스스로를 드러내듯 감추고 감추듯 드러내는 장면들을 포착해낸다. 계속되는 이미지의 연결을 열어놓고서도 각각의 이미지들이 분리되지 않도록 한 장치가 강한 결속력을 발휘한다. 「서천」이 환기하는 정서가 마이클 온다찌(Michael Ondaaje)의 「시나몬 껍질 벗기는 사람(the cinnamon peeler)」을 연상시키는 반면,「신발이거나 아니거나」는 프랑스 소설가 마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희로시마 내사랑(Hiroshima, Mon Amour)』의 잿빛 세계를 생각나게 한다.
-박진임. 문학평론가․ 평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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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숙 시조시인∥
∙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열린시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이영도문학상 수상
∙ 시집으로『은빛 소나기』『어머니와 어머니가』
∙ 시선집『찔레꽃 수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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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