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의 포즈는 가져 왔겠지만 얼굴은 화가의 상상일 수 도 있어 ---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정말 예쁜 모델들이 많죠. 모델 중에는 자신을 모델로 세운 화가와 결혼을 해서 행복한 삶을 누린 사람도 있지만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제임스 캐럴 베크위드 (James Carroll Beckwith / 1852~1917)의
작품 속 모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에블린 네스빗의 초상화 Portrait / 1900 / 78.74cm x 67.31cm
그림 속 에블린은 열 여섯입니다. 법률가였던 아버지는 상당한 빚과 어린 동생, 그녀의 엄마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 버립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그녀였지만 타고나 아름다움이 화가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화가들은 그녀를 서로에게 모델로 소개하면서 그녀는 점차 생활의 안정을 찾습니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에서 코러스 걸로도 활동하고 나중에는 영화에도 출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남자 저 남자의 정부로 생활하다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남편이 그 이전 남자를
살해하면서 그녀의 생은 온통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렇지만 말년에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 그리고 자살에 대한 충동을 이겨내고 여든을 넘기죠.
여리디 여린 가슴을 열고 있는 그림 속 열 여섯의 그녀는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흐를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기회가 되면 에블린 네스빗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한 번 써 보고 싶습니다.
베크위드는 미국 미조리주 한니발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867년 파리 박람회 전시와 관련된 미국측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했고
도매상도 크게 운영했다고 하니까 사업 수완이 좋았던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실제로 베크위드가 자란 곳은 시카고였습니다.

Greee / 1887 / 52.07cm x 71.12cm
아름드리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길, 길을 걷던 노인이 우두커니 담 안쪽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자라는 나무들은 해마다 무성한데, 반듯했을 벽은 세월이 흐르면서 기울어졌습니다.
벽 사이로 안을 드려다 보는 노인에게나 그림을 보는 저에게나 나무들 사이에 놓인 벽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라도 담이 세워지기 전, 담 안쪽은 노인이 즐겨 갔던 곳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노인은 아직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벽 안쪽에 머물고 있는 예전 추억을 찾고 있는 걸까요?
(Greee의 뜻을 도무지 알 수 가 없습니다)
열 여섯이 되던 해 베크위드는 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에 입학,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시카고에 재앙이 닥칩니다.
1871년 10월 8일 저녁 9시경, 시카고 도심 뒷골목에서 일어난 불길이 순식간에 시카고를 집어 삼켰습니다.
300명의 사람이 이 화재로 사망했고 9만 명이 집을 잃게 되었던, 미국 역사상 가장 컸던 재난 중의 하나였죠.
소위 ‘시카고 대화재’였습니다.

머리를 빗고 있는 갈색 머리 여인 Brunette Combing Her Hair / 1891
결혼을 하고 가장 해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아내의 머리를 빗겨 보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만 자라다 보니 여인의 머리를 만져 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죠.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덤비는 제게 아내는 머리를 맡긴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베크위드는 작품 속에서 간혹 관능적인 여인들의 모습을 표현하곤 했는데,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 속
여인에게서도 우아한 관능이 느껴집니다. 물론 머리를 빗는다고 다 관능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화재가 난 후 베크위드의 가족들은 뉴욕으로 삶의 기반을 옮깁니다.
그도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에 입학, 시카고에서 시작한 미술 공부를 계속합니다.
2년 뒤, 베트위드는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그 후 5년간을 주로 파리에 근거지를 두고 유럽에 머물게 됩니다.

아쉬운 눈길 A Wistful Look / 39.1cm x 29.2cm
이런 눈길을 마주하면 고개를 들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모든 것을 눈에 담았으니,
바라 볼수록 머리만 더 어지러워지거든요. 시간이 좀 더 흘러 저 눈에 눈물이라도 고이면 상황은 더 어렵게 되지요.
살면서 몇 번이나 저런 눈빛을 만났었을까요? 혹시 애써 그런 눈빛을 피했던 적은 없었을까요?
가을이면 저런 눈빛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 오릅니다.
파리에서 베크위드는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초상화가였던 카를로스 뒤랑의 화실에 입학, 공부를 계속합니다.
그 곳에서 그는 인상파 기법에 대해 눈을 뜹니다. 또 파리에 머무는 동안 존 싱어 서전트와 화실을 같이 썼는데,
두 사람은 평생 친구가 될 뿐 아니라 베크위드가 서전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지요.

숲에서의 화장 Sylvan Toilette / 1898 / 71.12x50.8
날개가 달린 아이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여신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묶고 있는 여인을, 턱을 괴고 쳐다보는
아이는 큐피드이고 여인은 비너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너스와 큐피드는 엄마와 아들 사이이지만 머리 손질 하는
엄마를 쳐다보는 큐피드의 자세는 ‘놀라운 우리 엄마’라고 감탄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몸이 되었다고 아내는 늘 주장하는데 아무래도 이 그림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비너스도 아이를 낳았는데 몸매는 그대로잖아? 그런데 당신은 이유가 뭐야?
아내의 반격이 궁금해집니다.
미국으로 귀국하기 1년 전인 1877년, 스승인 뒤랑은 뤽상부르 궁전의 벽화 제작을 의뢰 받았는데
그를 도와줄 화가로 제자인 베크위드와 존 싱어 서전트를 뽑았습니다. (자료에 따라서는 루브르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어느 것이 확실한지는 더 찾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때의 경험 때문인지 이후 베크위드에게는 몇 번의 벽화 제작 의뢰가 있게 됩니다.

수 놓는 사람 The Embroiderer
요즘은 자수 놓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없지만 서양에서는 한 때 자수가 바느질과 함께 정숙한 여인의 상징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이겠지만 마치 창문 밖에서 천사들이 넘어다 보는 설정도 그런 의미일까요?
얼마 전 유행했던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이라는 말처럼 자수가 완성에 이르기 까지 얼마나 지난한 인내가
필요한지 해 본 사람은 알겠지요. 그러나 정숙하다는 말에 담긴 남성 중심주의의 사고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878년 뉴욕으로 돌아 온 베크위드는 초상화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들의 모습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뮌헨에서 오랜 시간을 미술 공부를 하고 막 귀국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윌리엄 체이서,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됩니다.
그리고 곧 뉴욕의 유망한 젊은 화가들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기타를 든 여인 Woman with Guitar
문득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의 마음이 어쩌면 무척 쓸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등 때문입니다. 얼굴을 감추기 위해 등을 돌렸겠지만 등에도 표정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겠지요.
등을 들썩거리며 우는 모습이 정면으로 우는 모습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여인, 마음 속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폭풍을 달래는 것 아닐까요?
베크워드와 체이서가 설립 된지 얼만 안된 아트 스튜던트 리그 (ASL)로부터 교사로 초빙을 받은 것도
귀국하던 해의 일입니다. 두 사람은 선생님이 되었고 학생들에게는 아주 존경 받는 좋은 선생님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학생을 지도하는 와중에도 베크위드의 작품 활동은 계속되었습니다.
파리에 머물고 있던 1877년부터 귀국하고 난 한참 뒤인 1887년까지 바다 건너 파리의 살롱전에 4번이나
출품을 했다니까 살롱전에 대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던 것이죠.

생각을 놓치다 Lost in Thought / 1908 / 27.94cm x 36.83cm
등 뒤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가고 있습니다. 손에 뺨을 기대고 있는 것을 보면 여인의 상념이
한없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옅은 베일 속 여인의 얼굴은 점차 굳어지고 있습니다.
누렇게 익어 가는 벌판을 보면, 때는 가을이겠지요. 가을 볕 내리는 벌판에 앉아 여인을 상념에 빠지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이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자리로 돌아 와야 하는 가을인데 --- 그렇게 어디선가 돌아 오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는 걸까요?
1887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베크위드는 베르타 홀과 결혼을 합니다. 그의 ‘’절친’인 서전트는 베네치아 풍경을
담은 수채화 한 점을 선물로 보내옵니다. 이 무렵 이후 베크위드는 많은 명예와 수상을 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잘 풀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도 그런 경우였을까요?

엄마와 아이 Mother and Child / c.1910 /122.56cm x 71.76cm
베크위드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기법의 작품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이 자세는
많은 화가들이 즐겨 다뤘던 장면입니다. 엄마의 시선은 아이에게로 향했지만 아이의 시선은 밖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되고 보니 이런 시선이 이해됩니다. 늘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지만 나이를 먹은
아이들의 시선은 자꾸 다른 곳으로 가더군요. 요즘은 반 강제로 4명 밖에 안 되는 식구지만, 일주일에 한 끼는
꼭 밥을 같이 먹고 있습니다. 그 순간만이라도 시선을 제게 향하게 만드는 것이죠.
베크위드의 수상 기록은 화려합니다. 1889년과 1890년의 파리 박람회, 1895년 아틀란트 박람회,
1899년 파리 세계 박람회와 1902년 찰스턴 박람회에 이르기 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가 확실했습니다.
1893년, 베크위드는 파리에서의 벽화 때문에 다시 파리로 건너 가지만 그 해 늦게 다시 미국의 벽화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바쁘게 대서양을 넘나 드는 그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뉴 함부르그 가든 New Hamburg Garden / c.1910 / 40.64cm x 38.1cm
잘 가꿔진 정원을 보면 마음마저 깨끗해집니다. 작업을 하는 사람이 일하는 자세로 봐서는 노인처럼 보입니다.
인생을 마무리 할 무렵의 나이가 되면 가지고 있는 인연들도 하나 둘씩 정리하고 혹시라도 떠나고 난 후
남을지 모르는 인생의 잡초들도 미리 뽑아 두어야겠지요. 정원을 가꾸는 노인의 몸에서, 곱고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에서
노년의 삶을 보게 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훗날 저도 저런 모습으로 내 삶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베크워드는 매년 국입 디자인 아카데미에 전시를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러 단체에 속해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그럴 수 도 있겠다 싶습니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풍경과 건물들을 외광파 기법으로 제작했는데,
작품에는 빛과 색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눈부신 햇빛은 참 대단하죠.

편지 The Letter / 1910 / 127cm x 87cm
하나의 편지를 두 사람이 읽고 있습니다.
물론 한 사람은 편지를 읽는 여인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여인 속에 숨어 있는 여인입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의 눈은 편지지 위의 글자를 따라 가고 있지만 거울 속의 또 다른 여인은 이미 상상 속에
있습니다. 창가에서 들어 오는 희미한 빛으로 편지를 읽는 것으로 봐서는 혹시 비밀이 담긴 것은 아닐까요?
요즘 편지에 대한 그림이 자주 눈에 밟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다시 편지를 써야 할까 봅니다.
가을인데,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면 되겠지요.
세상을 떠나기 전 베크위드는 2년 간 앓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센트럴 파크에 갔다가 택시를 타고 오는 도중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죠. 그러나 또 다른 기록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병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것인데, 저는 이 기록은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긴 분이 자살이라고요?
아니죠, 베크위드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