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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리예카4 - 트르사트성에서 시가지와 바다에 항구를 조망하다!
2026년 5월 20일 크로아티아 리예카의 아파트 (게스트 하우스) 에서 일어나 밥을 해서
먹고는 나와 오늘은 시내에 트르사트성으로 가야 하는지라....... 구글맵 지도를
보고 A4 용지에 손으로 그려온 시내 지도에 또 휴대폼 구글 지도를 켜서 들고 나섭니다.
번화가를 걸어서 동쪽으로 가서는 드디어 강이 나오는데 이제는 거리가 머릿속에
든 지도와 일치하는지라 안심을 하고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갑니다.
삼거리에 도착해 도로를 건너 계단을 30분간 무려 700개 넘게 걸어 올라서는 드디어 산복
도로가 보이는데 이제 트르사트성은 저만치 산 정상에 웅장하게 서 있는게 보입니다.
도로를 건너니 또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계단이라면
이제 신물이 나는지라 조금 둘러 가더래도 도로를 따라 가다가 7~8분
후에 오른쪽으로 난 가파를 계단을 올라가서는 트르사트 성으로 들어갑니다.
트르사트성 Trstaska Gradina(Trsat Castle) 은 타워에서 보는 시내 전망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고대에 트르사티카의 켈트인들은 도시 북쪽 언덕에 요새를 지었으니 중세시대에 그 위에
성을 쌓았고 19세기에 개축했으며.... 여름철 밤에는 성에서 콘서트와 연주회 등이 열린다고 합니다.
찬찬이 둘러보니 그런대로 유적과 유물들이 제법 보이는 데다가.... 더욱 산 정상에 자리한
성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리예카 시가지며 바다와 항구등 전망 하나는 탁월하며
그리고 오늘은 무더운 날씨인데도 여긴 산 정상인 때문에 바람까지 불어 오는게 좋습니다.
여기서 시름일랑 잊고 명상을 즐기기에는 그저 그만인데 아님 멍때리기를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여긴 켈트족이 거주하던 타르사티카 (Tharsatica) 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제국이 재건하면서 플루멘 (Flumen) 이라는 라틴어 지명을 붙였습니다.
동서로마의 분열 당시 서로마 제국에 속했으며,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고트족,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족,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았고 7세기 무렵 크로아티아인
들이 이곳을 성 비투스의 강 (Rika svetoga Vida)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정착합니다.
799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크로아티아 공국은 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는데...... 925년부터 중세 크로아티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1102년부터 크로아티아 왕국이 헝가리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며 헝가리 영토가 됩니다.
그러나 아르파드 왕조 말기에 헝가리 왕국이 붕괴 직전까지 몰린데다가 트란실바니아 개척을 위해 독일인을
헝가리로 많이 불러들인 여파로 리예카 일대는 신성 로마 제국과 가까운 특성상 독일계 귀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특히 발제 (Walsee) 가문은 1300년부터 1466년까지 리예카의 영주 노릇을 합니다.
1466년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매입해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속하게 되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09~1813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18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탈리아 전쟁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급습해 도시를 황폐화시켰으나 곧 회복했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수차례 공격에도 견뎌냈습니다.
16세기 중후반 부터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들어섰고 1719년에
카를 6세는 트리에스테와 더불어 리예카를 자유도시로 선언했으며 1725년
에는 빈에서 라이바흐를 거쳐 트리에스테와 리예카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건설됩니다.
1779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항구가 없던 헝가리를 위해 헝가리에 넘겨준 이후로는 헝가리 왕국에 속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잠시 일리리아 주 (Provinces illyriennes) 에 속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곧 회복했고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기지와 해군 사관학교가 들어서면서 해군 거점도시로 발전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엽에 들어 헝가리의 유일한 무역항이라는 입지에 힘입어 더더욱 발전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었고 이탈리아인이 많이 거주하는 점을
노린 이탈리아 왕국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흡수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분쟁 지역이 됩니다.
1920년 라팔로 조약이 체결되어 피우메 자유국으로 독립 공화국이 들어섰으나... 1922년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이끄는 민병대가 피우메 자유국을 점령해 이탈리아인이 도시를 장악했고.... 1924년
이탈리아 왕국군에 의해 피우메 자유국은 해체되고 로마조약으로 도시 대부분을 이탈리아가 차지합니다.
단지 북부의 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화자가 많은 지역은 유고슬라비아로 귀속되니 이탈리아에서는
리예카를 피우메로,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수샤크 (Sušak) 로 불렀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는
이탈리아 왕국군과 유고슬라비아군의 격전지가 되었고 전후 완전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영토가 됩니다.
리예카 서북쪽에 이스트라 반도에는 고대에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인들이 포도를
들여와 심었으니 유럽의 애호가들에게 잘 알려진 와인의 산지라고 합니다.
크로아티아의 주황색 지붕 기와 재료가 되는 붉은 흙 Terra Rossa 는 포도재배에 이상적
이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많이 재배 되는 체리향이 나는 적포도 진판델
Zinfandel 의 고향이며.... 여름에는 북쪽 도시 모토분에서는 모토분 영화제가 열립니다,
김랑씨는 크로아티아 블루란느 책에서 모토분에서 지내며 여인에게서 받았는 종이 쪽지에 적힌 폴
베를렌느 Paul Verlaine 의 시 를 적었으니... "거리에서 비개 내리듯 내 마음에 눈물이 내리네“
크로아티아 Crotia 는 1992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으며 현지인들은 크로웨이샤라 발음하는데 그보다
흐르바쯔까 Hrvatska 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것은....우리나라 사람들도 외국인들이“코리아” 라고
부르기 보다 “대한민국” 이라 불러주면 좋아하는 것이나 마찬 가지이고 인구 470만명에 가톨릭을 믿습니다.
1988 월드컵에서 3위를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92년작
“붉은 돼지 紅 の 豚 ” 는 크로아티아 바다 아드리아해 달마시아 해변이 무대입니다.
크로아티아 회화를 보자면.... 인사말 아침 도브로 유트로, 저녁 도브로 베체르, 감사 인사말 흐발라
Hvala! , 얼마? 뽀슈토 예 오보?, 실례합니다 오프로스티테, 예 다, 아니오 네,
화장실 자호디, 출발 오들라자크 - 돌라자크, 둘 드바, 버스 아우토부스니 콜로드보르 등 입니다.
중세에 요새 위에 성을 지었고 19세기에 개축했으며 여름 밤에는 콘서트 연주 및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데 성에서 리야카시내와 크바르네르만의 모습이 보입니다.
동아일보 이진영 논설위원은 ‘황설수설’ 칼럼에 쓴 “독서교육 집중 학년” 이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성공한 창업가들은 대개 책벌레들이다. 일론 머스크는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하루 10시간씩 독서에 몰두했다. 9세 땐 브리태니커 같은 백과사전류 두 세트를 정독했다고 한다.
독서에 대해 말하자면.... 젠슨 황은 하루도 읽기를 거르지 않았다는데 그의 자서전
작가는 “비범한 사업 전략은 모두 지독한 독서에서 나온 것” 이라고 썼으며,
하루 600∼1000쪽을 읽는 워런 버핏은 “지식은 복리 (複利) 와 같이 쌓인다”고 했다.
독서에도 ‘마태 효과’, 즉 빈익빈 부익부 법칙이 적용되니..... 어릴 적부터 많이 읽은 아이
들이 문해력이 빠르게 발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교과 지식을 쉽게 습득하는
반면에 독서량이 부족하면 갈수록 배움에 흥미를 잃고 ‘국포자’ ‘수포자’ ‘영포자’ 가 됩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가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학업 성취도 평가 (PISA) 에선
자발적 독서 (reading for pleasure) 량이 많을수록 읽기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
성적도 높게 나오며 독서량은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보다 성적에 더 큰 영향을 주는 변수입니다.
얼마나 읽으면 될까. 미국의 9∼11세 1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2023년)
에서는 자발적 독서 시간이 길수록 지능지수, 언어능력, 학업 성적이
높았고, 주의력 결핍이나 스트레스 같은 정신 질환 발생률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독서 시간이 일주일에 12시간을 넘어가면 이 같은 증감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사회적
교류, 수면, 운동 같은 다른 중요한 활동에 할애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한국 성인의 하루 평균 독서 시간은 8분, 초중고교생은 70분으로.... 국영수 기초학력 미달
학생 비율이 늘고 있는데 문해력 저하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니 PISA에선 한국
학생들의 사실과 의견 식별 능력이 OECD 회원국 평균을 한참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급 문해력이 떨어져 왜곡된 정보에 취약하다는 뜻인데..... 교육부가 2일 ‘매일 아침 10분 책
읽기 운동’ 을 펼치고, 초 3·4학년과 중1, 고1을 독서교육 집중 학년으로
지정해 읽기, 토론, 글쓰기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의 독서교육 활성화 대책을 발표한 배경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베스트셀러 ‘시적 정의’ 에서 독서, 특히 문학을 읽는 것은
타인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그를 나와 같은 인간적 품격과 취약성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공감적 참여’이며, 이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고 했습니다.
자극적 디지털 콘텐츠로 물렁해진 지적 근력뿐만 아니라 공감 근육을 키우는
데도 책 읽기는 필수라는 뜻인데... 요즘 학생들의 말과 행동이 거칠어진
배경에도 배움의 근본인 읽기의 소홀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여기 트르사트 성은 리예카의 동쪽으로 트르사트 구역이라고 하는데, 합스부르크 제국 시기에
오스만 제국에 맞섰던 크로아티아의 귀족 가문인 프랑코판 가문의 사람들이 다수 묻힌
트르사트 성모 교회가 있으며..... 리예카는 또 크로아티아 해양 박물관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김소민 기자가 신문에 쓴 “자본주의 최정상서 자연으로 하산하다”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아웃도어 ‘노스페이스’ 창립자… 등산용품 가게로 첫 사업 시작
의류 브랜드로 정상 찍었지만… 패션 사업의 ‘환경 파괴’ 자각, 막대한 지분
정리하고 토지 구매….. 남미 파타고니아에 국립공원 조성이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다른 산을 오르기로 했다 (조너선 프랭클린 지음·강동혁 옮김)” 는 책은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 창립자인 더글러스 톰킨스의 전기다. 기업가
에서 환경운동가 까지, 성공과 모순으로 가득 찬 한 인간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세계적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 창립자 더글러스 톰킨스(1943∼2015). 신간은 미국 탐사
저널리스트가 그와 관련된 인물 160여 명을 인터뷰하고 미공개 자료 등을 찾아 톰킨스의
삶을 재구성한 전기다. 단순히 영웅담으로 치켜세우기 보다, 그를 둘러싼 논란까지 함께 복원해 낸다.
스물한 살, 톰킨스는 미 샌프란시스코의 술집과 스트립 바 사이에 허름한 등산용품 가게를
열고 ‘노스페이스’ 란 이름을 붙였다. 이름의 의미를 묻는 질문엔 이렇게 답했다.
“(산의) 남쪽 면 (south face) 은 사람들이 자주 올라다녀서 눈이 더 부드럽고 햇빛
때문에 더 따뜻하거든요. 난 어려운 면이 더 좋아요. 거칠고 얼어붙은
면요. 노스페이스가 더 까다로운 도전 과제죠. 난 인생에서도 바로 그 길을 택합니다.”
이 이름이야말로 톰킨스의 삶을 압축하는 표현이었다. 가족이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망치지 못하도록 나무에 묶어둘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
였다. 여덟 살엔 스스로 키운 닭의 달걀을 팔며 일찌감치 장사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고교시절 암벽 등반을 함께한 평생지기를 만난 건 그의 인생에 엄청난 전기가 된다. 바로 ‘파타고니아’
의 창립자인 이본 슈이나드였다. 두 사람은 ‘산에 미친 괴짜’였다. 톰킨스는 아웃도어 시장이
활황일 때 돌연 노스페이스를 매각하고, 슈이나드 등 친구들과 함께 피츠로이산 등반에 나서기도 했다.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지만, 여정이 몇 달이나 걸렸는데 집에는 연락을 안 해 가족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톰킨스 부인이 슈이나드 부인에게 실종된 배우자들을 찾자고 SOS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톰킨스는 결혼생활 내내 그랬다. 1년에 4개월, 길게는 6개월씩 사라지곤 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남편도, 아버지도, 경영자도 아니었다.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외면했다. 개척자인 동시에, 백미러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톰킨스는 또 다른 의류 브랜드 ‘에스프리’를 창립해 다시 한번 획기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의류 사업을 수천 개의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놓고 경쟁하는 치열한
분야로 인식했다. 패션은 석 달마다 바뀌었고, 그만큼 ‘추측’을 사업의 일부로 여겼다.
다가올 유행을 예측해 패턴을 찍어내고 재고를 채워뒀다. 유행이 적중하는 순간, 수익은 폭발적
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세가 확장되며 잡음도 적지 않았다. 비용도 크게 불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생산을 이어갈 경우 수익률이 낮아지자 제조시설을 미국 밖 아시아로 옮겼다.
노동자들은 해외 이전에 반발해 시위를 벌였고, 점진적 이전으로 요구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톰킨스는 깡그리 무시했다. 노조는 그의 얼굴이 담긴 지명수배 포스터를 샌프란시스코
전역에 붙였고..... 1976년에는 본사 옥상에 휘발유를 뿌려 건물이 무너지는 사건도 벌어졌다.
사업가 이후의 삶도 평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이 일군 패션 산업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막대한 지분을 정리하고
남미 파타고니아로 훌쩍 떠났다. 기업가에서 환경운동가로의 갑작스러운 전환.
그곳에서 톰킨스는 광대한 토지를 사들여 국립공원으로 조성하고, 이를 국가에 기증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후 완성된 ‘공원의 길’ 은 인류 역사상 한 개인이 국가에 기부한 토지로 최대 규모였다.
이 책은 톰킨스의 생애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의 생애가
얼마나 모순적인 이야기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긍정과 부정, 성공과 파괴를 가로지르는 서사가 가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