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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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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이태리 여행 ② :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피렌체의 두오모와 시뇨리아광장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197 16.11.14 06: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두바이, 스위스, 이탈리아

 

여행일 : ‘16. 3. 12() - 20()

일 정 :

3.13() : 두바이

3.14() : 스위스(루체른)

3.15()-19() : 이탈리아(밀라노,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베니스, 볼로냐)

 

여행 셋째 날 : 이탈리아의 피렌체(Firenze)

 

특징 :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이다.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인데 꽃 같은 도시라는 의미란다. ‘로마의 딸이라 불리었던 고대 로마의 도시 때부터 교통, 무역의 요충지이며 특히 중세 이탈리아 도시들의 번영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탈리아 뿐 아니라 전 유럽의 금융업, 직물업의 중심지로서 풍성한 번영을 누렸다. 12세기 이래 공화국으로 교황파에 속했고, 14세기의 페스트 대유행 후 은행가들의 활약으로 서서히 부를 축척해 갔으며 15세기에는 메디치(Medici)가의 지배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번영의 절정에 서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말 메디치가의 몰락, 프랑스군 침입, 사보나롤라의 신성정치, 경제적지반의 붕괴 등에 의해서 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주의적 르네상스 문화는 쇠퇴하였다. 현재 이 도시는 관광업이 경제활동의 주요 기반을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시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공화국정 청사가 있었던 팔라초 베키오(13세기 착공)와 이 도시의 정신적 중심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1296~1461), 대성당 부속의 산 조반니 세례당(11세기 창건, 안드레아 피사노 및 기베르티의 문짝 장식), 종탑(지오토 설계), 산 미니아트 알 몬테 성(로마네스크 양식), 산타 크로체 성당(지오토의 벽화), 산타 · 마리아 · 노벨라 성당(마사치오의 벽화),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마조리노 및 마시치오의 벽화), 산 로렌초 성당(브루넬레스키 개축, 메디치 예배당,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산 마르코 수도원(프라 안젤리코의 벽화 · 판화) 등이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아침 일찍 밀라노를 출발한 버스는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피렌체에 도착한다. 그리곤 꼬불꼬불 길을 누비고 다니더니 작은 언덕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미켈란젤로 언덕(Piazzale Michelangelo)’이라는데, 피렌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고 보면 된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피렌체 시가지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언덕은 널따란 광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란다. 광장의 한가운데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만들었다는 다비드(David) 이다. 하지만 이 동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이곳 피렌체에 있는 아케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로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최고의 걸작으로 골리앗을 이긴 용감한 다비드를 모델로 삼았다. 매끈한 얼굴, 온몸에 힘을 준 긴장된 근육, 팔목의 심줄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면 피렌체의 눈부신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붉은 지붕으로 가득한 피렌체 시가지와 그 중앙에 우뚝 자리한 평온하고도 고요한 두오모 성당. 그리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Fiume Arno)’. 이 모든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한눈에 쏙 들어온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게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 멀리 아르노강(Fiume Arno)의 가장 좁은 곳에다 세웠다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 이탈리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가 보인다. 1345년에 건설된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원래 이 자리에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홍수로 휩쓸려가자 새로 건설한 것이란다. 다리 위에 가게로 쓰이는 건물이 만들어져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원래는 푸줏간 가게가 있었으나, 지금은 보석상, 미술품 거래상과 선물 판매소가 들어서 있다. 이 다리는 아르노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기에 좋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세기의 연인인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났던 장소로 알려지면서 더욱 입소문을 탔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이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다리와 주변에는 자물쇠가 많이 채워져 있다. 사랑의 징표인 자물쇠를 열쇠로 채우고, 열쇠를 강에 던져 버리는 연인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능선을 따라 쌓은 옛 성벽까지도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저 그림에다 저녁노을을 색칠해보면 어떨까. 그야말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괴이하게 생긴 소나무들이 눈에 띈다. 언젠가 청도(경북)에 있는 통내산(筒內山, 674.4m)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소나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천연기념물(295)로 까지 지정되어 있는 그 처진소나무(Weeping Japanese Redpine , 柳松)’말이다. 저렇게 생긴 소나무를 이탈리아에서는 우산소나무(Pinolo, 영어로는 Stone Pine 또는 umbrella pine)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가로수로까지 심을 정도로 이탈리아 전역에 산재해 있단다. 미끈하게 큰 줄기의 끝에 가지와 솔잎이 우산처럼 펼쳐진 모양이 예쁘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들이 작품 소재로 쓸 정도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나무라고 보면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프랑스의 화가 장 자크 에네(Jean Jacques Henner)가 그린 우산 소나무가 있는 이탈리아의 풍경(Paysage d'Italie. Pins parasols)’을 들 수 있다. 현재 아비뇽 프티팔레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젠 시가지 투어를 시작할 차례이다. 하지만 버스는 시가지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외곽에다 우릴 내려놓는다. 성곽의 망루를 닮은 건축물 옆이다. 아마 대형버스의 시가지 출입을 통제하고 있나 보다. 하긴 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피렌체(Firenze)는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다.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과 금융 그리고 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당시의 흔적들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평범하게 생긴 건물들까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선입견이라는 게 중요하긴 중요한 모양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직사각형의 널따란 광장을 만난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산타크로체 광장(Santa Croce Piazza)이란다.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관광객들이 대부분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나온 사람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산책삼아 나온 피렌체 시민들인 모양이다. 그만큼 주민들에게는 친숙한 장소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선지 광장 주변의 좁은 골목길에는 잡화를 파는 상점들이 많다. 가죽제품들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가벼운 마음으로 소품 하나 구입해도 좋을 것 같다.



광장의 한쪽에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이 있다. 1295아르놀포 디 캄피오 (Arnolfo di Cambio)’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당으로 건축한 피렌체 고딕 양식의 걸작이다. ‘산타 크로체성스러운 십자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성당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인 타우 십자가T자 형태로 건축되었다. 성당 내에는 많은 예술품들이 있다. 특히 지오토(Giotto di Bondone)와 그의 제자인 타데오 가디(Tadeo Gaddi)가 만든 14세기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바르디 예배당에 그려진 이 프레스코화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일생을 묘사한 것으로, 서양 회화 최초로 밤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성당에는 치마부에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도 있는데, 이 작품은 1966년에 있었던 홍수로 크게 손상이 되었지만, 이 성당에 보관된 작품들 중에서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 밖에도 도나텔로(Donatello)성 수태 고지등의 걸작들을 이 성당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성당 내에 있는 유명인의 무덤들 때문이다.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로시니 등의 무덤이 있고 시신(屍身)이 없는 단테의 가묘(假墓)도 있다. 생애 마지막에 추방을 당한 그가 라벤나에서 객사했기 때문이란다. 시신을 돌려달라고 라벤나에게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라벤나가 끝까지 거부하고 있어 아직까지도 라벤나에 묻혀 있단다. 그래서 성당 앞에 단테의 동상(銅像)을 세워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찾을 길 없는 시신을 대신해서 말이다.



다음 방문지는 피렌체 두오모(Firenze Duomo)’이다. 두오모까지 가려면 다리품을 꽤나 팔아야만 한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눈에 띄는 건물들마다 그 생김새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길가에 이탈리아의 국기가 걸려있는 건물들도 보인다. 공적(公的)인 건물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가는 방향에 바르젤로 미술관(Museo Nazionale del Bargello)’인류박물관이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 건물들일지도 모르겠다.




얼마쯤 걸었을까 하얀색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난다. 옆에다 네모로 각진 말뚝을 닮은 높다란 탑()까지 거느리고 있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대성당, ‘피렌체 두오모(Firenze Duomo)’이다.



두오모(Firenze Duomo)’는 피렌체에서 가장 높이가 큰 건축물이자,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큰 성당이란다. 특히, 하얀색, 핑크색, 녹색의 대리석이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 이름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Santa Maria del Fiore)’이다. 성당의 건축은 1296년 시작되어 1371년 본당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돔([dome)은 르네상스 건축의 선구자인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에 의해 1437년에야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아무런 철근이나 콘크리트의 도움 없이 벽돌만으로 돔을 쌓아 올렸다. 돔의 내부에는 바사리(Giorgio Vasari)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으며, 돔의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어 463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멋진 피렌체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대성당 옆으로 82m 높이의 조토의 종탑이 보인다. 대성당과 같은 재질, 그리고 같은 기법으로 쌓아올린 건축물인데 사각 기둥 모양의 외형을 갖고 있다. 414개의 계단을 통해 위로 오르면 피렌체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고 한다. 또한 두오모 성당의 '돔 지붕'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하지만 올라가보는 것은 사양한다. 10유로의 티켓 값이 아까워서만은 아니다. 아까 미켈란젤로의 언덕에서 보았던 풍경보다 나을 것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탑은 조토(Giotto, di Bondone : 12661337)가 제작을 시작(1334)하여 그가 죽은 후, 제자 안드레아 피사노가 완성(1359)했다. 지어질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고 한다.




피렌체 두오모는 어제 보았던 밀라노 두오모와는 많이 다르다. ()을 만나겠다면서 끝없이 하늘을 찌르는 날카로운 뾰족 첨탑(尖塔)이 아니고 팔각형의 짙은 분홍색 지붕에 하얀 대리석 띠를 두른 모습인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란다.



두오모의 파사드(Fa?ade)1587년에 무너져 버려서 현재의 정문은 1887년도 작품이다. 하지만 원래의 흔적을 따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여인의 아름다운 란제리 레이스 자락 같은 장식들은 옷감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밀가루로 빚어놓은 것도 아니다. 딱딱하고 무거운 대리석을 일일이 조각해 만든 것이란다. 참고로 원래의 장식들이 궁금하다면 두오모 박물관에 가볼 일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도나텔로의 마다레나그리고 베로키오, 미켈로초, 폴라이올로가 세운 제단 등도 볼 겸해서 말이다.



유명한 관광지에 빠질 수 없는 것들이 몇몇 있다. 그중에서도 기념품 좌판대와 거리의 화가들은 어딜 가나 눈에 띈다. 이곳이라고 해서 그들이 없을 리가 없다. 아니 다른 곳들보다 더 많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오모를 마주하고 있는 건물도 눈길을 끈다. 고대 로마의 신전 터에 5세기에서 11세기 무렵에 지어진 산 조반니(Battistero di San Giovann) 세례당이다. 두오모와 마찬가지로 하얀색인데,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 조반니에게 바치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란다. 두오모처럼 대리석이 사용되었으며 서쪽을 제외하고 총 3개의 문이 있다.



예배당은 신곡의 작가 단테가 세례를 받은 곳이라고 해서 입소문을 탔다. 하지만 그보다는 동쪽으로 난 문()이 더욱 유명하다. 세례 요한의 일생을 그린 남문, 즉 주된 출입문을 제켜버릴 정도로 뛰어난 기법으로 제작된 이 문은 로렌초 기베르티라는 건축가의 작품이란다. 구약을 배경으로 만든 이 문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웠던지 그에 반한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까지 극찬했다니 더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소문 탓인지 문의 앞은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가까이 다가가보기도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현재의 작품은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라니 참조하자.




두오모는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돔, 죠토의 종탑이 한 세트이다. 건축물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것이다. 위아래로 고개를 끄떡거리다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좌우로 돌려야만 한꺼번에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크다. 덕분에 여백의 미는 보여주지 못한다. 이 건물들은 아르놀포 디 깜비오가 설계하고 감독했다. 하지만 꼭대기의 붉은 돔은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다. 지면에서부터 돔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106미터이다. 참고로 이 위대한 건축물은 예우를 깍듯이 받고 있다고 한다. 이보다 더 높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오모를 다 둘러봤다면 이젠 단테 생가로 갈 차례이다. 성당에서 벗어나 좁디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데 이색적인 풍경들이 눈에 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골목을 향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건물들이다. 아래는 골목이 분명하건만 위는 건물로 변해있는 것이다. 대지가 넉넉하지 않은 고장에서 사람이 살아갈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문제점도 있을 것 같다. 공용공간을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 같아서이다.



잠시 후 단테의 생가(Casa di Dante)’에 이른다. 원래 단테(Dante)가 살던 집은 없어졌지만, 피렌체 시가 단테가 살았던 위치의 건물을 사들여 단테 기념관으로 지은 것이란다. 단테는 12655월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드란데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후에 단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기념관은 단테 탄생 700주년이었던 1965년 처음 문을 열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는데, 일곱 개의 방에 걸쳐 단테의 침실과 서재, 그리고 그의 행적을 시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단테의 신곡전편을 인쇄한 것을 계단 벽에 걸어 두었다. 보티첼리가 그린 신곡의 삽화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단테는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 부흥의 선구자로 불릴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 또한 그의 명작인 신곡은 후일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세계를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리고 라벤나에서 죽었다.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름 값을 피렌체에서 지불한단다. 그를 내쫓은 속죄의 의미라는 것이다. 매년 9월 둘째 일요일마다 이 기름을 옮기는 의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사랑이야기도 끄집어내 보자. 단테는 9살 때 1살 아래인 베아트리체를 베키오 다리에서 만난다. 아름다운 소녀를 본 단테는 이때부터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과 찬미의 마음을 간직한다. 그리고 9년 후 우연하게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서 만난 그녀와 다시 이야기를 나눈다. 단테가 그녀의 정중한 인사에 지극한 행복을 느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곧 자신의 가문에 걸 맞는 바르디 가문의 시모네에게 시집을 갔고 24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그렇다고 단테가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를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리가 없다. 24살의 나이로 요절한 그녀를 그의 작품 신곡으로 옮겨 온 것이다. 참고로 베아트리체의 집은 단테의 집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단테 기념관 앞의 작은 광장 바닥에는 단테의 흉상(胸像)이 있다. 이 흉상을 밟으면 행운이 온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기념관 앞의 바닥을 뚫어져라 뒤진다. 그냥 보면 단테의 흉상이 보이지 않고 물을 뿌려야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가이드 투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떠난 뒤 물기가 있는 곳에서 흉상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한다. 또 다시 좁은 골목길을 걷는다. 그리고 또 다른 대지 활용법을 구경하게 된다. 아까는 베란다 형식으로 공용면적을 침범했었는데, 이번에는 두 건물을 아예 연결시켜버렸다.



드디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을 만난다. 중세 이후 지금까지 피렌체 행정의 중심지이다. 지금도 시청사로 사용되고 있는 베키오 궁전과 르네상스 시대 유명 예술인들의 조각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옥외 미술관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l Lanzi)’가 있다. 가까운 거리에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회화 걸작들을 모아 놓은 우피치 미술관과 아까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폰테 베키오가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피렌체 정치의 중심이 되는 광장이다. 공화정 시대에 피렌체 시민들은 이 광장에 모여 토론을 하고, 거수투표도 하면서 공공 모임에 참여하였다. 광장 중앙에는 넵튠의 분수가 있고, 분수 옆에는 지암볼로냐(Giambologna)가 만든 코시모 1( Cosimo I de' Medici, 1519.6.12.~1574.4.21)’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의 주인인 코시모 1세는 토스카나 지역을 통치하던 인물이다.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최고의 가문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넵튠의 분수(Fountain of Netpune)’이다. 넵튠(Neptune)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을 뜻한다. 그리스에 살던 바다의 신이 로마로 이민(移民)을 오면서 개명(改名)을 했다보다. 하여튼 이 작품은 물의 요정에 둘러싸인 넵튠을 묘사하고 있다. 암만나티(Bartolomeo Ammannati)1575년 작품인데, 토스카나 해군이 승리한 피렌체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란다.



분수 근처에 청동으로 된 둥근 바닥돌이 깔려 있는 곳은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화형에 처해진 장소다. 사보나롤라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자이며, 종교 개혁에 앞장섰기 때문에 반감을 사서 다른 도미니크회 성직자 2명과 함께 화형에 처해졌다.



궁전의 테라스에는 르네상스 시대 조각 걸작이 전시되어 있다. ‘도나텔로(Donatello : 본명은 Donato di Niccol? di Betto Bardi)’유딧과 홀로페르네스(Judith and Holofernes), 미켈란젤로의 다비드(David)의 복제품(원래 이곳에 있던 진짜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지금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음), 바초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코스(Hercules and Cacu)’ 등이다. ‘이라는 뜻의 피렌체라는 이름처럼 르네상스(renaissance)가 활짝 꽃피었던 도시이기에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싶다.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옛날 건물, 혹은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의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이다. 높은 창문과 돌출된 발코니가 마치 요새 같은 느낌을 준다. 1294년에 지어졌고 나중에 부온탈렌티(Bernardo Buontalenti)’와 바자리(Giorgio Vasari)에 의해 확장 건설되었다. 처음 만들 때는 요새로 만들어졌지만 1540년에 메디치 가문이 이 궁전에 들어와 10년 정도 이곳에 머물다가 피티 궁전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사람들이 새 건물을 누오보, 옛 건물을 베키오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시청사(市廳舍)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정원이 유명하며, 500인의 방(Salone Cinquecento)과 시뇨리아의 방(Cappela della Signoria), 우디엔자의 방(Sala dell’Udienza)에는 많은 미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날짜별로 달리 개관(유료)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어야 미술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





베키오 궁전의 맞은편에는 로지아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가 있다. 그러니까 광장의 오른편에 있는 작은 회랑(回廊)이다. 이곳은 14세기 말 코시모 1세에 의해 비가 오는 날의 집회 장소로 세워진 것인데, 지금은 예술 작품들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야외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메두사(Medusa)의 목을 왼손에 높이 쳐들고 있는 첼리니(Benvenuto Cellini)페르세우스’, 그리고 지암볼로냐(Giambologna)사비네 여자들의 겁탈등을 들 수 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야단스럽게 세 사람이 뒤엉켜 격하게 움직이고 있는 비정형의 곡선형태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광장에는 마차들도 보인다. 마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라는 모양이다. 마차를 타고 고풍스런 건물들 사이를 누비면서 영화로웠던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것 또한 여행의 낭만일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죠반니 디 비치 메디치Giovanni di Bicci Medici)’는 은행가였다. 정치적으로 수완이 좋은 그의 아들 코지모(Cosimo I de' Medici)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으며, 로렌초(Lorenzo de' Medici)는 많은 지식인들을 돌봐 주었다. 이때 활동한 작가가 단테, 지오토,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다. 그 이후에도 계속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이 장악했는데 이때 활동한 예술가로는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베아토, 안젤리코, 필리페, 리피,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등이 있다.



광장을 다 둘러봤다면 이젠 피렌체를 떠나야할 시간이다. 오늘 저녁에 머물 숙소가 로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로마에서도 1시간을 더 들어가야만 한다. 가격이 저렴한 호텔을 잡다보니 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로마로 가려면 아까 버스에서 내렸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다. 먼저 단테의 생가 쪽으로 잠시 걷다가 산타 크로체 광장으로 방향을 틀면 된다. 돌아가는 길 역시 미로(迷路) 같은 골목길의 연속이다. 하지만 눈요깃거리도 있다. 예쁘장한 가죽제품들을 전시한 매장들이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브랜드도 종종 눈에 띈다. 이곳도 역시 가죽산업이 활발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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