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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묵상글 (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 그치지 말라고 다그치시는 주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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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치지 말라고 다그치시는 주님
원래 마르타 축일이었던 것이 2021년부터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삼 남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왜 마르타의 축일이 삼 남매의 축일로 바뀌었는지
교황청 경신 성사성의 이유를 듣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북돋우고,
믿음이 믿음을 북돋우며,
성덕이 성덕을 북돋운 좋은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 남매는 서로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북돋우고 그래서
서로 성덕도 북돋워 서로 성인이 되게 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삼 남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서로 그러했고,
클라라의 자매들도 서로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불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불씨와 하나의 불꽃은 약한 바람에도 꺼지지만
작은 불씨와 불꽃이라도 여럿이 모이면 큰불이 되어
바람이 오히려 불꽃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커지게 한
또 다른 요소가 바로 라자로의 죽음입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을 통해서 큰 믿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는데
늦게 오심으로 인해 죽게 되었어도 마르타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고,
주님의 능력 곧 죽은 자기 오빠도 살릴 수 있는 주님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 것은 아무리 죽을병이라도 주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것과
주님의 청을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앎은 머리로 안 것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그가 한 경험으로 안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그동안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을 그라고 모를 리 없지요.
그러니까 알기에 의심치 않는 정도의 믿음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믿으라고 다그치십니다.
그치지 말라는 것이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까?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믿으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마르타는 주님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란 말이 있지요.
백 척이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 서서 한 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백천간두에 서 있는 것만도 위태로운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라니 죽으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야 진일보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거는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믿음이 한 걸음 올라선 마르타와 가족을 보고 본보기 삼는 우리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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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6)
오늘 우리는 성녀 마르타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기념하며, <복음>을 통해, 부활의 믿음에 대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것은 “나는 안다”에서, “나는 믿는다.”에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에게 찾아오십니다. 마르타가 집밖으로 뛰쳐나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이 인사말에는 예수님께 대한 마르타의 원망과 섭섭함이 묻어납니다. 마치 오빠가 죽은 이유가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럴 법도 할 것입니다. 임종 때에도, 장례식 때에도 오시지 않고 사흘이 지나서 이제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섭섭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께 대한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하느님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그러나 그분의 권능을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압니다.”(οιδα)라고 고백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πιστιω)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하고, 또 다시 “압니다.”라고 고백할 뿐, 여전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과 생명을 너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믿을 때라야, 그 믿음 안에서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과 생명은 믿는 이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은 그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이미 소유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육체적인 죽음을 겪을지라도, 그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마침내 마르타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그렇게 하여, 마르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에 대한 확증을 일깨워줍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주님!
오늘 저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고 믿습니다.”
하오니, 오늘 제가 당신의 생명(부활)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 제가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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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꼭 말을 해야 하느냐?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이심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일(루카10,40)에 있어서도 그랬고, 오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하며 오빠를 굳이 낫게 해 달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개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부활이 현재 사건이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줍니다. 또한 믿음 안에 있는 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오늘로부터 생명을 누리는 것이요, 지금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고백함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의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에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입술에 익숙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 오히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히브11,6)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실천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루치아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명예이며 또 하느님께 받은 최대의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만큼 사랑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고백은 말로나 혀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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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강물이 어는 겨울에도 어느 한 곳에는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공기가 통하고, 그래야 물고기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가 있었고, 유신헌법이 있었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공권력을 피해서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인권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에 숨구멍과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명동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학생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힘없던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오던 곳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학생들을 잡아가려거든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뒤에는 사제들이 있고,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숨구멍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에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 하셨을 때 기도해 주시던 수녀님들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수녀님과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존경받는 이 시대의 어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께도 ‘숨구멍’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숨구멍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니코데모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도 예수님께는 ‘숨구멍’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 구원사업의 협력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도 예수님께 ‘숨구멍’같은 사람들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늦은 밤에도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남들이 혹 저를 비난할 지라도 어머니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저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머든지 미리 해야 하는 업무 스타일이기에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저를 도와주었기에 맡겨진 일들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뒤에서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의를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고, 간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창고 정리를 해 주시고, 음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한국 신부님들도 제게는 ‘숨구멍’같은 분들입니다. 제가 뉴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함께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의 패러다임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숨구멍’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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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은 늘 대조적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타는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그냥 집에 있었다는 말이 조금은 무례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기억하시나요? 이전에 주님께서 마르타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마리아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방문하신 이때는 마르타는 손님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와 참으로 비슷합니다. 마르타는 동적이고 마리아는 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타와 마리아는 기도의 양쪽 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능동적인 기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마리아는 수동적인 기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능동적 기도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주님께 능동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 대부분의 모습이 마르타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수동적인 기도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내용을 그저 침묵 안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능동과 수동의 합으로 완성됩니다.
우리 안에 쌓여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으세요. 말하고 싶은 것을 토해놓듯 주님께 내어놓으세요. 그리고 들어보세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지요.
신앙생활이란
신앙생활이란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삐쭉삐쭉 송곳 같은 우리 마음이
둥굴둥굴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부드러워지면
아주 부드럽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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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옛날, 어느 마을에 벼농사를 짓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짓는 벼농사가 옆집 농사보다 안 되고 있음을 눈으로도 쉽게 구분할 수 있었지요. 벼의 크기 자체가 옆집과 비교할 때, 너무 작고 보잘것없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정성을 다해 농사를 지었는데도 다른 집의 농사보다 부족했으니 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의 경험 부족을 놀릴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들 몰래 밤마다 나가 자기 집 벼를 살짝살짝 위로 뽑아 올린 것입니다.
아침에 자기 집 벼를 보면 이제 흐뭇해졌습니다. 옆집보다도 훨씬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왔습니다. 이 청년의 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수수 한 번에 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잔머리로 흥한 자, 잔머리로 망한다.”
실제 우리 말 속담에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사람은 노력이 없기에 쉽게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선 벼처럼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잔머리로 될 것이 아닙니다.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특히 사랑의 길에 충실할 때 주님께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편하고 쉬운 넓은 길이 아닌, 불편하고 어려운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렬히 환대하였지요. 특히 마르타는 정성껏 시중을 들었고 마리아는 주님 말씀을 경건하게 들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마라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마지막 표징이면서, 당신의 부활을 예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마르타와의 대화를 통해서 부활에 관한 당신 생각과 자기 신원을 확실하게 드러내십니다.
이 대화를 통해 마르타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관계에 있었으니 미리 오셔서 라자로를 고쳐 주신다면 슬픔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예수님께 실망하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실망하지 않고 또 원망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과 원망으로 일관된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잔머리에서 벗어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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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가 있어야 열매가 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도 있다(MC 유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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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환대와 섬김의 사랑-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1.6)
오늘 화답송 시편 34장이 참 은혜롭습니다. 화답송 시편 처럼 주님 찬미의 맛으로, 기쁨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입니다. 아마도 최고의 미완의 예술작품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일 것입니다. 늘 부족한 공동체 삶에도 강론에 참 많이 주제로 사용했던 공동체 영성입니다. 삶은 여정임을 확인할 때 앞에 반드시 “더불어(together)”를 붙여 더불어의 여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공동체의 중요성일 것입니다. 주님 중심의 환대와 상호보완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35년 동안 여기 요셉 수도 가정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점차 분명해지는 사실은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일 것입니다. 지금도 2년전에 써붙인 글귀가 여전히 집무실 게시판에 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몸담고 살아가는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평생 탐구하고 배워야 할 가장 큰 스승인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오늘 기념일의 명칭이 참 깁니다. “주님의 손님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입니다. 2021년 1월 26일, 그러니까 2년전 그동안 마르타 기념일로 지내던 축일을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삼남매 성인을 기리는 축일로 바꾸니 얼마나 풍요로운지 이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업적입니다. 개인이 아닌 더불어의 공동체성이 잘 드러나는 축일입니다. 경신성사성의 발표문중 핵심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집에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의 가족 정신과 우애을 경험하셨고, 이런 까닭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너그러이 환대를 베풀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온순하게 경청했으며, 라자로는 죽음을 굴복시키신 분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즉시 나왔다.”
변경된 축일 명칭이 얼마나 합당한지 감탄하게 됩니다. 베타니아의 성녀 마르타, 성녀 마리아, 성 라자로 가정 공동체는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교회 공동체의 원형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수도 가정 공동체 역시 베타니아 삼남매를 닮아 주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환대와 상호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제가 삶의 좌표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좌우명 고백기도시 한 대목을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참 많이 강조했던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요,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학인이요, 평생 주님의 형제에 대한 삼중 신원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 몸을 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전우애, 학우애, 형제애가 창조적 긴장 가운데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이상적인 사랑의 수도가정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강조할 바 사랑입니다. 사랑의 공동체요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 이것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중심인 사랑의 주님은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영원한 사랑의 모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강조하는바 사랑이요, 늘 들어도 새롭고 공감이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이런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순수한 사랑, 이타적 사랑, 집착없는 이탈의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평생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역시 사랑 공부에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배움입니다. 평생 배움터에서 평생 겸손히, 한결같이 평생 배워야 할 사랑의 배움터인 공동체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환대의 사랑, 경청의 사랑, 상호섬김의 사랑, 상호보완의 사랑을 배우는 우리들이요 이런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공부중의 평생 공부가 하느님 사랑 공부입니다. 그리하여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을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정의합니다.
우리는 우선 무엇보다 오늘 주님의 삼남매 공동체로부터 환대와 섬김의 사랑을 배웁니다. 관상의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섬기는 마리아요, 활동의 사랑으로 주님을 환대하고 섬기는 마르타가 환상적 조화를 이룹니다. 또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마르타로부터는 주님의 신원을, 성녀의 신앙 고백을 배웁니다. 다음 주님과 마르타의 대화가 우리에겐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참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은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주님은 마르타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진리입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단절된 영혼의 죽음, 영원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일 때 영원한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두려운 병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우리의 고백을 대변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깊이 섬겨온 환대와 섬김의 성녀, 사랑의 활동가 마르타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영광스럽게도 이런 사랑의 주님을 환대하여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한몸 공동체를 이뤄 살게 하시고, 한결같이 당신 사랑의 전사. 사랑의 학인, 사랑의 형제로 살게 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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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처럼>
나날이
주님처럼
사는 사람은
나날이
주님처럼
죽을 것입니다
나날이
주님처럼
죽는 사람은
나날이
주님처럼
살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주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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