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세계사"
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초판 1988년, 개정판 2011년)한번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되어서 화명도서관에서 빌렸다. 제목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시민이 썼다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래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된(10.12) 유시민이 정치를 시작하기 이전에 방송에 출연하는 등 제법 잘 나가던 때에 쓴 책이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혹은 세계사적으로 가장 격변의 시기를 2차 세계대전 때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1차 세계대전에서 2차 세계대전까지, 이후 독일 통일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는 이전까지 힘이 없던 민중이 힘을 보여준 시대다. 이 시기도 이전의 시기처럼 흘러 왔겠지만 역사는 언제나 물처럼 흐르는 것이기에 바른 눈으로, 크게 뜨고 보면 지난 일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
“미국과 영국 등 1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나라들은 자기네를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다시 잤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민중에게는 아무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밀려났지만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겨우 20년 뒤에는 훨씬 더 무시무시한 전쟁이 세계를 뒤흔들게 된다. 두 세계전쟁 사이의 20년 세월은 결코 평화시대가 아니라 더 끔찍한 재앙이 폭발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75쪽-사라예보 사건)
“모택동은 중국대륙을 통일한 여덟 번째 영웅이다. 그런데 그는 진시황, 유방, 유비, 조조, 주원장, 징기스칸, 누루하치 등 앞선 시대 영웅들과는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들었다. 이전 영웅들은 수백만 농민군이나 몽골 또는 만주의 야만족을 이끌었지만 언제나 멸망해 버린 이전 나라와 본질적으로 같은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왕조의 이름을 바꾼 것을 빼면 별로 다른 데가 없는 전제국가가 2천년 동안이나 중국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장개석과 모택동은 달랐다. 장개석(장제스)은 봉건적 전제국가가 무너진 자리에 자본주의경제제도와 독재 권력을 심으려 했다. 그러나 모택동(마오저뚱)은 봉건질서를 쓸어 내는 동시에 막 떡잎이 나오려던 자본주의마저 부정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모택동은 장개석이 이끈 국민당 군대와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을 상대로 30년 동안이나 싸운 끝에 천안문 광장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로부터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중국은 모택동이 설계한 것과는 무척 다른 나라로 변하였다. 모택동이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했던 중국 정치체제는 공산당 지배하의 일당독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면에서는 시장경제를 들여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하고 있다.
옛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과 달리 중국이 시장경제를 확대하면서도 일당독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중국공산당이 머지않아 소련공산당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도시와 수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다음 나라전체를 사회주의체제로 바꿔나간 러시아나, 소련군대가 점령한 가운데 탄생한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생겨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의 특수성이 무엇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모택동이 이끈 대장정을 통한 국가건설이었다.”(149쪽-대장정)
우리는 어땠을까.
“이승만은 일찍이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하여 미국 정부에 청원서를 넣으며 소일했던 2류 독립운동가였다. 미·소가 38도선 남북을 각기 점령하고 동서양진영 사이의 냉전이 시작되자 그는 외교론자 답게 냉전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강대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이용하여 일약 민족지도자로 부상했다.
해방되면서 달아났던 매국노들은 남한에 반공정부를 세우려는 한 가지 목표에만 집착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제의 고등계(사상계)형사출신들은 경찰수뇌부를, 일본군 출신들은 군 지도부를, 친일관료배들은 학교를 차지했다. 어제까지 ‘천황의 충복’임을 자랑하던 자들이 하나같이 반공투사라는 허울을 쓰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이승만은 호전적인 북진통일을 주창하면서 ‘3일이면 평양을 점령 할 것’이라고 큰소리 쳐댔지만 북한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6.25가 터지자 불과 며칠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 또 ‘아군이 반격 중이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방송을 되풀이하면서 자기들만 피난한 다음 북한군의 추격이 두려워 한강교를 폭파함으로써 수많은 서울시민들이 빠져죽게 하고 서울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260쪽)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제1공화국 자유당정권은 이승만을 대통령에, 미국에서부터 그의 수행 비서이던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로 개표조작까지 하기에 이르자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한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시위에 가담한 김주열 군이 3월 18일경 실종되었다가 몸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는데 4월 11일 시신 사진이 부산일보에 공개되면서 시위는 격화되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9일 경무대로 몰려간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186명이 죽고, 6천여 명이 피를 흘린 대가로 4월 26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긴 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가족은 아들 이강석의 총질로 모두 죽었다. 석달 뒤 민주당이 압승한 가운데 장면 내각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1967년 작은아버지가 맹호부대 주임상사로 월남전에 참전한 적이 있어 부산항에서 환송회를 하던 기억이 생생한 나는 이역만리 멀리 남의 나라 싸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유시민이 보는 시각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만약 우리정부와 국민이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계속해 외면한다면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를 이 나라와는 결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감추려고 역사교과서까지 왜곡하는 일본 정부를 욕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더군다나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지원과 ‘경제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며 베트남 참전을 옹호하는 소위 경제논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식을 배불리려고 도둑질이나 강도질까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오늘날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로 다가오고 있다.” (304쪽)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프랑스, 일본, 다시프랑스로 이어지는 식민지시대를 격은 복합적이고 복잡한 역사가 있지만, 미국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부하면서 ‘사탄의 제자’인 공산주의자와 한오라기라도 관련이 있다고 의심이 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개입하고 간섭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베트남 공산주의자의 활약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엄연한 장삿속도 들어 있었고 또 지리적으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 나아가 중국과 러시아의 태평양으로의 팽창을 봉쇄하는데 필요한 요충지이기도 했다.
아무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던 베트남전쟁은 베트남민중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난 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북베트남의 도시와 산업시설은 미군비행기가 퍼부은 융단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미군이 화학무기를 뿌리고 불도저로 밀어붙인 탓에 황무지로 변한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고엽제로 인해 말라죽은 숲과 독성으로 인해 태어난 기형아들은 두고두고 아픈 상처로 남았다.
통일베트남은 사회주의를 선택했으며 베트남혁명은 러시아나 동유럽 사회주의 혁명과는 전혀 다르고 중국혁명과도 다르다.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대외정책을 가진 낡은 봉건국가에서 일어난 것으로 볼셰비키는 도시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내전을 통해 반대세력을 제거했고 그 권력을 지키느라 외국군대와 싸웠다. 동유럽은 나치군대를 밀어낸 소련군이 감독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체제로 넘어갔던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배경으로 국민당 군대와 내전을 벌인 끝에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베트남혁명은 제국주의 군대를 상대로 한 전쟁 그 자체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 인민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오늘 책을 반납해야 한다. 2주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읽어왔고, 지금은 마지막 장인 ‘20세기의 증언’ 독일통일을 읽고 있는데 이로서 이 책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게 될 것이다. 400쪽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었고 글자도 그리 크지 않아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세계의 근현대사를 뒤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독일 통일은 역사가 내린 선물도 아니고,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사고 (事故)또한 아니다. 그것은 반세기에 걸친 동서체제 경쟁의 필연적 귀결이며 20세기 인류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보여주는 성적표였다. 사회주의 나라들에게 첨단기술과 신소재 수출을 금지한 자본주의 열강들의 정책을 탓해 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열감의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 자체의 비효율과 국민의 창의성을 억압한 통치방식 때문에 제풀에 무너졌다. 그들이 택한 방식으로는 ‘사회주의 이상국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반세기에 걸친 역사가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독일은 통일 직후 유럽의 불황한파로 한 때 서독에서 실업자가 250만을 넘어섰고 독일전체는 400만을 육박했다. 거기다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난민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여 먹여주느라고 연방제정은 더욱 나빠졌다. 대량실업과 복지감축이 외국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네오나치들은 독일과 터키정부가 맺은 협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는 터키인들을 폭행하고 밤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게 어려워지자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동독주민들은 서독 사람을 ‘돈만 밝히는 거만한 서독놈’ 베씨(Wessi)라 욕하고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을 ‘일은 안하고 불평만 늘어놓은 동독놈’ 오씨(Ossi)라고 비웃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독일이 국가의 통일과 동시에 사회적 분열을 얻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독일 통일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며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 말처럼 천천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손익계산을 하느라 주판을 굴릴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한다. 우리사회가 21세기에 어디로 나아갈지를 예측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제도와 정치체제에 관한 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사회주위 이상을 결합한 경제체제라는 것이다. 혼합경제, 복지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주의시장경제 등 그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시장기능을 무시하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물론이요,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 사회정의와 생활안정을 보장하지 않은 채 약육강식과 같은 자본주의 경쟁체제 역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