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2]‘고난苦難의 역사’ 베트남과 대한민국
배낭(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패키지여행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패키지여행은 가고 싶은 나라들을 사전에 공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현지 여행가이드들이 충분히 해설을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끊임없이 ‘영양가 있는’ 인문학적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을 할수록 상식과 교양, 지식이 깊어지는 장점이 있다. 여행을, 관광을 왜 하는가? 뭔가 보고, 뭔가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순전히 힐링(휴양)을 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내는 터키(튀르키예) 8박10일을 다녀온 후 다시는 패키지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물론 패키지여행의 단점도 많다. 관광객부터가 ‘본전’을 뽑겠다는 심산으로 명소名所를 다 들러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시간이 거의 없고, 또 여행사들의 조건부 쇼핑샵 순례가 필수코스이어서 마냥 사양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좌우지간, 얼마 전 베트남 다낭을 29명이 패키지로 3박5일 다녀왔는데, 일정이 너무 널널하여 나만의 힐링을 톡톡히 했다.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고, 하루에 고작 한두 곳에 다녀온 후 마사지다 뭐다 휴식시간이 넘쳤다. 물론 삼삼오오 술추렴하는 패도 있었으나, 나는 두 권의 책을 가져갔다. 날이 환해지면서 길이가 34km나 된다는 5성호텔앞 미케해안엔 새벽 5시부터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책을 읽는다. 얼마나 고상한 취미인가? 하하. 가져간 책은 도올 김용옥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와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다. 도올 선생님의 재밌는 반야심경 책은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이미 ‘현대판 고전古典’이 된 함석헌 선생님의 역저力著이자 쾌저快著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사진 왼쪽 책, 66년 발행, 75년 중판, 1800원, 씨알의소리에서 보내줌). 일제강점기 1930년대 정주 오산학교 국사선생이었던 함선생이 골방에서 지인들에게 펼쳤던 우리나라 역사이야기가 잡지 <성서조선>에 연재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 직전에 책으로 나왔는데, 당시 책 제목은 <성서로 본 한국역사>. 세 번째 책을 펴내며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뀌었다. 지리멸렬, 고난으로 점철된 5천년 역사를 바라보건대, 무슨 뜻이 있지 않겠냐? 무슨 뜻이 없다면 가시밭길의 쭈그렁 밤송이마냥 이럴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고난의 역사관’을 펼쳐보였다. 첫머리 한민족의 <당당한 출발>을 읽고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1810072242005
모 신문에서 <내 인생의 책> 다섯 권을 물었을 때, 당연히 첫 번째로 이 책을 꼽은 까닭이다. 어린 나이에도 한자투성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 거야! 천손天孫의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83년엔 한길사에서 <함석헌전집> 1권으로 펴낸 <뜻으로 본 한국역사>(4200원)를 구입했고, 최근엔 친구가 선물을 하여 세 권의 같은 책을 갖고 있다.
10대 후반, 20대 후반, 60대 후반, 세 번을 같은 책을 읽으며, 읽을 때마다 느낌과 감동이 달랐다. 그래서 이 책은 이미 고전古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흔히 <논어論語>을 ‘불멸의 고전’으로 친다. 한 삶을 살면서 몇 번을 읽어도 감동이 새로운 책, 동서고금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무한한 교훈을 주는 책이 고전이라 할 것이다. 평화사상가 함선생님이 우리에게 주는 ‘고난의 역사관’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한다. 우리는 다 함께 그 ‘역사의 뜻’을 찾아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이야기는 여기부터이다. 베트남 출장을 두 번 갔었지만, 관광이 아니었기에 가이드가 없었다. 이번에는 불과 3박이었고 다낭에는 별 관광명소도 없었지만, 틈틈이 가이드의 해설은 내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1, 2, 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기억하시리라. 1946-54년 프랑스와의 전쟁, 1965―73년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전쟁, 1975-91년 중국과의 전쟁, 이밖에도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근국가들과의 전쟁이 있었지만, 세 차례의 큰 전쟁에서, 놀라지 마시라. 승자勝者는 모두 베트남이었다. 그들은 악랄한 고엽제 공격도 끝내 이겨냈다. 그 전쟁의 뒤에는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전설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죄없이 죽어나갔을까?
그 고난의 역정이 수세기를 이어져 내려온 베트남은 슬픈 나라였다. 대한민국 역시 슬픈 나라였다.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는 측면에서 두 나라는 닮았다. 베트남은 수 백년간 서양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였지만, 민족의 정기를 한번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백절불굴百折不屈, 비록 4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지만, 꺾이면 꺾일수록 뭉쳐야 산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었다. 현대사를 통틀어 온통 전쟁으로 얼룩진 그 나라, 백전백승, 이제야 비로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당당하게 비상하고 있다. 아니, 질주하고 있다.
GNP가 아직은 5천여달러에 불과하지만, 그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 신흥강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젊기 때문이다. 젊어도 너무 젊은 듯했다. 2016년 전체 여대생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아이를 2명이상(25%), 4명이상(25%) 낳기를 희망하고, 26세쯤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인구 110만명인 다낭시의 평균연령이 23세라니, 자녀 4명인 가족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이 아닌가.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했다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도 포기하는 등 ‘3포세대’의 젊은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은 어쩐지 불안하다.
아무튼, 친절하고 유식한 가이드(정종섭)에게 함 선생님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여주며 <뜻>에 대하여, <고난의 역사관觀>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다음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치민평전>(찰스 펜 지음, 김기태 옮김, 2001년 자인 펴냄) 복사본 한 권을 갖다 주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고마운 책선물이 어디 있을까? 이런 책선물은 내 평생 처음이다. 국내에서 여러 권의 평전이 나왔으나 과장, 미화한 책이 대부분인데, 이 책이 가장 객관적으로 정리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퇴근길, 수백, 수천만대의 오토바이 퇴근행진을 목격했는데, 오토바이 댓수 만큼이나 베트남이 빠르게 발전할 것같은 ‘희망 예감’에 사로잡혔다.
베트남에 함석헌 선생님같은 역사학자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뜻으로 본 베트남역사>를 썼을 것같다. '고난의 여왕'이었던 베트남민족과 한민족이 그 숱한 고난의 역사를 딛고 ‘빛나는 왕관’을 쓸 날을 그 언제일까? 그리고 그 날은 기어이 오고야말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 ‘고난의 역사’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 마흔 살, 쉰 살, 예순 살에 <인생독본서>인 논어를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더니, 이 책 역시 그러했다. 함선생님의 통렬한 역사서를 세 번째 읽은 것은 역시 잘한 일이었다. 강추!
후기1: 두 권의 책을 이번에 다시 구입해 읽은 까닭은, 영주권도 따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넘'으로 살 것같은 둘째아들과 새아가에게 이 두 권을 선물하려는데, 나름의 북리뷰를 동봉하려고 한 때문이다. 당연히 도올 선생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의 북리뷰도 있어야 할 것이다.
후기2: 세 번째 갖게 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최근 나의 오랜 전우戰友(주특기는 달랐지만 육군병장 3호봉으로 27개월간 같이 복무했던 777부대)가 선물한 것임을 밝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