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月 7만원’ 무제한 대중교통권 실험
교통비 속속 내리는 유럽… 탄소중립 속도 낼까
독일에서 최근 버스 지하철 트램 등 모든 대중교통을 한 달 49유로(약 7만2000원)에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 출시돼 인기를 끌고 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출시된 것이지만 대중교통 이용에 따른 탄소 감축 효과도 나타나 요금제 운영기간과 범위가 대폭 확대됐다. 이 같은 대중교통 ‘한 달 티켓’ 제도가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하는 다른 국가에도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AP·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일(현지시간) 월 49유로로 독일 전국에서 시내버스 지하철 트램 등 모든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도이칠란트 티켓’이 출시됐다. 단 장거리 시외열차는 제외된다. 독일 교통회사연합(VDV)에 따르면 시행 첫날 이 티켓을 구매해 사용한 이들은 300만명에 이른다.
뜻밖의 효과 ‘탄소 감축’
소비자들은 이 티켓으로 지역 열차를 이용한 국가횡단 여행을 할 수 있고 통근하는 직장인의 비용이 크게 줄어들 거라며 환영하고 있다. 뮌헨 외곽에서 통근을 위해 매달 180유로 이상 지불했던 클라우디아 유츠(47)는 “비용이 엄청나게 절감될 것”이라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이 티켓은 지난해 6~8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도입됐던 ‘9유로 티켓’의 성공에 힘입어 재출시된 것이다. 지난해에는 매달 9유로(약 1만3000원)로 지역 기차와 지하철, 트램,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었다. VDV에 따르면 당시 약 5200만장 티켓이 판매됐다. 이 티켓 구매자 7만8000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1명은 매일 한 차례 이상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달 티켓은 ‘탄소 감축’이라는 뜻밖의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도 확인됐다. VDV는 지난해 6~8월 3개월 동안 ‘9유로 티켓’으로 약 180만t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방지했다고 밝혔다. 이는 1년 동안 약 35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한 것과 같은 효과다.
이번에 출시된 도이칠란트 티켓은 요금이 전보다 훨씬 비싸졌지만 최소 2년간 운영될 예정이라는 점에서 앞서 출시된 3개월의 시범운영을 보완했다. 또 이 같은 대중요금제가 일부 지역에 국한된 서비스가 아니라 국가 정책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도이칠란트 티켓에 대해 “대중교통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고 기후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쉽고 저렴한 제안”이라고 환영했다.
독일은 특히 운송 부문에서 탄소 감축량이 목표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 도로 교통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려면 대중교통 이용을 더욱 장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독일 연방환경청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의 운송 부문 탄소 배출량은 295억8000만t으로, 정부 목표치였던 277억6000만t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통근자들이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연간 2130만t의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
대중교통 요금 인하 움직임
유럽연합(EU)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에너지를 절감하고 도로 교통량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 요금을 인하하거나 무료로 제공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했다. 오스트리아는 2021년 시민들이 하루에 단돈 3유로(약 4300원)로 나라 전역에서 공공 버스, 트램, 기차 등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기후 티켓’을 도입했다. 스페인은 지난해 9~12월 교외 철도 시스템에서 통근자에게 무료 시즌 티켓을 제공했다.
교통 혼잡도가 가장 높은 국가들 중 하나인 룩셈부르크는 2020년 자동차 이용을 줄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국 모든 대중교통을 무료로 만들었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프랑스 됭케르크·니오르·몽펠리에, 체코 프리데크미스테크 등에서도 대중교통이 공짜다. 호주 녹색당도 지난달 생활비를 줄이고 탄소 배출을 경감하기 위해 1년 동안 모든 대중교통을 무료로 제공하는 안을 제안했다.
한국에서는 세종시가 전국 광역지자체 가운데 처음으로 전 시민 시내버스 무료화 정책을 시행한다. 오는 2025년부터 세종시민은 승차 또는 하차를 세종시에서 할 경우 시내버스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 세종시는 이에 앞서 내년 9월부터 4개월 동안 출퇴근 시간대 버스요금 무료화를 우선 추진하기로 했다. 세종시는 버스 무료화를 통해 자가용 사용이 억제된다면 연료 절감과 탄소중립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탄소 감축 위해 장려 필요”
독일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서 지난 1일(현지시간) 한 남성이 ‘도이칠란트 티켓’ 광고판 앞을 지나고 있다. 독일 전역에서 월 49유로(약 7만2000원)에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이 티켓은 출시 첫날인 이날 300만명 이상에게 판매됐다. AP연합뉴스
다만 이 같은 저렴한 대중교통 요금 제도의 가장 큰 과제는 운영 비용이다. 독일 연방정부는 이번에 도이칠란트 티켓 제도를 도입하면서 초기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연간 15억 유로를 지출하기로 했으며 독일 16개 주도 각각 같은 금액을 내기로 합의했다. 실제로 지난해 독일에서 9유로 티켓 사용이 도입된 후 슈투트가르트와 뉘른베르크에서 연말 대중교통 요금을 각각 4.9%, 3% 인상하는 등 손실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요금을 올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교통 이용 과밀, 재정 문제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9유로 티켓’ 도입 이후 독일에선 승객들이 버스와 기차로 몰려들면서 대중교통 과밀화와 좌석 부족 등 혼란이 야기됐다. 대중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시골 지역은 티켓 이용이 어렵다는 불만도 나왔다.
그럼에도 탄소 감축을 위해 대중교통 이용 장려는 꼭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는 독일의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 사례에 대해 “대중교통 시스템을 누구나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포지셔닝하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다른 국가로 영향이 파급될 수 있다”며 “205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하는 EU의 다른 국가에도 모범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S&P 글로벌수석이사인 곤잘레오 칸타브라나 페르난데스는 “철도 사용을 확대하는 것은 유럽 정부의 우선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