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27
3월12일[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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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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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GnmSHTd1NA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900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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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 그 어딜 가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 갈증에 매일 허덕이는 오늘 우리들!>
오늘 소개되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장면은 하느님께서 허물투성이요 죄인인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접근하시고, 어떻게 대하시며, 어떻게 동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도 없는 대낮 정오 무렵에 물을 길으러 마을 공동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근동 지방의 정오 무렵은 햇빛이 강렬함으로 인해 너무나 뜨겁고 건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급적 외출을 삼갑니다. 따라서 아낙네들 더위가 한풀 꺾인 해질녁 우물가로 모여 들었습니다. 거기서 그녀들 특유의 잡담과 뒷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하필 정오 무렵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정오 무렵 우물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동네 여인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남편을 교체했던 사연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녀 내면에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여인은 혹시나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다녔던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이런 욕구불만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평생을 두고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는 않는 여인의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다가서십니다.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보십시오! 예수님만이 그녀 내면의 깊은 상처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그녀가 평생토록 지고 왔던 십자가의 무게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생명의 물 한잔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물은 다름 아닌 구원의 샘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생명의 샘물을 건네십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과 ‘참 만남’, ‘일생일대의 은혜로운 만남’을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리더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담자이며 상담 고객인 사마리아 여인을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릇되게 살아온 삶에 대해 질책하지도 않습니다.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놔주십니다. 그렇다고 완전 방임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자극도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 격려도 하십니다. 천천히 인내롭게 과정을 밟으면서 그를 영원한 구원의 샘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 참된 리더의 전형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딜 가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 갈증에 매일 허덕이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예수님 존재 자체가 그 지독한 갈증을 영원히 채워주실 생명수이십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께서 매일 건네시는 영원한 생명의 물을 받아 모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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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DPKdexhU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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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예배하지 않으면 온전한 부모가 될 수 없다>
김창옥 강사는 수많은 강의를 하며 기쁨과 공감을 주는 일을 했지만, 현실은 공허함과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결혼도 하고 자녀도 있었지만, 심지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어디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한 노 수사님과 면담을 하였습니다. 수사님은 일을 잠시 쉬고 프랑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에 가서 두 주 정도 피정을 하라고 권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김창옥 씨는 생전 처음으로 휴가를 내고 말도 안 통하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피정하게 됩니다. 그러다 자기 내면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듣고는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이 위로를 받고 어느 정도 다시 힘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김창옥 씨의 아버지는 김창옥 씨에게 능력 없고 창피한 분이었고 무섭고 닮기 싫은 분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 살아야 했고 또 아버지와는 다르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쳐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분에게 힘을 얻어 그분처럼 살아갑니다. 김창옥 씨는 예배할 대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을 청합니다. 당신께 예배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섯 남자와 살고 있었지만, 삶에 지쳐 물을 뜨러 온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의 물, 곧 영과 진리를 주실 분임을 밝히십니다. 여인은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으로 자신의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도 양식을 먹은 것처럼 흡족해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예수님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고 그렇게 흡족해하시는 장면입니다. 예배드리지 않는 인간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3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리움에 사무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시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마가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발뒤꿈치 다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내용입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특히 자신이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고 엄마가 액자 속 사진으로만 남았을 때,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시인은 이 시를 쓸 때 힘이 들었을까요, 아니면 힘이 났을까요?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처지에서 힘은 내야겠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예배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되는 방식입니다. 심순덕 시인에게 어머니께서 보여준 모범과 가르침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이 ‘영’, 곧 ‘은총’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는 또한 영과 진리로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합니다.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또한 나의 피 흘림인데 어머니를 예배하며 피 흘리면서도 힘을 냅니다.
교회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게 함으로써 생기 있는 신앙인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처음엔 아이들도 쑥스럽고 부모도 쑥스러워했습니다. 서른 번의 칭찬이 끝나고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와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참조: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유튜브]
이런 예배를 통해 아이들도 이제 부모가 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부모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지 않는 자가 온전한 부모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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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LA 신문 홍보를 하면서 ‘교회신문’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서부지역에 있던 ‘가톨릭신문’이 철수하였습니다. 그동안 가톨릭신문을 구독하던 독자들은 3년 동안 교회신문을 구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서부지역에 신문홍보를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었고, 구독신청을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교우들에게도 적극 권면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신문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LA에 머무는 동안 연도와 연미사를 봉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면서 깊은 상심에 빠져있는 교우가 있었습니다. 제게 연도와 미사를 부탁하였고, 저는 기꺼이 고인을 위한 연도와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서 동부에서 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고인을 기억하고, 유족을 위로하려는 이웃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입니다. 한국의 감독은 ‘히딩크’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평가전에서 5:0으로 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히딩크 감독의 별명은 ‘오대영’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한국 선수들이 체력은 강하지만 기술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한 체력을 요구하였습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16강을 넘어 8강까지 올라갔을 때입니다. 모두가 만족하고 있을 때입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I am still hungry!” 나는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였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목마름을 채워주듯이 한국 선수들은 4강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독일에게 아깝게 1:0으로 패배해서 결승까지는 가지 못하였지만,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끌었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고, 2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의 순위가 올라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우리들의 신앙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사제들의 식어버린 열정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강론을 준비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대신에 개인적인 취미활동에 시간을 허비하는 사제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해보지도 않고 미리 포기하는 좌절감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자신의 책임을 교회와 제도의 탓으로 회피하는 무능함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미 지나간 팬데믹을 핑계 삼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신자들 때문에 목말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저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으로 보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신문구독자를 늘리는 것입니다. 직원들과 함께 교회의 소식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사를 재정적으로 안정되게 운영하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팬데믹 때문에 신문홍보를 제대로 못하였지만 이제는 열심히 신문홍보를 다녀야 합니다. 신문사 운영을 위해서 광고를 유치고, 좋은 필진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동북부 엠이의 일을 맡겨 주셨고,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셨으니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며 좋은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작은 씨앗 안에 숨어 있는 열매와 곡식을 보기 때문에 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고, 이 세상의 것들을 넘어서는 참된 진리를 위해서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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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4,5-42: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오늘은 물에 관한 주제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물은 사순절의 신비를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탈출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불평을 했을 때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한 기적을 전하고 있다. 물은 생명의 본질적 요소이다. 광야는 생명의 원천이 고갈된 장소로 물과 대립적이다. 물이 없다면 죽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3) 이것은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표지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내용은 모두 물이라는 표지하에 전개된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세상을 풍성히 먹여 살리시는 “생명의 원천”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목마른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목말라 하시며 당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렇게 하고 계시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 여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주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14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14절) 샘솟는 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로 그 물은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을 떠나실 때, 우리에게 풍성히 주실 성령의 선물도 암시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7-39)
예수 그리스도는 갈증을 풀어주고 생명을 주는 물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과 새로이 만나는 장소이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24절)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당신의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주시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직접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시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예배를 뜻한다.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예배는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로 그분이 ‘새로운 예배’이시다. “지금 우리의 성전은 예수이시며 이 순간부터는 이 성전이 그리짐(Grizim) 산상과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대신한다.”(I. De La Potterie, Gesù verità, Torino 1973, p. 47)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하신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에 가득 차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든다(29-30절).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온다.”(22절) 하더라도 그 구원은 그들과 가까이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음을 복음은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42절)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32절)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만큼 예수님의 신비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음식을 예수께 갖다 드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34절) 그 일은 무엇인가? 문맥을 볼 때,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또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이루어진 결과가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선교 사명을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35절)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분명히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좌절하거나 실망하고 있는 젊은이들,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가난한 이들, 방향감각을 잃은 지식인들, 이들에게 교회는 응답하도록 해야 한다. 사랑과 진리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외침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욱 훌륭한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훌륭한 복음 선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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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요한 4,7)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일이 연상됩니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9,28)
예수님의 ‘갈증’은,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잘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처음에는 예수님께 물을 드리기를 거절했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다음에는 물을 드리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요한 4,28)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물을 드린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생명의 물’을 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는 참된 행복과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물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샘’도 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생명의 물’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 안에도 ‘물이 솟는 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생긴 샘에서 솟는 물은 나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능동적인 신앙생활’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인데, ‘빛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등’도 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인은 각자 하나의 등불이 되어서,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신의 앞도 비추고, 사람들 앞도 비추어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마태 5,15-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6-18)
예수님께서는 왜 갑자기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을까? 여자가 ‘몸의 갈증’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요한 4,15), 우선 먼저 ‘영혼의 갈증’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즉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하려면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자는 심각하게 갈증을 느끼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갈증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말씀은,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의 인생을 예수님께서 꿰뚫어 보셨음을 나타냅니다.
그 여자가 도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생활을 했는지는 모릅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가 참된 행복과 안식을 찾아서 방황하는 인생을 살았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영적 갈증에 시달리면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남편’이라는 말을, 그 여자가 찾는 행복과 안식처를, 즉 참된 종교와 신앙을 상징하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이라는 말씀은, 그동안 참된 종교와 신앙을 찾으려고 여러 종교를 전전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뜻으로, 또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라는 말씀은, 지금 속해 있는 종교도 참된 종교가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여자는 ‘메시아’를 알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었고, 막연한 심정으로, 그러나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직접 “내가 메시아다.” 라고 말씀하신 일은 없습니다. 여기서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는데, 뜻으로는 “내가 바로 메시아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고 여자에게 말씀하신 것은, 여자가 믿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나그네 여행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만이 그 갈증과 허기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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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는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수를 주제로 하는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한 예배를 주제로 하는 대화입니다. 생수를 주제로 하는 첫 장면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여인은 현실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한 걸음 나아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진실한 예배에 대한 주제에서 예수님과 여인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이해하는 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느 ‘유다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생수에 대하여 나누는 어색한 대화는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예수님을 ‘예언자’로 깨닫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지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고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증언합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사마리아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고 이해하며, 믿고 증언하는 것은 복음이 제시하는 믿음대로 실천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을 통하여 믿음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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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마음이 열려있는 이들의 만남>
어느 순간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 번쯤 해 보셨을 겁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입어보니 뜻밖에 괜찮은 옷, 무관심하다가 나중에야 재미를 느끼게 되는 영화나 드라마, 반복해서 듣다 보니 매력적인 음악 등등이요. 그런 데 이러한 깨달음은 사실 마음이 열려 있어야 더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은행나무를 떠올리면 누군가는 고약한 냄새를 누군가는 아름다운 노란빛을 먼저 생각하는 법이니까요. 사람이 부정적인 시선에만 머물고 있다면 전체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먼저 좋은 점을 마음에 담고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실로 인생은 아름다움의 향연이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을 들르셨어요. 사실 사마리아는 유다인들에게 무시무시하게 천대받던 지역이었답니다. 기원전 8세기에 순수 유다인들이 살던 사마리아 지역이 아시리아에 점령당했는데, 아시리아가 유다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타민족 간 혼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에요. 이는 혈통을 중시하던 유대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말을 섞는 것조차 금지할 정도로 경멸했는데, 북쪽 갈릴래아에서 남쪽 유다 지역까지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사흘밖에 안 걸리는 길을 그보다 두 배나 되는 먼길로 돌아갈 정도였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이 들어가시네요. 그리고 한 여성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부탁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유다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을 깊이 존중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 역시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영원한 생명의 물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마리아 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장면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주님의 사랑과 이를 받아들이는 이의 열린 마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이처럼 하느님과 하는 소통은 열린 마음 이 있을 때만 가능하답니다. 기도드리고 청한다면 그것을 받기 위한 마음도 열려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종종 우리의 마음은 닫혀 있곤 하지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개인의 일들에 대한 당혹감으로 마음의 자물쇠를 채우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시고 위로의 신호를 보내심에도 깨닫지 못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는 하느님께 얼마나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어요. 오늘 2독서가 이야기하듯, 우리는 믿음 덕분에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이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열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며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죠?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닫힐 리 없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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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강재원 미카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물>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곳은 사마리아입니다. 기원전 721년경 사마리아는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열왕기 하권 17,5-6; 18,9-10 참조) 아시리아 임금은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곳으로 추방하고 사마리아에는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민족들을 데려와 정착시킵니다(열왕기 하권 17,6-24; 18,11; 에즈 4,9-10 참조).
이후 사마리아인은 이민족들과 피가 섞이게 되었고, 그들의 종교 역시 이민족들이 갖고 들어온 이방 신들 때문에 혼합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2열왕 17,25-41 참조).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순혈주의를 고수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율법적으로 정결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무시하고 경시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은 남편도 아닌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한 번도 혼인을 못 해 본 저로서는 부러워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 시대의 혼인 풍습, 여성의 지위를 고려해 본다면 이 여인의 삶은 매우 기구하였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더군다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삶에 꼭 필요한 물을 구하기 위해 나온 시간은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이 시간대는 너무나도 무더워 사람들이 물을 구하기 위해 나오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구설에 올라 있는, 그것을 자신도 알아 사람들을 피하려고 아무도 나오지 않는 한낮에 자신의 구차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물을 구하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한 물동이를 버려 두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현세의 물을 주는 우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나 스스로 완벽한 선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더구나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쉽게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에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르다고 확신을 갖기 어렵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도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물에서 물을 열심히 길어 나르고는 있지만, 그 일에 열중하던 나머지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사순 시기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이번 한 주, 물동이를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건네주시는 물을 받아 마셔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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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기영호 시몬 신부님]
<영원한 생명>
최근 들어 인공 지능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영화나 공상 과학에서 나올법한 미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공 지능이 충분히 발달하면 사람처럼 자의식이 생기게 되는지, 그렇다면 생명이란 관점에서 동물적 구조를 가진 생명체보다 생존 방식이 유리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생명 연장이란 꿈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해 젊음을 유지했다는 사람, 외모를 젊게 만드는 화장술 등등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인간이 시도했던 과거 노력의 공통점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그동안 쌓인 지식과 기술을 기초로 노화를 질병으로 보고 치료하면 거꾸로 젊어진다는 의학이 나왔습니다. 늙지 않는다는 말은 얼핏 보면 영원히 산다는 말로 들립니다. 의료 기술의 수준이 실제로 그에 이르러 우리 몸을 늙게 만드는 유전자를 편집해 젊어질 수 있다면 교우들께서는 그 기회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기회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기에 빈부의 격차에 따라 또 다른 갈등 요소가 되겠지만 나이를 먹어도 젊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 본능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희망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낫게 만드시는 기적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런데 가끔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또는 “너는 구원받았다”는 말씀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몸의 건강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받는 구원은 무엇일까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탄생이 아니라 위로부터 탄생하는 영원한 생명의 표징이 무엇일까요?
우리 조상들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는 말 중 어르신이란 표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경우에 어르신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나이가 들면서 삶의 지혜가 쌓인 사람을 어르신이라고 부른다는 과거 기준은 더이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나이와 삶의 지혜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이란 특별히 무엇을 해서 어르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댈 수 있도록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것과 어르신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삶의 태도를 따라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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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재현 도미니코 신부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
오늘 복음은 ‘물을 길으러 온 여인’과 마실 물을 청하는 예수님과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사마리아여인이 물을 길으러 온 때는 정오 무렵입니다. 사막의 정오는 해가 너무 뜨거워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갔다는 것은 그 여인이 다른 이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심리적 거리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여인이 숨기고 싶어 했던 자신의 과거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과거 모습은 물론 현재 모습까지도 고백케 하십니다. 여인의 이러한 상황을 마을 사람들 또한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한 그녀는 사막으로 정오에 물을 길으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막의 정오, 그 시간 그곳에서 그녀는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심지어 그 분이 말까지 걸어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복음은 여인이 당황하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다가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인의 내적 외로움 또한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인은 늘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이웃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이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했습니다. 여인은 오랜만에 누군가가 다가와 자신에게 내민 손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은 녹아내렸습니다.
얼어있던 마음을 녹인 예수님의 온기에, 이제는 상황이 역전됩니다. 먼저 다가온 예수님께 어느새 여인이 먼저 다가가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면서 시작된 대화가 이제는 반대로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라고 변화되었고, ‘육적인 갈증’으로 시작된 대화는 점차 ‘영적인 갈증’의 대화로 바뀌어 나갔습니다.
마침내 여인은 이 대화를 통해 자신이 단순히 인간적인 갈증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목말라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을 길어 마셔도 채워지지 않던 여인의 갈증이 예수님의 다가감과 사랑으로 채워지고 풍성해졌으며, 사람을 통해서도 채워지지 못했던 여인의 외로움도 예수님의 다가감과 사랑으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 안에 채워야하는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자기 계발도 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재미있는 삶도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적인 채움에 앞서 나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먼저 채워 넣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우리를 더욱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요한 4,14 참조)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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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명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생명을 줍니다. 활력을 줍니다. 특별히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생명의 물’과 차별 없는 사랑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필요한 은총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 번째 주제입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으로 살려면 말씀이 필요합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썩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물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합니다. 정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은 영혼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더러움을 비추어주고 깨끗하게 하도록 일깨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한 말씀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혼을 맑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목말라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안에 머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행동하게 될 때 그 안에 구원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신앙인이 영적 양식인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듣지 않으면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결국, 단 하루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않으면 진리 안에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양식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렇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하루라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화답송을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묵시록 22장 17절에 보면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물을 거저 받아라.’그야말로 ‘공짜로 받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준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담을 그릇은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묵시록 3장 20절에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분께 매달리기도 전에 먼저 나를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일에 바쁘면, 내 안이 시끄러우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분은 그분뿐이심을 알고, 다가갈 때에만 비로소 그분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지 않는 데 억지로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데 너무도 귀한 말씀이라고 책장 안에 고이 모셔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금박을 입히고 가죽으로 포장하여 지퍼를 채운 채…. 어떤 사람은 어떤 말씀이 있나 들춰보기는 하는데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사실 실천함으로써 풍요롭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행하게 될 때 은총이 됩니다.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말씀대로 실행함으로써 축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병원에 봉성체를 다녀오면서 환자분에게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눈이 잘 안 보여서 읽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는 법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성경을 탁자에 갖다 놓고 간호하시는 분이나 누가 병문안을 오거든 꼭 성경을 몇 구절 읽어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또 읽는 사람도 혹 신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접하는 기회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군불 때고… 일석삼조입니다.”
어느 집에 환자방문을 갔더니 개신교 신자가 요양보호사로 와 계신 데 시간이 남으니까 환자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계시다라고요. 참으로 기뻤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그분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묵주기도를 바치나? 생각해 봤습니다. 활기 있는, 생명 있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주제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는 물을 달라는 예수님께 “선생님은 유다 사람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앙숙관계, 상종하지 않던 때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에 관해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는, 인간적인 마음에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요한 4,15)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이틀이나 머물렀습니다. 상종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함께 지냈다는 것은 벽을 넘은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도, 옳지 않은 사람도, 의견이나 성격이 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참되게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
우리도 벽을 넘어야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멀리했던 사람들, 상처받았다고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나만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합니다. 편견과 오해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에 집중했듯이 오늘 우리의 영혼 구원에도 집중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등진 사람은 많았지만, 예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포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절망하는 여인을 찾아 나서서, 그의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목이 타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아 욕구불만과 정서불안, 정신적인 아픔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성사로 다가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양식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청하면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결국에는 깨달음과 더불어 더 큰 은혜를 입게 됩니다.
특별히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미사성제를 통하여, 성체조배나 일상기도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양소입니다. 매일 섭취해야 하는 양식입니다. 구원의 생명수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가운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리라.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알맞은 축복, 은총을 더해 주십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 41,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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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에서는 못생긴 사람을 오징어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고, 또 호박이나 메주에 빗대어서 말합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싶어서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배꽃처럼 못생겼다고 말하고, 불가리아에서는 샐러드처럼 못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나라마다 못 생김의 기준으로 삼는 사물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 같습니다. 자기 세계에서는 전혀 못생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고 또 최고로 멋진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잘 생기고, 못 생기고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그렇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책을 보니, 요즘에 거북목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모니터를 많이 보면서 거북목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가는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계속 진화되는데, 진화의 방향이 거북목으로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백 년 후, 거북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상이고, 거북목 없는 사람이 비정상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미의 기준이 이제껏 계속 바뀌었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지금의 판단이 결코 옳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 미의 기준도 바뀌는 것처럼, 지금 맞다는 것도 어느 순간 당연히 틀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목이 마르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온 세상 구원에 목이 마르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이 이방인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에 목마르셨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현실적인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동문서답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하십니다. 그 결과 진정한 예배에 대한 말을 나눌 때는 처음 생수에 관한 대화하는 다르게 일 보 전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이제 고을에 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직접 증언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벌건 대낮에 우물가를 찾았던 여인인데 말이지요.
주님의 뜻에 우리 모두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운다면 주님 뜻이 세상에 펼쳐지지 않습니다. 우리 구원에 목이 마르시는 주님의 갈증을 풀어 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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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마른 사람아>
요한 4,5-42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목마른 사람아>
그대
살아있어
목마른 것이니
사람아
목마름을
부끄러워하지 말게나
다만
그대의
타는 목마름
한 사발
시원한 물로
결코 삭일 수 없나니
그대
온 몸에
서서히 스미어
늘
푸르게
되살아나게 하는
핏맛 밴
뜨거운 물로
목마름을 푸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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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백 사람의 사랑을 합쳐도>
오늘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목말라 죽겠다고, 그러니 물을 달라고 모세에게 또다시 들이댑니다.
들이대는 것만 놓고 생각하면 참 못된 족속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바꿔 생각하면 목마른 것을 모세에게 호소하고 물을 달라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이 나올 수 없는 사막에서 자기 힘으로 우물을 파고 물을 구하려 하지 않고, 또는 다른 누구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 않고 모세에게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막은 물이 없는 곳이고, 사막에서는 목마르기 마련인데 우리 인생이 바로 사막의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런 줄 알고 그래서 목마를 때 모세에게 물을 청하면 다행인데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은 목말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물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하여 모세의 백성들은 영적 양반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거나 목마른데도 참거나 고상한 척하지 말고 모세의 백성처럼 들이대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은 우리 인간은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주님께 물을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신다는 것,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는 다른 누가 아닌 주님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물을 달라는 백성 앞에서 모세에게 바위를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바위입니까? 그 바위가 암반수이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물이 나올 수 없는 바위에서도 물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함이지요.
탈출기가 이것을 가르친다면 복음은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탈출기가 물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란 것을 가르친다면 복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물은 야곱의 우물물과 다름을 가르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물을 마셨기에 다섯 남자로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섯 남자의 사랑을 합쳐도 하느님 사랑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백 남자의 사랑을 합쳐도 하느님 사랑보다 못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갈증은 인간의 사랑으로 채울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서 연명케 하는 사랑이지 저세상까지 살 수 있게 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만이 저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순 제3주일에 이런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저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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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 세상의 구원자 주님과의 만남 -
저는 늘 오후 8:30분 전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12시30분쯤 일어나 준비한 후 “살기 위해” 그날 강론을 씁니다. 강론 쓰기 전 즉시 확인해 보는 밤사이 받은 메시지입니다. 메시지 셋이었고 마음에 담았습니다.
“사랑하는 신부님! 하닮의 신부님은 언제나 자비로우시고 거대한 산이지요.”
15년 이상 한결같이 ‘예수성심자매회’를 섬겨온 사랑스런 자매입니다. “산처럼!” “하루하루”는 제 삶의 모토입니다. 하루하루 흡사 첩첩산중의 산을 넘듯이 살아온 나날이었고,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넘어야 할 산이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날마다의 강론쓰기입니다.
“평안한 밤 되옵소서. 주님 안에서.”
25년 이상 참으로 한결같이 수도원과 저를 섬겨오다 얼마전부터 과로로 입원 치료중인, 제가 늘 고마워하는 자매입니다. 저는 수도사제로 서품 후 한결같이 미사와 강론에 집중했고 2004년 6월부터는 매월 강론집을 이 자매님이 제 부탁에 호응하여 편집 제본해 주었습니다. 2022년 12월까지니 무려 만 18년 이상, 한 달도 빠짐없이 매월 강론집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2023년 1월부터는 잠시 보류할지 생각중입니다. 자매님이 입원중임으로 제가 편집 정리한 후 출간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습니다. 참고로 2004년6월 강론집의 제목은 “광야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건강하게 충실하던 자매님이 뜻밖의 입원으로 잠시 좌절됐으니 전혀 예상 못한 일입니다. 주님 쾌유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건강입니다. 아프지 마소서.”
간절한 글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랫동안 병고로 하루하루 힘겹게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孤軍奮鬪의 삶을 살고 있는, 저를 한결같이 따르는 타 수도회의 후배 수도사제입니다. 넋두리처럼 시작된 강론입니다. 요즘도 한결같이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으로 써드리는 1테살5,16-18절 말씀의 명약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는 갈망을 지니고 기쁨을, 기도를, 감사를 의식적으로 “선택-훈련-습관화”함이 제일입니다. 이래야 영혼도 튼튼해지고 주님을 만나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 요한복음 4장이 길지만 내용이 참 풍부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의 우리 신자들 모두를 상징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갈증을 짐작할 수 있는 다음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의 내적갈등과 내적갈증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갑니다. 이리저리 내적분열로 내적갈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처없이 표류하며 살아가는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상징하는 바, 바로 내적분열과 내적갈망, 내적갈증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정말 생명수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광야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며 대들던 믿음 박약한 사람들 또한 우리들 모습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
물은 생명입니다. 생명수 물이 상징하는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즉시 하느님의 인도하에 호렙의 바위를 쳤고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비로소 해갈하니 말그대로 광야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광야 인생 여정중 목마르게 주님을 찾던 사마리아 여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진짜 생명수가 샘솟는 생명의 샘, 호렙의 바위샘 주님을 만납니다.
정말 오매불망 목말라 간절히 찾던 생명의 샘 주님을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역시 야곱의 우물가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주님과의 만남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다음 사마리아 여자에게 주신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눈이 열려 예언자임을 알아보자 즉시 주님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니 우리에게도 참 유익합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사마리아 여자는 물론 우리 영혼도 주님의 생명수로 완전히 해갈되는 기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지상천국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묻자 주님의 즉답이 참 통쾌하고 큰 위로가 됩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이 바로 내가 바로 그 사람이신 하느님이자 예수님이신 그분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자 덕분에 영원한 생명과 참된 예배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어 제자들 덕분에 주님으로부터 두가지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양식과 선교사명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씨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도 함께 기뻐하고 있다.”
영안이 활짝 열린 주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시며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과 일치의 삶을 지향하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양식은 주님의 뜻을 행하는 선교사명임을 깨닫습니다. 수확할 밭의 일꾼을 보내주십사 청하기에 앞서 내가 일꾼이 되어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니 깨달음의 절정입니다. 유다인, 예언자, 선생님, 스승님, 그리스도, 메시아에서 마침내 세상의 구원자로 활짝 계시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임을 알게 되었소.”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만남이 해피엔드로 끝나니 참 행복한 사마리아 여자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께 대해 명쾌하게 요약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1-2.5)
세상의 구원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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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4)
<생명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4,5-42)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입니다. 그가 "선생님은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4,9)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4,7)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방인에게 다가가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보편성, 곧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어는 '물'입니다. 물은 '생명수'입니다. 물 없이 결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야곱의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4,14)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실 때,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잡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4,32.34)
'우리를 이제와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수와 생명의 양식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생명수요, 양식 그 자체인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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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Dozyy3wp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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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 14)
우리의
목마름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세상 쪽으로
기울수록 더욱
우리는
목마릅니다.
이렇듯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며
살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생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쪽으로
몸소 오십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깨워주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입니다.
욕망보다 강한
말씀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미움과 욕심의
갈증을 깨뜨리며
십자가에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옵니다.
생명의 물은
사랑으로
흐릅니다.
생명의 물이
만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생명의 물이
흐르는 곳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만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생수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사랑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맛들이는
집중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이웃을 향한
관심이며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깊은
믿음으로
안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랑의 기쁜
주일되십시오.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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