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1요한 2, 29-36; 요한 2,29-34 / 공현 전 수요일; 2024.1.3
오늘 말씀은 복음과 독서가 모두 사도 요한의 기록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1요한 2,29).
의로움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죄를 없앤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의로움이란 세상의 죄가 초래하는 악에 저항하려는 정당한 윤리의식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라야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주체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배후는 악령이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사람의 윤리의식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의로움이 성령에서 나오는 기운으로 거룩함을 입어야 세상의 죄를 없애고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길이고, 시대의 징표를 꿰뚫는 관상적 사색과 하느님 영과 통공하는 기도 생활로써 선교의 영성을 구현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관상적 사색으로 초월하면서 하느님께는 기도로써 통공하는, 그런 진리의 길입니다.
대희년을 앞두고 1998년에 열린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논의된 의제는 당연히 ‘아시아의 복음화’였는데,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주교들의 논의 결과를 받아 들여 교황의 권고문헌 ‘아시아 교회’를 반포한 바 있습니다. 이야말로 아시아 대륙에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추고자”(이사 9,1, 입당송) 하는 의롭고도 거룩한 선교 노력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오늘 말씀의 맥락에 맞추어 이 문헌을 대폭 간추리고 때로는 풀이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구원 계획을 아시아에서 계시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아시아 서쪽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수메르 문명권에 살던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내셨으며(창세 12장 참조), 아프리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그 후손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자 모세를 시켜 가나안에로 다시 불러들이셨습니다(출애 3,10 참조).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에게 많은 판관들, 임금들 그리고 굳건한 믿음의 예언자들과 여인들이 포함된 아나빔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다가, ‘때가 찼을 때’(갈라 4,4) 당신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아시아인의 육신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나자렛에서 생활하시다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으며 모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에, 아시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 작은 땅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를 위한 약속과 희망의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역사를 잘 알고 계셨으며, 이 백성의 고통과 희망을 사랑하셨고 전통과 유산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백성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당신을 맞이한 소수의 유다인들로 새로이 하느님 백성을 시작하셨으니 그것이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아시아에서부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되었는데, 우선 그 당시 이 지중해 문명 지역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중심을 향하여 서진하였습니다.
그 후 계속하여 서진하며 복음을 전해 온 교회가 제1천년기에는 유럽 대륙에 십자가를 세웠고, 제2천년기에는 아프리카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는데, 지구를 한바퀴 돌아온 이 제3천년기에는 찬란한 문화와 고등 종교의 발상지인 아시아에서 신앙의 큰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구원자께서 아시아에서 태어나셨지만, 지금까지 아시아 대륙의 백성들에게는 대부분 제대로 알려지지 않으신 채 남아 계심은 커다란 역사적 수치가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아시아인들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일은 막중한 선교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중세 이후 교회를 주도해 온 라틴 교회가 루터로 인한 분열 사태를 겪으면서 아시아 선교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지만, 아시아의 고등 종교와 앞선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라틴 교회의 신관(神觀)과 교회 모델을 이식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선교 과업은 순탄치 않았으며 도리어 문화 충돌과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라틴 교회는 아시아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구 사회 안에서도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전체 인류 안에서 주도권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륙이고, 세계 인구의 3분의 2 가량이 거주하고 있는 거대한 땅덩어리이며, 또한 세계의 주요 종교들, 곧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의 요람이이고, 불교, 도교, 유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시크교, 그리고 신도(神道)와 같은 다양한 영적 전통들의 발상지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전통과 문화적 가치에 따라서 아시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전해지기 이전에도 영적 가치를 생활하고 있었으며 강한 유대를 지닌 공동체들을 유지해 왔습니다.
아시아 대륙의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볼 때에도 대단히 다양해서, 고도로 발달된 선진 국가들이 있는가 하면, 개발도상 국가들도 있으며, 절망적인 빈곤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후진국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서양에서 유입된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의 물결이 휩쓸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정신 전통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아시아 나라들은 대단히 복합적이어서, 민주주의 정치형태로부터 신정 정치의 형태, 군사독재 정치들과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치 형태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의 정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시아 대륙 선교의 역사는 그리스도 교회의 전체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습니다.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가 시작한 수도 생활의 전통이 동방정교회에서 계승된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 전통 역시, 동방정교회의 정교일치 전통에 따라서 유럽 백인계인 슬라브 민족들의 나라들 안에서만 계승되어온 탓으로 아시아 대륙의 정신 전통과 만나지 못하여 유라시아 대륙 안에서도 아시아와 맞닿은 유럽 지역에서만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 전체 대륙을 복음화시키는 과업에 있어서는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터에, 본격적으로는 루터로 인한 서방교회의 분열 사태 이후에 라틴 교회의 아시아 선교가 시작되어 우수한 인력을 파견하고 풍부한 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투입했지만 위에 언급한 배경과 이유로 말미암아 그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들에서 그리스도인들, 특히 가톨릭 신앙인들은 3% 미만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시아 대륙에서 이룩되어야 할 신앙의 토착화는 예수님의 아시아적 얼굴을 재발견하며, 아시아의 문화들이 예수님의 신비와 그분 교회의 보편적인 구원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노력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서양화되어 버린 이미지를 극복하고 아시아에 뿌리내리는 토착화가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서양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이거나 외래적인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신앙 표현의 토착화된 형태들로 점진적으로 나아감으로써,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의 감수성을 존중하며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인 전례를 토착화시키는 일도 복음화의 결정적인 수단이 되는데, 다양한 종교들의 신봉자들이 의식과 종교적 축제들, 그리고 민간 신앙에 크게 이끌리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특히 그러합니다. 수도 생활의 전통을 그리스도교 초창기에서부터 계승한 동방 교회들에서 전례를 주변 문화와 여러 세기에 걸친 상호 작용의 결과로 대부분 성공적으로 토착화시킨 사례는 배울 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상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아시아 주교들이 아시아 복음화에 관해 논의한 문헌 ‘아시아 교회’의 메시지를 전해 드렸습니다. 동방정교회에서 계승해 온 수도 생활의 전통에서는 예수의 신성이 거룩하게 보전되어 있으며, 이는 서방 가톨릭교회의 선교 노력에서도 존중하며 계승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새롭게 시도하려는 아시아 복음화의 노력에서는 이 수도 생활의 전통에 더하여 아시아인들의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데 헌신하려는 사회적 애덕의 기운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상과 기도로 특징 지워지는 동방의 종교적 전통과, 그리고 애덕 실천 활동에 깃든 서방의 선교적 열정은 이제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대로 의로움을 성화시켜 거룩함을 지향하는 가운데 한류를 복음화시켜 아시아 복음화에 기여해야 할 한국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상기시켜 드리자면,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