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 유성은 카츄사로 군대를 다녀온 뒤 대학을 졸업해 아버지 회사로 입사가 내정된 상태였다.
"한 반년정도 미국에가서 공부하고 올까 생각중이예요. 선우도 오랫만에 만나보구요."
"강성훈 사장네 아들말이지? 그래. 설미도 같이 가는건 어떠냐? 걔도 졸업하고 요즘 심심해 하던데."
부모끼리 이미 내정된 약혼녀나 다름없는 사이인 설미. 전부터 모임에서 얼굴을 익히고 겉으로나마 친한척 지내는 사이.
"아직 약혼식도 안했는걸요. 갔다와서 천천히 진행하도록 해요 아버지."
"크흠. 그래, 하긴 약혼식도 안하고 둘이 보내긴 좀 그렇지, 아직 이르기도 하고. 다녀오면 약혼하고 한 1, 2년 있다가 진행해도
늦진 않겟구나. 미국 어디로 정했니?"
"선우가 알아봐주겟대요. 버지니아 주립대에 영어코스에 한인이 적고 좋다고 들었어요."
"맞다, 기껏 공부하러 가서 한국인끼리 어울리는것만큼 한심한것도 없지. 이왕이면 제약회사 사람들과도 선우에게 부탁해서
줄을 좀 닿도록 해보렴. 토플도 한번 보고, 낙하산 소리 안들으려면 '표면적'으로 보이는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겟지?"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께요."
자유를 추구하던 큰형이 영화를 찍겟다며 의대를 다니다가 사라진것은 유성이 중학교 2학년때였다.
4년 뒤 나타난 그는 인도에서 결혼해 살고있다며 다시는 한국에 돌아올 의사가 없음을 밝혔고 자연히 부모의 기대는 유성에게
옮겨갔다.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를 여자들을 만나고 혜리와 '플레이'를 즐기며 해소해온 그였지만 혜리가 사라진 후,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검은 멍울은 점점 유성을 좀먹고 있었다.
떠나고싶다. 이렇게 답답한 곳에서 벗어나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혜리도, 부모도 잊고 지내고싶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그녀와 비교하게되고 조금만 자신의 변태적인 모습을 드러내도 질겁을 해서 '장난이야' 라며 넘긴것이
점점 스트레스로 쌓인다. 미국에서라면 이런 자신을 받아줄 여자를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안되겟지. 혜리만큼 완벽한 자신의 취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것같다.
이메일도 전화도 편지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녀이지만 유성은 '독립생활을 즐겨보고싶다'며 혜리가 살던 원룸에서
벌써 6년째 생활중이다. 결혼하면 본가에 들어가 살아야할테니 그것도 곧 끝나겟지만.
"야! 김유성!!"
강선우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밝은 표정의 선우와 그의 부인 예린이 손을 흔들며 그를 기다리고있다.
"자식! 왜이리 삭았냐? 못알아볼뻔했네. 반년사이에 이렇게 삭기가 있어?"
"넌 얼굴이 활짝 폇다 선우야. 니가 없으니 내가 늙나보다. 예린이도 안녕? 더 예뻐졌네?"
"오빠 오랫만예요."
부모끼리의 결혼으로 이복남매가 된 예린과 선우는 미국내에서 주마다 법이 다른것을 이용해 비싼 변호사로 소송을 걸어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둘이 미국에 와 산지 겨우 반년이지만 오랜세월을 알아서 그런지 너무도 자연스런 두사람의
모습에 질투까지 나는 유성이었다. 처음에는 포기하라고 말리던 그였지만 지금은 너무 잘 어울리는 둘이 부럽기만 하다.
"너가 들으면 깜짝놀랄 소식이 두개나 있어, 임마!"
"뭔데?"
"하나는 이몸이 드디어 집을 사셨다는 말씀! 아버지 지원 없이 순전히 내돈으로 말이야."
"뭐?!"
"저번에 투자한 회사 수익금이 좀 많아서."
"축하해 임마!"
"또 하나는 너도 반가워할것 같은데, 혜리가 그 회사 카달로그 모델을 하더라? 예린이랑은 벌써 한번 만나봤어."
".......무, 뭐라고?!"
얼음처럼 선우네 차 뒷좌석에서 굳고 만 유성. 망치로 누가 때린마냥 굉 하니 울리는 머릿속때문에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다.
"예린이가 혜리 잘 따랐었잖냐, 걔두 얘 좀 이뻐햇구. 이멜로 연락하다가 지난주에 만난 모양이야."
"언닌 더 예뻐졋어요. 만나면 반가워할걸요? 우리 다같이 한번 저녁먹어요. 제가 연락을 해놓..."
"아니, 괜찮아."
차가운 목소리에 두사람은 흠칫 놀라 유성을 돌아봤다. 장난끼 많고 항상 웃는얼굴인 그답지 않다.
"6년간 한번 연락도 없던사람 만나서 뭐해. 어색할뿐이야."
"오빠, 그때는 그럴 수 밖에..."
"4년을 사귄 나에게 6년간 단 한번도 연락한적 없던여자를 내가 왜 만나. 시간낭비라고."
퉁명스러운 목소리. 선우는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듯 고개를 저으며 예린의 손을 잡았다.
"언니 카달로그 모델만 하는게 아니라 그 상품 디자인도 해요. 한번 볼래요?"
심지가 굳은 예린은 선우의 신호를 무시하며 앞좌석 차 문에 꽂혀있던 카달로그를 아무렇지 않게 내밀었다.
여성 의류가 가득한 카달로그. 그 안에 혜리는 'Angel's touch'라는 란제리라인의 디자이너이자 모델로 활동하고 있었다.
"뉴욕서 컬리지(전문대)를 졸업하고 공모전에 입상해서 이쪽 회사로 들어오게 되었어요. 사실 사는곳은 뉴저지인데 두달간
장기출장 온 상태구요. 곧 돌아가는데 얼굴 한번 보시면 안되나요?"
"........."
말없이 카달로그에 나온 혜리의 옆모습을 떨리는 손끝으로 쓸어내리는 유성. 예린은 그런 그를 눈치채고 말을 멈추었다.
선우가 말없이 내밀은 호텔의 주소. 유성은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태연히 로비에 1시간째 앉아있었다.
예전에는 하얀 피부의 미소년이던 그는 수염을 살짝 기른 모습이었다. 남자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며 보잉 선그라스를 낀 그를
여자들이 흘끔거리며 지나쳤다. 대학교 2학년때까지 키가 큰 186의 긴 기럭지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어깨는 여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손목에 찬 고가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한 기색을 살짝 내비친 순간.
"So we have no meetings tomorrow. Yes, Lisa, I can go shop with you...!!"
(우리 내일 회의 없대. 나 리사 너랑 쇼핑갈수 있...!!)
선글라스를 벗으며 일어선 유성은 통화중이던 혜리와 눈을 마주쳤다.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던 혜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왜 그가 여기에...?! 당황하던 혜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통화를 마무리지었다.
"오랫만이야."
"......."
그를 위아래로 훑는 그녀의 시선. 냉랭한 표정의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따라와."
두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들어서자마자 선물로 받았던 샴페인을 따서 잔에 따른 혜리는
유성에게 건네 챙-하고 건배를 했다.
"그래. 오랫만."
"성공했네. 카달로그 잘 봤어."
"선우구나."
"예린이랑은 한번 만났다며."
"어. 좋은애잖아. 결국 선우에게 붙들렸지만. 끈질긴건 알아줘야해 강선우."
"......."
그녀를 붙들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가 싶어 눈치를 보는 유성이지만 정작 혜리는 태연한 표정이다.
"나 니소식 가끔 들었어, 약혼할 사람 있다며."
"어떻게...?!"
"내 약혼자가 제약회사쪽 사람이야. 너네집처럼."
"어디사람인데."
"Neille"
"아... 그럼 외국인?"
"응. 나보다 일곱살 많아. 내가 디자이너로 성공하도록 밀어준 스폰서이기도 하고."
전보다 성숙하고 차가워진 분위기. 소녀같던 느낌은 사라지고 없는듯해서 낯설기조차 하다.
"왜 찾아온거야? 불장난을 기대한건가?"
"불장난이라니.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
"맞잖아, 우리관계. 불장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난 진심이었...!!"
"쉿. 넌 진심인적 없어.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여기고싶지만 슬프게도 아니었지. 항상 나만 상처받던 관계."
샴페인을 한모금 마시며 침대에 나른히 기대는 혜리의 모습은 고혹적이고 섹시했다. 유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다신 찾아오지 마. 나 두달뒤에 결혼해."
"뭐?!"
"왜 놀래? 난 결혼도 못해?"
"혜리야, 난...."
"김유성."
혜리의 곁으로 다가선 유성은 그녀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6년만의 키스이지만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주는 느낌은 그대로...
"앗!"
입술을 잘근 깨무는 그녀의 반응에 유성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눈이 그를 비웃고있다.
"지금도 니가 날 네 멋대로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마. 그때의 내 성향이 M이었다면 지금은 S에 가까우니까. 내 약혼자가
나에게 지배당하는것을 즐기거든. 나도 지금은 그게 더 익숙하고."
"혜리 너...!!"
"입 다물고 사라져. 넌 내 인생에 불장난으로 지진 얼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유성은 자켓을 들고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나서는 그의 손이 떨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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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서 마무리가 안되네요, 4편에서로 마지막을 지어야할것 같아요. 미안미안 죄송죄송!
길게 쓰려는데 제가 엄마댁에 온 관계로... 이해하세요!!
첫댓글 재미있어요~~ 추천눌러요ㅋㅋ
북팔에 집금나왓나요?
아뇨 아직요 유료화시점이 자꾸 늦어지네요 ㅠㅠ
재밌게 보고갑니다~~
혜리랑 유성이랑 만나기는 했는데.....좋지만은 않에요--;;추천이요^^
그렇죠 ^^
완전재미있어요~~^^ .무슨일이 일어날것같네요
네
완전재미있어요~~^^ .무슨일이 일어날것같네요
일어날지도?
혜리가 많이 달라졌군요 약혼자까지 있을줄 몰랐어요ㅋㅋ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둘다 약혼자가 잇을줄이야.... 담편은 어떻게 될찌~ㅎㅎ
ㅎㅎ 올렸어요
6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 유성이가 혜리에게 과거의 모습으로 다가가려했네요... 두사람 어떻게될지 궁금합니다...
선우와 예린의 달콤한 부부의 정이 담뿍 담긴 모습도 잠시나마 볼 수있어서 좋았어요~~
선우예린 잠시라도 만나니 좋죠 ^^ 저도 애정이 많은 캐릭들
안타깝네요..
^^;;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진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