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는 전혀 낯선 환경으로 떠난다는 것이 때론 두려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잠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좋을 수 있겠지만,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또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낯선 곳에 가서 몇 년을 지내고 와야 한다면, 우리들에게 도전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외국으로 떠나는데 언어가 자유롭지 않다면 더욱 그러하다. 전혀 낯선 환경에서 어떤 일들이 내게 일어날지 또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예수회 양성과정 중 하나인 삼수련을 위해 1년간 호주에 머물게 되었다. 물론 예수회 공동체에 머물렀지만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태어나 호주는 처음 가는 곳이고,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또 영어가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옆 좌석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홀로 떠나는 20대 초반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은 외국여행조차 처음 하기에 내내 한숨을 쉬며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려움 속에 있는 그 학생을 보며 나는 수련을 받을 때 나흘 동안 무일푼으로 떠났던 도보 성지순례가 생각났다. 우리는 수도회 수련자임을 밝히지 않고, 차도 얻어 타지 않으며, 음식은 구걸하고 도보로 성지를 홀로 다녀오는 것이었다. 때는 초겨울이라 밤에는 영하의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나는 그때 느꼈던 불안감을 되새겨 보았다. 참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는 모든 신뢰와 희망을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순례를 떠날 수밖에없었다. 그것은 회심 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던 이냐시오 성인을 본받기 위함이었다.
이런 상황에 접하게 될 때 나는 모든 신뢰와 희망을 참으로 주님께 두며 애절하게 기도를 드리곤 하였기에, 이번에도 나는 주님께 애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문득 나는 이렇게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한 적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과연 몇 번이나 있었나를 생각하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에 채 열 번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지금 것 일생을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애절하게 나를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한 적이 있는가?" 사실 그동안 나의 기도할 때의 태도는 "이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관여하지 마시고, 이것은 제가 어떻게 안 되니 당신이 좀 도와주십시오."라는 식의 부분적인 의탁만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굳이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 없고 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주님을 찾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교만하게 기도를 하였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호주에 1년여 머물면서 이민 온지 20~30년 되는 분들을 만나곤 하였는데, 나는 예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신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분들과 면담을 하며, 때로는 그동안 어떻게 이렇듯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며 가슴이 저리기도 하였다. 전혀 새로운 문화에서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시작해야하기에 어렵고 힘든 상황을 보내야했고, 때론 정말 아무것도 없기에 믿을 분은 오로지 하느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분들은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분들은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익숙하고 예측가능하며 안정적일 때는 주님을 애절하게 찾지 않지만, 어려움과 불확신 중에는 주님을 애절하게 찾고 그분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된다. 즉,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 있을 때, 우리는 낯설음에 긴장하게 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불확실 중에서도 믿음으로 물을 걷듯이…(마태오 14,22-33) 베드로가 호수 위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은 불확실과 믿음이 부딪치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또 우리들의 인생이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이따금 애절한 상황이 찾아온다. 모든 것을 잃어 이제 바라볼 곳은 오로지 하느님 밖에 없는 상황과 큰 절망과 두려움 앞에서 오로지 끈이라고는 하느님 밖에 없음을 느낄 때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며 애절하게 기도한다. 그것은 "부분적인 의탁"이 아니라 "전적인 의탁"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다급한 상황이 없을 때는 애절한 기도보다는 부분적인 의탁에 머물게 된다. 어쩜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그런 상황을 이따금 만들어 주시어 우리가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이번 기도를 통해 그동안 기도할 때 나의 마음가짐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또 얼마나 애절하게 주님께 기도하며, 그분께 전적인 의탁을 하고 있는가? 또한 우리들은 주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부분적인 의탁이 아닌 전적인 의탁을 하며, 나의 모든 희망과 신뢰를 오로지 주님께만 드리며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만일 나의 기도가 부분적인 의탁이라면, 과연 그러한 기도가 하느님께 어떻게 다다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