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라
(데살로니가전서 1 : 1-10)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도 바울 일행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일행은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세 안식일, 즉 3주 정도 머무르다가 밤중에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의 사역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 6절 상반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복음을 받아들일 때부터 그 교회는 이미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환난을 겪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들과 절친했던 데살로니가 주변에 살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주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7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라고 말씀하고 있고, 8절에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 에만 들릴 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비록 복음의 역사가 짧지만 바른 신앙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운데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감사하고 왜 기도했을까요?
1.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받는 믿음’과 ‘역사하는 믿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하는 믿음을 모르고 있고,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도 못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믿음을 발견하시면 기뻐하시고 크게 역사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역사로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9절을 보니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방지역인 데살로니가에는 미신을 많이 섬겨서 우상이 많았습니다. 우상이 많은 지역에서는 예수를 믿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고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은 믿음의 역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방해가 되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남겨둔 우상은 없습니까?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는 왜 아직까지 그 우상들이 남아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 대신에 내 마음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쾌락이 우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취미가 우상이고, 어떤 사람은 자식들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형태만 다르지, 우상숭배는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어떻게 했는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과감하게 끊어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 당했습니다. 더군다나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로부터 구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분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주님이 바디메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 갔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바디매오가 대답하였습니다.<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예수를 좇아 갔습니다. 바디매오는 결론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절하여도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거절 당하며 실망하여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절하여도 고개를 들고 목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교회가 있는 지역은 우상 숭배가 많은 곳입니다. 우상을 떠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려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목마름의 생수의 강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인생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네 믿음대로 될찌라고 말씀하고 있지 내형편대로 대라, 내환경대로 대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거친 바다에서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기쁨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겨진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를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맡겨진에 충성하면 됩니다.
2.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역사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9절 하반절에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사랑의 수고’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은 많은 박해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사랑의 수고"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는 수고가 헌신하고 노력하고 희생하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랑의 노래도 많고, 드라마도 많고, 가슴 찡한 사랑의 시도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랑은 감각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조건적입니다. 희생적 사랑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수고해야 합니다. 엄마 아기를 출산하면 어떻습니까? 사랑의 수고를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럽니까? 어렸을때 분유먹이고 변도 치우고 빨래하고 자녀가 저절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지요. 자녀를 사랑하기에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의 사랑의 수고로 자라나고 성장하면서 커 갑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걷는 것이 자유롭지 못해서 많이 불편하기에 자녀의 손길 도움을 받으며 생활합니다.
어려서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늙어가는 부모님을 효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많을수록 행복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가 한사람이라도 더 와서 예배드리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 얼굴이 전도지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웃으면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인상을 찡끄러고 살아가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요즘 시대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가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좀 멀어질수 있습니다. 몸이 좀 힘들어 질수 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합니다. 우리교회는 한사람만 와서 예배 드릴수 있습니다. 한영혼에 대한 사랑이 큽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쳐냐 하지만 그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인 성도들의 삶과 믿음이 중요하니다.
헌신이라는 말이 수고라는 말이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힘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하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이라도 더 예배 드리고 한번이라도 더 기도하고 한번이라도 더 전도할려고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수고가 있을 때 교회는 좋은 분위기로 가는 것입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말해 주세요.
비난하는 소리보다 칭찬하는 소리가 많아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많을수록 좋은 교회로 소문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가는 것입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습니다.
소망의 인내가 무엇입니까? 10절의 말씀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여기에서 소망의 인내의 동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최대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신앙인에게 천국 소망이 없다면, 어려운 상황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소망이 인내하는 힘을 줍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 재림의 그 위대한 소망을 머리로 그치지 아니하고, 오늘의 아픈 현실을 잘 참고 인내하는데 약으로 썼다고 말씀합니다. 박해를 참고 억울함을 참고 조롱을 참고 가난을 참았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에 인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는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죄에 대한 용서를 바라봅니다. 성령충만을 바라봅니다. 치료를 바라봅니다. 부요를 바라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바라봅니다.
승리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곳에 사람들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흐르고 성령의 감동이 흐르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고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의 열매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